#65
KM 그룹은 최근 드라마틱한 경험을 하면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KM 전자에 대한 정부의 압력은 다른 대기업도 경험하는 일이라서 대수롭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 KM 산업 광주 반도체단지 조성 제동은 다른 어떤 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최문경 부회장이 광주 시장을 비롯한 자신이 깔아놓은 인맥을 다 동원해서 가까스로 통과시켰을 정도로 쉽지 않았다.
막내 최병문의 죽음 이후에 큰 충격을 받은 최용욱 회장조차 마냥 주변 일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256LD 양산에는 문제가 없고?”
도선사 위 백운탐방지원센터 앞. 등산복 차림의 장승일 실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천안 공장 이전에 따라 에칭 공정 생산 능력을 최대한 확보한 덕분에 월 7백만 개 생산은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리드 프레임은 칩의 다리를 나타나는데, 이 숫자가 많을수록 기술이 발전된 것이다. 오성 전자에서 최근 요청한 요구안을 맞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군.”
“부회장님이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그놈이 노력을 한 것인지, 아니면 장 실장이 다 처리한 것인지 알 수가 없지.”
가볍게 몸을 푼 최용운 회장은 뒤쪽에 조심스럽게 서 있는 경호원을 힐끗 살피다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두진이 그 친구가 연락을 했다고?”
“네. 곧 도착할 겁니다.”
마침 차량 두 대가 조용히 나타났는데, 주차장에 가기 전에 먼저 세 사람이 내렸다.
장신에 비쩍 마른 최두진 사장은 경호원과 같이 다가오면서 툴툴거렸다.
“다 죽어간다고 하더니, 완전히 거짓말이었어. 이거 나보다 더 건강하잖아.”
“많이 좋아진 거야.”
서로 친근한 눈으로 바라본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고 하루재를 향해 올라갔다.
경호원은 알아서 거리를 둔 채 뒤를 따랐고, 장승일 실장은 두 사람에게 바짝 붙었다.
* * *
도선사에서 시작해 하루재를 거쳐서 백운산장에 오르면 잠깐 쉴 수가 있다.
백운산장에 물건을 나르는 사람도 있고, 간간이 돌아다니는 백구, 황구도 있다.
개는 경쾌하게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아직은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최용운 회장은 백운산장 앞 벤치에 앉아서 숨을 가다듬었다.
최두진 사장은 최용운 회장과는 달리 건강해서인지 금방 안정을 찾았다.
그는 경호원이 준 물을 홀짝이면서 최용운 회장 눈치를 봤다.
“용운이.”
“응? 왜 그래? 걱정 마. 나 안 죽으니까.”
“쓰러졌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정말 괜찮은 거야?”
“막내 사망 소식 듣고 충격을 좀 받았어. 그 이후로는 회사 일도 손 떼고, 이렇게 신선놀음하고 있잖아. 몸이 나빠질 수가 없어.”
겉으로 봐도 멀쩡해 보이는 최용욱 회장 태도에 망설이던 최두진이 슬쩍 입을 열었다.
“회사는 별일 없고?”
“…알면서 그래?”
“이런 이야기해서 미안한데, 내가 듣기로는 문제가 제법 있어.”
“알아.”
한숨을 내쉰 최용욱 회장은 골치가 아픈지 인상을 찡그렸다. 막내의 사망 소식에다가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서 결국 주치의 제안에 따라 모든 일에서 손을 뗐다.
다만 그때까지만 해도 한 가지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는데, 바로 최민혁이다.
문제는 이제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최민혁이 과연 호랑이 같은 자식들 등쌀에 치여서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했다.
막내가 살아 있었다면 남들처럼 대리나 과장부터 시작해서 회사가 뭔지 하나씩 배우게 했겠지만 상황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갑자기 죽어버린다면 최민혁은 진짜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린다. 설사 유산을 일부 상속받아도 그것을 지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리수를 둬서 최민혁을 KM 전자 실장에 앉힌 것이다.
그리고 경영의 살벌함을 경험해서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기를 바랐다.
‘장 실장에게도 부탁을 해서 만에 하나라도 생길 문제를 막을 수 있다고 봤어.’
중앙지검의 경험은 세상의 살벌함을 보여주기에 좋은 장소였다.
최악의 경우에 중앙지검 내부에 손을 써둔 김종도 차장검사 처남의 소송 사기를 이용해서 최민혁을 빼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최민혁이 갑자기 휴학계를 낸 이후에 모든 일이 바뀌었다.
최훈열이 갑자기 구속되었고, 차입금에 대한 정부 압력도 받았다.
첫째는 갑자기 터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한다고 정신이 나가 버렸고, 셋째는 불안함을 느끼자 잽싸게 회사 자산을 정리해서 구조조정을 해버렸다.
황당한 일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오성 전자의 안 회장이 갑자기 전화를 해온 것이었다.
[최 회장, 정말 너무합니다. 돈 없다고 그렇게 우는소리하시는 분이 어떻게 1,200억을 용돈처럼 씁니까? 이번 데이콤 일은 제가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무슨 일인지 몰라서 변명을 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이 일을 확인해 보기도 전에 정부 압박이 더 강력해지자 어쩔 수 없이 아는 인맥을 통해서 많은 이를 만났다.
다행히 그들도 뒤늦게 오해를 풀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차입금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늘 자기 터전만 집중하던 옛 친구가 갑자기 찾아온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싫어하던 등산길까지 찾아온 건가?”
“정말 모르는 건가?”
“안 회장도 갑자기 전화 걸어서 그러던데, 그 답답한 소리 하지 좀 마.”
“뭐 특별한 일이 아닐 수도 있어. 내 자식 문제일 뿐이니까.”
“자식? 공사 구분을 위해서 KM 그룹 쪽에는 자네 아이들 넣지 않기로 했지 않아?”
“아, 걔들 말고, 현우 말이야.”
“그 돼지?”
“어, 그놈.”
지그시 KM 전자에 대한 것을 떠올리다가 곧 눈살을 찌푸렸다.
“가만, 현우라면, 설마 KM 전자에 있는 그 김현우 말하는 거야?”
“그래. 미안해. 나도 아니까. 그런 눈으로 그만 쳐다 봐. 그렇게 가버린 그놈 엄마 생각해서 나도 돕고 싶었을 뿐이야. 민혁이도 마찬가지잖아.”
“그렇지만 들리는 소리가 안 좋아.”
“그래서 나도 양보를 많이 했잖아. 지금처럼 은행이 압박받는 상황에서도 KM 그룹이 멀쩡한 것도 내 덕분인 거 몰라?”
“고맙지.”
최용욱 회장은 새삼 동네 친구 최두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동향 친구로, 서울에 와서 지금까지 같이 성장했다.
그가 등을 맡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인 중에 한 사람이었다. 모진 풍파에도 KM 그룹이 끄떡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흔히 두 사람 사이는 단순한 경영자와 전주로 외부에 알려졌지만 동반자 그 이상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최두진 역시 옛 친구가 건강한 것에 안도하면서 김현우에게 들은 이야기를 적당히 돌려서 다 말해 주었다.
“민혁이가 훈열이 구속 배후고, 현우를 지금 회사에서 내쫓으려고 한다고? 지금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 하는 거야?”
“나도 안 믿어. 하지만 그놈이 그렇게 맞아서 퉁퉁 부은 동네 개처럼 와서 징징 우는 것을 봤으니까. 마냥 과장이라고 하기는 힘들었어.”
“흠.”
최용욱 회장은 장승일 실장을 찾아보았는데, 늘 옆에만 있던 그는 최민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경호원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 가 있었다.
조용히 손짓하자 어색한 장승일 실장이 다가와서 시선을 피했다.
“장 실장,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까랑까랑한 목소리 덕분에 이미 상황을 들은 장승일 실장은 난감했다. 솔직히 그 자신도 심증만 있지 물증은 없었다. 그리고 아예 최민혁에 대한 것은 조사도 하지 않았다.
“그게…….”
“장 실장!”
“하아, 그게… 몇 번 보고를 할까 하다가 결국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최 실장님을 의심할 수는 없었습니다.”
크게 놀란 최용욱 회장은 눈을 끔뻑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면 저놈 말이 사실이란 소리야?”
“증거가 없습니다.”
“아니, 난 지금 자네 생각을 묻는 거야. 정말 둘째 그놈 구속 사건을 민혁이가 만든 거야?”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가자미눈을 한 채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장승일 실장을 째려봤다. 장승일 실장이 늘 하는 이야기 중에 최훈열 전무와 김현우 상무에 대해서 우려하는 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후계 구도 문제인 만큼 장승일 실장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는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좋아. 그럼 현우를 내쫓으려고 하는 것은 사실이야?”
“…아마 그럴 겁니다.”
“허허.”
영문을 알 수가 없는 최용욱 회장은 불가사의한 물건을 본 사람처럼 허탈하게 웃다가 괴이한 표정을 한 최두진 사장을 쳐다보았다.
“자네가 원하는 건 뭔가?”
“그게…….”
“아, 대충 알겠어. 하지만 이미 그 돼지가 저지른 사고는 이미 간과하기 힘든 수준이야. 이제까지 지켜만 본 것도 자네 때문이었어.”
“그런가?”
“그놈 때문에 KM 전자의 손실이 얼마나 큰지 알아? 조직도 엉망이야. 이리저리 안 낀 곳이 없을 정도였어!”
“…그렇겠지.”
“이 정도 했으면 이제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나?”
“섭섭하네.”
“그건 그놈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자네 책임도 커.”
“어떻게 안 될까?”
“이런 말하기는 그렇지만 나도 정확한 내막을 잘 몰라. 이제부터 알아보기는 하겠지만 설사 민혁이가 그랬다고 해도 내가 어찌할 일이 아니야.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야. 자네는 KM 그룹 대주주야. 회사 손실이 커지면 자네 재산 손실이 늘어나는 거야!”
“…알겠네.”
최용욱 회장은 최두진 사장이 떠나자 힐끗 장승일 실장을 다시 쳐다봤다.
“장 실장, 민혁이 그 녀석에 대해서 아는 것만 다시 말해 봐. 하나도 빠짐없이.”
“그게…….”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하나씩 살을 붙여갔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최용욱 회장 입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처음에는 크게 당황한 그도 KM 전자 내부에서 일어난 일을 하나씩 떠올리다가 결국 깊은 상념에 빠지고 말았다. 그가 걱정한 것보다는 일이 생각보다 아주 잘 풀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전에 들은 이야기를 조목조목 고민해 보고서야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수도 없다는 걸 알았다.
그의 심사는 시간이 갈수록 구름처럼 소용돌이치면서 복잡해지기만 했다.
문득 자식이나 손자나 어차피 자기 핏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최민혁이 어떻게 둘째를 그렇게 망가뜨렸는지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지만,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훈열이 그놈은 당해도 싸니까.’
그는 잔뜩 긴장한 채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장승일 실장의 모습에 피식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잘했어.”
“…네?”
“어차피 훈열이 놈은 문제가 많았어. 차라리 민혁이에게 박살이 났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아. 뜨거운 맛을 봤을 테니, 앞으로는 자중하겠지. 설사 실형을 받아도 결국 대법원까지 가면 형량은 줄어들어. 그때 가서 적당히 챙겨주면 되니까. 하지만 민혁이 그놈 능력을 다시 봤어.”
“그 부분은 기조실에서 따로 체크하고 있습니다. 확인이 끝나면 바로 보고하겠습니다.”
“기대하지.”
그는 새삼 장승일 실장이 이번 일을 잘 처리했다고 생각했다. 최민혁과 최훈열의 갈등은 자신이 안다고 해서 잘 처리할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약일 수도 있어.’
“장 실장은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고 판단한 장승일 실장은 냉큼 자기 의견을 말했다.
“어차피 회장님이 원한 것은 경영을 제대로 하는 후계자를 원하신 겁니다. 최민혁 실장님이 한 일은 결과적으로 그런 후계자에 부합됩니다. 제가 최민혁 실장님을 따로 만나서 회장님이 계속 찾는다고 말했지만 스스로 매듭짓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최 실장님을 지켜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어차피 급한 사람이 먼저 나서게 마련입니다.”
“그런가. 그러면 기조실에서 최근 다시 살펴보고 있다는 경영 기획안도 다 민혁이 그놈하고 관련이 있어?”
“네.”
“놀랍군.”
* * *
최두진은 최용욱 회장과 만난 후에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KM 그룹 내의 인맥을 통해서 얻은 정보로 김현우 상무가 한 짓을 알게 될수록 참담했다.
다른 이유라면 KM 산업만 해도 국내 반도체 수출이 급증하면서 그 수익성이 대폭 개선되었다.
비록 최훈열 전무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문제가 많았지만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KM 산업은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KM 산업 지분도 적지 않게 가지고 있는 최두진 사장은 마냥 최용욱 회장을 무시할 상황이 아니었다.
KM 전자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자신의 비서이자 민기식 고문 변호사 역시 큰 우려를 드러냈다.
“…지금까지 보고 드린 것처럼 KM 전자 사정이 좋지 않은 부분에는 김현우 상무님이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특히 이사회에도 악영향을 준 덕분에 내부적으로 말이 많습니다.”
횡령 문제는 그저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욕심이 많은 김현우는 최훈열 전무와 같이 비자금 조성에 큰 역할을 했다. 만약 최훈열 전무가 김현우 상무마저 걸고 넘어졌다면 당장 구속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훈열 전무는 자기 죄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김현우 상무를 걸고 넘어가지 않았다.
“중앙지검 분위기도 심상치 않고, 국세청 차장에게서 몇 번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게 모두 KM 전자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