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특히 문형섭 부사장 역시 STB 사업의 한계에 대해서 잘 알았기에 최민혁의 합리적인 의견을 무조건 뭉갤 수는 없었다.
“자네 설마 STB과 위성 사업을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자는 건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는 3년 후면 우리 앞에 옵니다. 차라리 미래를 보려면, 디지털 시대를 노리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으음.”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면서 안색을 굳히고 말았다.
그들 역시 김현우 상무나 이일태 이사가 아니었다면 이 문제를 보다 진지하게 다루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배후의 최두진 사장이 김현우 상무의 의견에 손을 들었기 때문에 간섭하기 쉽지 않았다.
문형섭 부사장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최 실장, 자네 의견은 잘 알았어. 하지만 이 일은 단순하게 결정할 일이 아니네.”
“대주주인 최두진 사장이 문제겠죠?”
“그게…….”
“만약 최두진 사장만 배제된다면 상관이 없다는 말이겠죠?”
이제까지 순순히 듣기만 하던 오영근 사장 표정이 확 달라졌다.
“최 실장, 일전에도 말했지만 그게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냐. 자네는 아직 KM 그룹 역사를 잘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최두진 사장님과 회장님은 가족 이상의 관계로 자네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냐. 자칫하면 자네 후계자 자격까지 박탈당할 수도 있어!”
“압니다.”
정확히는 그가 오영근 사장보다 더 자세히 알았다. 굳이 지금까지 복잡하게 김현우 상무를 처리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KM 그룹은 무역업을 시작으로 자전거 부품을 만들면서 커나갔다. 그리고 주식회사로 개편한 후에 국내 최초로 반도체 사업에 착수했다.
바로 KM 산업의 출발이었고, 심지어 미국에도 현지 법인을 설립했다.
일본과 합작해서 한국 최초로 컬러 TV로 만들었고, 이어서 KM 건설, KM 전지, KM 시계를 설립하면서 그룹 체제를 갖추었다.
국내 50대 재벌을 꼽는다면 늘 빠지지 않는 기업이었고, 차입금을 바탕으로 체질을 개선한다면 30대 재벌로 발돋움할 생각마저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자금줄 역할을 해준 사람이 바로 최두진 사장이다. 그는 덕분에 KM 전자를 비롯한 각 계열사 지분을 상당히 확보했다.
단순한 대주주를 넘어서 최용욱 회장과는 파트너 관계였다.
놀라운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최두진 사장은 경영권에 대해 단 한 번도 욕심을 내지 않았다.
있다고 한다면 서자인 김현우 상무가 유일했다.
그 역시 최용욱 회장과 비슷하게 자기 핏줄에 대해서는 단호하지 못했다.
만약 김현우 상무를 강제로 내쫓아 버리면 그건 최두진 사장을 무시한 것이나 진배없다.
최용욱 회장의 창업 공신으로 묵묵히 KM 그룹의 토대를 이룩했던 오영근 사장은 최민혁을 위해서라도 자세하게 최두진 사장의 역할을 말해주었다.
“특히 TV 사업에 대한 회장님의 애정은 남다르네. 아무리 회사가 어렵다고 해도 TV 사업부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렇겠죠.”
새삼 오영근 사장을 통해서 KM 전자에 대한 최용훅 회장 상황을 이해한 최민혁도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지금처럼 차분하게 일을 진행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현우 상무가 자발적으로 물러나고, 최두진 사장이 이 문제 때문에 웃으면서 지분을 포기했을 때도 STB 사업부 매각을 반대하실 겁니까?”
“그건 어려울 거네.”
아직 이사회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한 채 설득했다.
“그건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겁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두 분의 답변입니다. 최두진 사장이 빠진다면 두 분도 이 기획안에 찬성하시죠?”
“그렇다면 반대할 이유는 없지. 하지만 자네는 지금 너무 무리하게…….”
“그 답변이면 됩니다. 다음은 두 분이 이미 지적한 것처럼 말보다 결과로 보여 드리죠.”
“…….”
두 사람은 선전포고만 남기고 떠난 최민혁의 모습을 보면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렇게 설득해도 안 먹힐 거라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도대체 어쩌려고 저러는 걸까? 최두진 사장이 분노하면 후계자리도 위험할 수 있을 텐데…….’
* * *
날씨가 선선해지면서 아침 조깅하기에 좋았다. 흐르는 한강을 따라서 예쁘게 피어오른 꽃이 만발했다. 운동하는 이들은 드문드문 지나가면서도 운동에 빠져서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다.
최민혁은 가볍게 뛰면서도 박두영 부장검사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부터 할까 고민했다.
‘뇌물을 좀 줄까?’
다행히 가벼운 체육복을 입은 채 나타난 박두영 부장검사는 그런 소소한 점보다는 한 가지 질문부터 먼저 했다.
“하농 인수 관련 건에 혹시 최 실장님이 관여한 겁니까?”
“네?”
오성 전자가 하농 관련 핵심 인사를 확보하면서 DL 그룹은 뒤집어졌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와 관련된 뉴스는 단 하루만 나오고 나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 데이콤 소재 때문에 잠깐 반등한 코스피는 다시 추락을 거듭했다.
오성 전자 계열사나 관계사가 데이콤 지분을 대량으로 인수해서 뜨거운 감자가 되나 싶었지만 불과 일주일을 채 넘기지 않았다.
우영민 과장이 뿌린 지라시도 문제였지만 오성 전자 역시 우영민 지라시를 이용해서 의도적으로 더 부추긴 것이다.
결국 데이콤 주가는 최민혁이 아는 주가 흐름을 따라서 계속 하락해서 15만 원까지 폭락하고 말았다.
[오성 계열사가 DL 전자가 보유한 데이콤 지분 21만 주를 매입하다!]
이것은 데이콤 지분 쟁탈전이 일어날 때 다 예상한 일이라서 크게 놀라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하농 스캔들 관련 조사를 담당한 박두영 부장검사의 상황은 달랐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수사하라고 했다가, 갑자기 덮으라고 하니까요.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최 실장님이 데이콤 지분 21만 주를 DL 전자에 팔아서 재미 봤다는 기사도 있던데요?”
“그거야 운 좋게 구한 주식을 비싸게 팔아치운 거죠. 그게 도대체 하농 스캔들이랑 무슨 관계란 건지 모르겠습니다.”
의뭉을 떨었지만 뒤늦게 박두영 부장검사가 말한 정보를 토대로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한 최민혁은 혀를 내둘렀다.
“아니, 그런데 멍청한 DL 전자는 왜 15만 원에 팔아치웠을까요? 손해가 엄청났을 텐데, 정말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최 실장님이 더 잘 알겠죠.”
“허, 참, 정말 왜 이상한 말씀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까.”
서로 시선을 가볍게 주고받은 후에는 나란히 뛰면서도 남인 양 행세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제법 있었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두 사람을 노려서 사진을 찍거나 하는 이는 당연히 없었다.
최민혁은 출발을 하고 나서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김현우 상무를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 좀 해주세요.”
“설마 이번에는 김 상무를 노리는 겁니까?”
“그런 척하려고요.”
“……?”
달리던 박두영 부장검사는 갑작스러운 말에 넘어질 뻔했다.
최민혁은 가볍게 웃으면 말해주었다.
“회사 내부 사정이니, 그렇게만 알아주세요. 그리고 이 일을 가볍게 건드려 두는 것이 박 부장검사님에게도 좋을 겁니다. 찔리는 이들이 앗 뜨거워 할 때 적당히 고개를 숙일 기회니까요.”
“비자금을 조사하는 척하면서 덮으라는 말입니까?”
“그건 나중에 문제가 될 겁니다. 하지만 조사하는 척만 하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그 증거를 가진 직원 한 사람은 조용히 미국으로 떠나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요. 물론 국세청이 긁어서 부스럼을 내겠다면 그 자료를 다 오픈할 생각도 있습니다.”
“하.”
기가 찬 대답에 박두영 부장검사는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말았다.
최민혁은 오히려 속도를 올려서 박두영 부장검사를 뛰게 하였다.
“별일 아닙니다. 그저 최훈열 전무 구속 마무리 작업이니까. 뒤처리를 깔끔하게 해둬야 나중에 문제 소지가 없을 겁니다.”
“…진짜 대단하십니다.”
“칭찬으로 듣죠. 그리고 이건 제보 자료입니다. 특히 불륜 자료는 김현우 상무를 흔들 수 있는 유용한 자료입니다.”
“…….”
그는 새삼 용의주도한 최민혁의 행동에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 *
최훈열의 구속 이후에 KM 전자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물론 자기 일을 하는 직원들은 예외지만, 불법에 알게 모르게 연루된 사람들이 문제였다.
수십 명이 구속되면서 그들 속은 타들어갔다.
그들 중에 대표적인 이가 바로 김현우 상무였는데, 6년 전에 자신이 한 일까지 전부 일일이 다 들춰보면서 증거를 없앴다.
그런 그가 갑자기 검찰 참고인 소환을 당했으니,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나.
그 자리에서 충격을 받은 김현우 상무는 결국 유명한 로펌 변호사를 불러서 검찰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특히 횡령과 관련해서 불륜 증거마저 나온 것을 본 김현우 상무는 그 자리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내용 중에는 비자금에 관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이것도 그에게는 살 떨리는 일이었다.
혹시라도 참고인 조사 중에 피의자로 전환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지만,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혹시 최두진 사장이 이번 일에 연루된 것은 아니겠죠?”
“……!”
최두진 사장 이야기가 나오자 그다음 세무조사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았다.
‘최 실장이 결국 노리는 것은 우리 아버지였다는 소리잖아?’
지금까지 왜 최민혁이 얼마든지 최훈열 전무처럼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라 질질 상황을 끌면서 자신을 한쪽으로 몰아간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알았다.
만약 자신의 아버지마저 이 일에 엮이면 자신은 끝장이었다.
새삼 최민혁 얼굴을 떠올리면서 몸서리를 쳤다.
‘비, 빌어먹을.’
* * *
김현우 상무는 땀에 푹 절어서는 중앙지검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최두진 사장을 직접 찾아가 이 사정을 다 말했다.
늘 자신을 대할 때면 미안해하던 최두진 사장의 얼굴은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아, 아버지, 죄, 죄송합니다.”
“닥쳐, 그 이야기는 입 밖에 꺼내지 말라고 했지!”
“네.”
그랬다.
최두진 사장은 지난 일에 대한 사죄로 KM 전자 임원으로 갈 수 있도록 김현우 상무에 압력을 행사한 것이었다.
하지만 김현우 상무의 무능함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최두진 사장도 이제는 최용욱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진짜 대대적인 사고를 쳤다.
자신은 사채업자인 이상 합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다. 만약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는다면 좋을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비자금 폭로 당사자가 된다면 권력의 화살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그로서는 도저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현우야, 나도 지금까지 많이 참았다. 네 어머니에게 했던 죄책감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널 도왔어.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으냐?”
감정이 전혀 없는 최두진 사장 태도에 김현우 상무는 이를 악물었다.
“누가 배후에 있는지 압니다.”
“무슨 소리야?”
“최훈열 전무 일도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제가 당해보고서야 이제 확신했습니다. 이 일을 뒤에서 조작한 이가 있습니다.”
“이놈아, 훈열이 문제를 여기서 왜 끄집어내? 아니,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다는 거야?”
“최민혁 실장입니다.”
“허허허, 이놈이 완전히 미쳤구나.”
대학교 1학년인 최민혁이 최훈열을 끌어내렸다는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대상은 최두진 사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김현우 상무는 지금까지 최민혁 실장을 상대하면서 경험한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다 설명했다.
“…이게 다 운이라는 말입니까. 왜 중앙지검에서 갑자기 절 불러서 아버지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거 역시 다 최민혁 실장의 노림수입니다.”
“아니, 민혁이가 도대체 뭘 노린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아버지의 KM 전자 지분요.”
“뭐? 이 미친놈이…….”
박두진 사장도 뒤늦게야 김현우 상무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곰곰이 생각했다.
‘확실히 최훈열 전무 구속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민혁이니까.’
실제로 지난주에 최용욱 회장과의 산행에서 그가 최민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을 봤다. 최훈열 전무가 구속된 마당에 KM 전자 지분 상속 대상자로 이제 최민혁만 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제 고작 20살에 불과한 녀석이 그런 음모를 꾸몄다고? 그리고 현우 이 녀석을 이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공포와 두려움에 질려서 몸을 떨고 있는 김현우 상무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당장 정신병원에 입원해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 용욱이 이 녀석을 만나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