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그는 물러나지 않는 최민혁의 저돌적인 행동에 다시 꼬리를 말았다.
“이, 이보게, 내가 지금 그런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미, 미안하네.”
허리마저 숙인 김현우 상무의 모습은 자존심까지 내 던진 것이었다.
딱 최민혁 자신이 원한 그림.
하지만 애초에 김현우 상무를 이용해서 최두진 사장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고 한 최민혁은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오히려 분개했다.
“지금 저랑 말장난하시는 겁니까!”
“내가 잘못했어.”
“그따위 정신으로 앞으로 뭘 하겠다는 겁니까? 도대체 대학은 나왔습니까? 다섯 살 애도 당신보다는 더 능력이 낫겠습니다.”
“…….”
“정 그렇게 자신이 없으면 집에 가서 애나 보는 게 맞지 않습니까? 왜 자꾸 일 잘하는 사람을 방해까지 하는 겁니까?”
김현우 상무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이미 최민혁이 작정했다는 것을 새삼 깨닫자 몸을 낮추었다. 자칫 자신의 죄가 최두진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최민혁이 지금까지 벌인 일도 모두 다 자신만이 아니라 최두진 사장을 염두에 두었던 거라는 사실을 뒤늦게 확신했던 것이다.
“최, 최 실장, 내가 잘못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면 김 상무님은 괜히 죄도 없는 직원을 상대로 사과하고 끝냈습니까? 아주 작정하고 괴롭히던데, 아직 제 말뜻을 모릅니까?”
자발적으로 물러나 달라는 최민혁의 함축적인 말에 김현우 상무는 분노보다는 두려움을 더 크게 느끼고 말았다.
‘아버지 때문이었구나.’
결국 최민혁의 괴롭힘에 견디지 못한 김현우 상무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실장실을 도망치듯 나갔다.
옆에서 대리만족을 충분히 만끽한 오혜정 비서는 은근한 미소를 한 채 녹차를 내놓으면서 최민혁을 쳐다보다가 종종걸음으로 실장실을 나갔다.
최민혁은 혹시나 김현우 상무에게서 뭐 더 떨어지는 것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더 뜯어먹을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자, 진지하게 저 돼지머리를 날려 버릴 계획에 착수했다.
“조 팀장님을 호출 좀 해주세요.”
* * *
“STB 사업 말입니까? 확실히 문제가 많은 사업이기는 합니다만.”
이미 최민혁이 김현우 상무를 노골적으로 조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귀가 따갑도록 전해 들은 조성돈 팀장은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최민혁은 대수롭지 않은 듯 툴툴거렸다.
“무슨 문제죠?”
“STB는 지상파, 케이블, 위성방송 신호를 수신해서 TV 등으로 시청할 수 있도록 하는 신호 변환 장치입니다. 결국, 방송 콘텐츠를 수신하는 것이 관건인데, 방송 사업자가 문제입니다.”
“아무래도 그쪽은 진입 장벽이 높겠죠?”
“대규모 거래를 동반해서 우리로서는 좋기는 한데, 그 이해관계가 방송사라서 간단하지 않습니다. 로비도 로비인데, 과연 잘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같은 기업에 대한 방송사 시선이 문제군요.”
기획 팀은 이미 STB 사업에 대해서 몇 년 전에 논의할 때 다 검토했고, 걱정스러운 점이 있었지만, 회사 미래를 위해서 그 위험을 감수했다.
조성돈 팀장은 갑자기 이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의아했지만, 이미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특히 최훈열 전무 스캔들이 터지면서 정부 관계자의 시선이 냉담한데, 방송사 관계자 시선도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STB 선행개발 팀에서 최근 방송사 실무진과 미팅하면서 이 문제가 나와서 내부적으로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 기획 팀도 그들 도움 요청을 받았지만, 그저 지켜보는 중입니다.”
방송국은 정부 입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특히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은 정부 측 인사인 터라 정부에게 불똥을 튀긴 최훈열 전무가 있는 KM 그룹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최민혁도 이 이야기에 최훈열 전무 이슈가 나오자 허탈하게 웃었고,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조 팀장님 생각은 어때요?”
“저야 뭐…….”
“그러면 STB와 위성 사업에 대한 기획안을 한번 올려보세요. 작년과 경영 환경이 달라졌으니, 그것을 반영했으면 합니다.”
하지만 최민혁은 단순한 지시가 아니라 여기에 꼬리를 더해서 STB 사업 미래에 대해서 개념적인 내용만 언급했다.
특히 단순 수신 기능만 있는 아날로그 STB의 미래는 큰 의미가 없고, 향후 디지털 STB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날로그 STB은 시장도 협소하고, 미래가 없는 사업이라는 점을 특히 피력해서 몇 번이나 강조했다.
이미 TV 사업부도 정리하자고 의견을 내세우는 마당에 STB 사업도 같이 도려내자는 최민혁의 의견에 조성돈 팀장도 이제는 체념했다.
“진심이군요.”
“제가 지금 농담하는 것으로 보입니까?”
다만 이제까지 김현우 상무를 쥐 잡듯이 괴롭힌 최민혁 행동을 이해했다.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너무 부담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이건 그룹 기조실과도 협의해야 합니다. TV 사업에 큰 애착을 둔 회장님 허락도 구해야 해서 서두를 일이 아닙니다.”
최민혁은 퉁명스럽게 조성돈 팀장을 구박했다.
“이미 X 리포트에서도 언급한 부분이지 않습니까. 새삼스럽게 이야기하시는 겁니까?”
“그건 보고서입니다. X 리포트의 목적은 TV 사업부를 정리하는 것인데, 설마 STB 사업부까지 그 대상에 넣을지는 몰랐습니다.”
이미 충분히 챙길 것을 다 챙겼고, 인재에 대한 선택안만 남았기에 이제 굳이 자신의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저도 김 상무가 사업을 이따위로 해놓았을지 몰랐으니까요. 이제는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그러니 STB 사업 매각에 대한 기획안을 올리세요.”
“네…….”
하지만 최민혁은 굳이 STB 연구소 내의 핵심 인력은 그대로 가져갈 것이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남는다면 그 임직원은 앞으로 계속 같이 갈 가치가 있지.’
* * *
최민혁도 처음에는 새로운 회사를 차리고, 미래 신기술을 이용하면 잘될 것이라는 장밋빛 기대를 했지만 요즘 와서는 그 생각을 깔끔하게 접었다.
바로 사람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은 환경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월급을 많이 준다고 해서 고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TV 사업부 선행개발 팀이 보여준 결과가 바로 그것이었다.
최민혁은 자신이 아는 미래를 바꾼 이들의 열정과 신념을 보면서 새삼 사람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가 굳이 STB 사업부를 단순하게 매각하는 것보다 그 인적 구성원을 포함해서 기술을 살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이 STB 사업부 매각을 이용해서 얻을 것이 많았다.
그런데 외부인이 보면 이런 최민혁의 행동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아마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경험해 보지 않은 기획 팀이라면 최훈열 전무에게 했던 것처럼 지시를 따르지 않은 채 질질 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최민혁 실장의 손발이 된 기획 팀은 갑작스러운 지시에도 차분하게 따랐다.
그나마 눈치가 빠른 박상기 팀장이 한마디 했다.
“아무래도 우리 실장님이 본격적으로 칼을 빼 든 것 같습니다.”
그러자 끼기 좋아하는 배종대 과장이 소리쳤다.
“이제 그럴 때도 되었죠.”
둘의 대화에 이쪽저쪽 소식을 잘 듣는 박광민 사원이 넌지시 이야기했다.
“비서실에서 도는 이야기로 며칠 전에 김현우 상무가 실장님이랑 만나서 한바탕 했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설마 그것 때문일까요?”
배종대 과장도 혀를 내둘렀다.
“이야, 우리 실장님 진짜 단호하시다. 설마 김현우 상무를 면전에서 그대로 까버린 거야. 그 장면을 한번 봤으면 좋겠다.”
박광민 사원은 비서실에서 들은 최민혁의 김현우 상무 괴롭힘에 대한 것을 과장까지 넣어서 늘어놓았다.
기획 팀 분위기는 이제 나쁘지 않았다.
이미 최민혁에게 가이드라인을 받은 조성돈 팀장이 나서서 기획안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이 결코 좋을 리가 없었다.
보고서를 보면서 수정하던 기획 팀조차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기획안을 살폈다.
특히 박상기 차장은 이제 STB 사업부 매각이 화두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이대로 기획안을 올릴 생각입니까?”
조성돈 팀장은 이미 TV 사업부 매각이라는 화제를 계속 염두에 둔 터라 오히려 무덤덤했다.
“STB 사업부는 VCR를 빼면, 아직 회사에서 직접적인 매출이 나오지 않습니다. 있다고 한다면 기존에 들어간 연구비 정도겠죠.”
“그게 모두 100억이 넘는데, 이대로 그냥 다 포기하자는 말씀입니까? 지금 매각하면 공장 부지를 포함해서 고작 50억 안팎입니다. 거기에 연구소 인력은 어떻게 합니까?”
“…설마 실장님이 그런 결정을 내리겠습니까. 건질 것은 건지려고 하겠죠. 그리고 아직 오 사장님이 STB 사업 매각을 결정 안 했습니다. 그룹 기조실의 승인을 받아야 할 일인데, 그게 쉽게 되겠습니까?”
“그렇겠죠?”
하지만 정성근 대리가 이 대화에 소금을 뿌렸다.
“저도 장 실장님이 몇 번 실장님을 찾은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장 실장님 얼굴이 평소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이미 기조실에서도 STB 사업부 구조조정에 대해 검토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
다들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너무 논리적이라서 반박하기도 쉽지 않았다.
장승일 실장이 최민혁을 만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지만 이들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최민혁 실장의 말 때문에 기조실 내부에서 계열사 사업 방향을 재검토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를 느낀 정성근 대리는 계속해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배종대 과장이 정성근 대리의 손을 잡았다.
“정 대리, 제발 그런 이야기 좀 하지 말자. 다들 불안해하잖아.”
“네? 전 의견을 내놓았을 뿐입니다.”
“그래, 우리 정 대리 똑똑한 것은 알아. 그래도 그냥 모르고 싶은 진실도 있는 법이잖아. 넌 매사에 모든 일을 그렇게 다 끄집어내냐?”
“이해가 안 됩니다.”
“이해하지 마!”
하지만 박상기 차장은 배종대 과장을 말렸다.
“정 대리 의견도 일리가 있어.”
다행히 회의 분위기는 다시 좋게 바뀌었다.
하지만 다들 서로 합리화하면서도 불안한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 역시 회사 내에서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느꼈기 때문이다.
‘거기 올해 들어와서 새로 뽑은 사람도 20명이 넘는데, 정말 STB 사업부를 매각할까?’
* * *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만족스러운 매각안을 내놓았다. 특히 연구 인력 구조조정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껄끄러운 부분을 잘 정리한 기획안을 들고 바로 사장실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오영근 사장은 오늘도 문형섭 부사장이랑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간단한 안부와 더불어서 지난 와이드 TV 콘텐츠 문제로 넌지시 이야기를 시작해서 두 사람의 공감대를 만든 후에 보고서를 내밀었다.
두 사람은 각자 STB 사업 매각에 대한 안건을 살피면서 와락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최민혁은 그들이 반론하기도 전에 STB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STB 사업 역시 이 콘텐츠 문제를 간과할 수 없습니다.”
“최 실장,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
“STB이 유럽 시장을 중심으로 급격히 확대될 것이라 예상해서 투자한 것으로 압니다.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영근 사장도 이 문제만큼은 무조건 듣고 있지만은 않았다.
“STB 시장은 우리 회사가 나아갈 미래 중의 하나로 이미 결정 났어.”
“그 미래가 과연 가능성이 있을까요?”
“……?”
두 사람은 눈살을 찌푸린 채 최민혁을 힐끗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전체 시장 75%를 차지하는 폐쇄형 시장과 25%에 해당하는 개방형 시장을 간단하게 언급하면서 그 위험을 지적했다.
“해킹 문제 때문에 개방형 시장은 점점 축소될 것이고, 대세는 폐쇄형 시장이 차지할 겁니다. 주요 방송사와 고정적인 거래선이 필요해서 진입 장벽이 높습니다. 더욱이 이들 방송사업자는 현재 아날로그 STB이 우선인데, 단순 수신 기능 외에는 불가능합니다. 날씨와 잡지 같은 다양한 콘텐츠 시장은 머나먼 이야기입니다.”
이제 아날로그 STB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는 시점에서 최민혁의 의견은 두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