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3주, 아니 2주면 될 거다.”
“네? 무슨 그런 농담을…….”
하지만 그는 이동호 교수가 꿍쳐놓은 연구 과제를 쓱 살피다가 뒤늦게 힐끗 그를 다시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두 연구 과제는 가는 방향이 비슷했다.
황당한 것은 최민혁의 단순한 아이디어가 이동호 교수의 연구 팀 실적보다 더 낫다는 점이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내가 묻고 싶은 이야기다. 아마 지금쯤 칼텍에 있는 리차드 박사가 이걸 보면 기함할 거다. 지난 MPEG 위원회 모임에서 얼마나 잘난 척을 했는데, 근데 그 연구 결과보다 더 나은 것 같으니까.”
비디오 분야 쪽에 맛만 본 임기석 부장은 그제야 안색을 굳히고 말았다.
“뭔가 좀 이상하네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혹시 그 최 실장이란 인간이 오성 전자처럼 다른 연구 팀의 과제를 가로챈 것은 아니겠지?”
“그건 말이 더 안 되죠. 교수님도 모르고, 그 리차드 박사란 분의 연구 실적보다 나은 결과를 누가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확실히 이상하네.”
두 사람은 의견일치를 보고서야 이 논문 원안에 대해서 의구심을 드러냈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이 연구 결과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연구 의뢰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이동호 교수는 최민혁이 줬다는 연구 원안을 살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최민혁 실장이란 친구가 무슨 아인슈타인이라도 된다는 소리인가? 도대체 이런 아이디어를 어떻게 얻은 것일까?”
* * *
최민혁은 임기석 부장이 자신의 과제를 받아서 진척시킨 성과를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별다른 특이점을 찾지 못했다.
시행착오의 하나로 배운 가짜 특허 원저작권자에 대해서 잘 모르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일정이 고작 2주라니. 설마 이동호 교수가 이 가짜 특허에 관여한 적이 있는 것일까? 뭐 지금은 그럴듯해도 결국 나중에 표준화에 밀려서 단순한 특허 의미에 불과하잖아.’
김현우 상무에게는 그 어떤 정보를 주지 않은 점도 높이 평가했다.
흥미로운 것은 STB 연구 팀에게도 비밀리에 일 처리 한 점이다.
첫인상 자체가 워낙에 순둥이 같아서 실수라도 할까 싶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나보다 더 일 처리가 확실하네. 하긴 그쪽 분야 사람이 특허에 민감할 수밖에 없지. 이동호 교수가 이 특허에 관여했는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지만 뭐, 지켜봐야지.’
어차피 표준화와는 거리가 먼 가짜 논문이라서 최민혁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일단 임기석 부장에게 합격점을 줬다.
그리고 신형 TV 양산과 관련해서도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부자 정보 때문에 아예 TV 연구소와 담쌓고 있던 최민혁은 김명준 과장에게서 양산 시에 생기는 신뢰성 문제를 듣고 나서는 굳이 김현우 상무를 제거하는 일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아예 처음 짠 계획을 다 없애고 새롭게 만들었는데, 그 첫 단추로 다시 박경진 재무 팀장을 즉시 호출했다.
“박 팀장 재판은 이미 무혐의로 결론 난 것이나 마찬가지 같습니다. 요즘 생활은 어때요?”
“늘 실장님에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최민혁 역시 박경진 재무 팀장 덕분에 일을 쉽게 풀어갈 수 있어서 만족했다.
“저도 박경진 팀장님을 조사해 보니, 그렇게 큰 불법을 저지른 것은 아니더군요. 대부분이 최훈열 전무의 외압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고요. 솔직히 신고한다고 해도 거꾸로 박 팀장님을 감옥에 넣고도 남는 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지난 고뇌를 알아주는 최민혁의 말에 새삼 가슴이 찡해진 박경진 팀장은 고개를 숙였다.
“제가 조금만 더 정신을 차렸다면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있습니다.”
“잘되었네요. 그러면 후회가 없도록 마무리를 좀 해주세요.”
“네?”
너무 소심해서 이미 감정이 많이 상한 박경진 팀장에게 넌지시 말했다.
“최훈열 전무의 불법 자료도 따로 다시 검토하고, 거기에 김현우 상무가 저지른 범죄 역시 추가로 검토해서 보고하세요.”
그도 이미 짐작했지만, 김현우 상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깜짝 놀랐다.
“서, 설마…….”
“뭘 그렇게 놀랍니까. 범죄를 저질렀다면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아, 아닙니다.”
“이왕이면 비자금 관련된 자료도 추가해서 빈틈이 없도록 하세요. 특히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나왔을 때를 고려하면 됩니다.”
* * *
박경진 재무 팀장은 아이러니하게 최민혁이 중간에 손을 써놔서 아직 회사에서 잘리지 않았다. 그는 덕분에 최민혁 지시를 받아 재무 팀으로 가서 기존 자료를 다시 재검토했다.
재무 팀은 최민혁 실장의 지시라는 말 한마디에 다들 별다른 의문을 토로하지 않은 채 박경진 재무 팀장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미 박경진 재무 팀장은 보험으로 최훈열 전무 자료를 다 챙기면서 같이 따로 모아둔 김현우 상무 자료도 철저하게 정리해서 최민혁에게 보고했다.
이 자료를 받은 최민혁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게… 죄송합니다.”
그가 특히 추가로 받은 비자금 자료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솔직히 박경진 재무 팀장 능력이 대단한 것은 아니까. 이렇게 철저하게 비자금 관련 분식회계 증거를 가져올지는 몰랐습니다.”
이미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조차 비자금 관련 내용에 대해서는 질문조차 받지 않았던 박경진 재무 팀장은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그 비자금 자료는 공개하면 문제가 될 텐데, 괜찮겠습니까?”
그는 최훈열 전무, 김현우 상무와 철저하게 분리된 자료를 살폈다.
“이건 공개할 수는 없지만 다른 용도로 쓸 수는 있습니다.”
“설마…….”
깍지를 낀 최민혁은 병아리처럼 겁먹은 박경진 재무 팀장을 요리조리 살폈다. 처음부터 그려둔 본론에 들어갔다.
“협박용으로 쓸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자료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말인데, 제가 한 가지 제안하고 싶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최민혁은 박경진 재무 팀장이 두 상자에 가득 담아 가져온 자료 중의 하나를 흔들었다.
“이거 나중에 국세청에서 세무조사할 때 걸리면 문제가 됩니다. 뭐, 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해도 그거야 국세청에서 말하기 나름이죠.”
“…어, 어떻게 하시려고요?”
“간단합니다. 박경진 재무 팀장이 이 자료를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그는 최민혁 눈치를 보면서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전 곧 회사를 그만둘 겁니다.”
지금까지 묵묵히 박경진 재무 팀장을 지켜본 최민혁은 방긋 웃었다.
“제가 관리하는 투자 법인이 있는데, 마침 미국에도 지점이 있어요. 그 투자 법인에 가서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네?”
뜬금없는 제안에 깜짝 놀란 박경진 재무 팀장은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했다.
“이 비자금 내역이 밝혀지면 결국 박경진 재무 팀장님도 책임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증거를 가지고 미국에 가 계시란 겁니다. 이 자료가 있는 이상 최소 10년 정도는 국세청이나 검찰에서도 손을 쓰기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할까요?”
“호락호락하게 될 겁니다. 그쪽에서 태클 걸면 기자 회견을 열어서 내가 한 일이 이랬다고 말하세요. 당당하게 이 자료 들고 검찰과 국세청 찾아가면 됩니다. 나 이런 죄를 지었다고 당당하게 말하세요. 자기들이 어쩌겠습니까?”
“아…….”
박경진 재무 팀장은 최민혁의 제안이 무슨 의미인지 뒤늦게 깨달았다.
보통 이런 일이 터지면 재벌에서 흔히 하는 방식인데, 차이가 있다면 미국에 적당한 일자리를 얻는다는 점이다.
물론 저 자료가 결국에는 자기 목줄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최훈열 전무와는 달리 지금까지 봐온 최민혁 실장은 그걸로 협박할 사람은 아니었다.
최민혁은 방긋 미소 지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두 번째 기회를 잘 잡으세요.”
“…가, 감사합니다. 실장님, 크흑, 저, 정말 고맙습니다.”
무혐의로 설사 끝난다고 해도 KM 전자에서 한 일이 소문이 나 다른 회사로 이직하기는 불가능해서 앞날이 갑갑했던 박경진 팀장은 결국 감정이 복받쳐서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별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족쇄를 채워서 사람을 다루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그는 김명준 과장의 묘한 시선을 일별한 후에 피식 웃고 말았다.
‘굳이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겠어. 이 정도면 보험으로 나쁘지 않겠지. 박두영 부장검사에게도 미리 경고를 해두면 나머지는 알아서 할 거고, 이제 우리 김 상무도 더는 참기 어렵겠지?’
* * *
현재 무혐의로 거의 확정된 박경일 팀장은 KM 전자 내에서도 주의해야 할 인물인 데다가 지금은 언터처블 상태였다.
그런 인물이 요즘 회사 내에서 말이 무성하게 나오는 최민혁을 만났다. 그런데 그 이후로 박경일 팀장이 뭔가 자료를 조사했다.
정황만으로도 긴장한 이는 특히 최민혁의 술수 때문에 공포에 질린 김현우 상무였다. 최훈열 전무가 구속된 후에 박경일 팀장이 재무 팀을 압박해서 자기 자료를 들춰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피를 말리는 두려움 속에 있던 김현우 상무는 참지 못하고 대판 싸울 듯이 실장실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오혜정 비서를 보자 음욕을 참을 수가 없어서 느끼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지금은 최민혁 실장 때문에 이를 악물고 욕망을 참았다.
최민혁과 마주한 그는 일단 눈치부터 봤다.
“어, 최 실장님, 서로 얼굴을 자주 보고 해야 하는데, 최근 정신이 없었어.”
최민혁은 뱃살이 덜렁거리는 김현우 상무를 보며 인상부터 찡그렸다. 특히 실장실 안으로 들어오면서 보인 추파에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입니까?”
“우리 사이에 일이 있어야 오나. 회사 일을 하다 보면 다양한 의견을 나눌 수 있지.”
비록 최민혁 지분보다 많은 박두진 사장의 지분을 믿었지만, 정작 그를 앞에 두자 크게 긴장했다.
이미 뒤에서 수작을 부린 최민혁은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말씀해 보세요.”
“요즘 최 실장이 재무 팀장 통해서 따로 조사하는 것이 있다고 들었네.”
“요식적인 절차입니다.”
“이미 중앙지검에서 압수수색까지 끝난 일인데, 굳이 최 실장이 나서야 하나?”
“마무리해야 하니까요.”
“아니, 내 말은… 꼭 자네가 그 마무리를 할 필요가 없잖아.”
“그러면 누가 합니까? 전 혹시라도 차후 그 문제가 다시 터질 것을 염려해서 대비하는 겁니다. 국세청 특별 세무조사가 떴을 때를 대비해야 하니까요.”
‘국세청’ 이야기가 나오자 김현우 상무 안색은 창백하게 변했다.
“구, 국세청이라니, 그, 그게 무슨, 자, 잠깐만, 최, 최 실장,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건가. 굳이 끝난 일을 긁어서 부스럼을 낼 필요가 없잖아!”
“전 원칙대로 할 뿐입니다.”
“하, 진짜 답답하네.”
불안한 김현우 상무는 굳은 얼굴을 한 채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결국 명분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자 다른 쪽으로 몰고 갔다.
“이미 부사장님이 얼마 전에 말했지만, 자네는 실장이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잖아. 기존 업무에 더 집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니면 이제 겨우 자리 잡은 STB 사업부가 아니라 다른 사업부도 많잖아?”
어지간해서는 다른 사업부에 손대기 싫은 최민혁은 인상을 찡그렸다.
“VCR 경우를 봐도 그렇지만 안정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더욱이 특허를 출원했다고 하는데, 그게 당장 돈이 됩니까? 아, 안 그래도 STB이나 위성사업부 쪽은 다시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참다못한 김현우 상무 분노가 폭발했다.
“아니, 이 친구야, 도대체 자네는 하는 일도 없으면서 왜 이쪽저쪽을 막 찔러서 일하는 사람을 방해만 하려는 거야?!”
하대에 기분이 나빠진 최민혁이 바로 받아쳤다.
“저랑 상무님이랑 비록 나이 차이는 있지만, 공적인 관계입니다. 굳이 하대까지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럴 거면 나가주세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최근 오성 전자와 DL 전자의 계획이 뜻대로 안 된 것을 떠올렸다. 그는 냉큼 고개를 숙였다.
“내가 사과함세.”
최민혁은 가소로운 얼굴로 손짓했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어디서 무슨 소문을 듣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전 기존 사업에 대해서 따로 뭔가 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니,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하지만 집요한 김현우 상무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만약 오 사장님 통해서 권한이 있다면 얼마든지 손을 대겠다는 말인가?”
정작 알고 싶은 것은 박경진 재무 팀장 일인데, 자꾸 엉뚱한 쪽으로 말을 돌리는 김현우 상무의 행동에 최민혁도 화가 났다.
“그거 잘되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사장님과 STB 사업부 구조조정이나 매각 문제에 대해서 한번 논의해 보겠습니다.”
소문은 어디까지나 공론화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기 면전에서 구조조정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본 김현우 상무가 소리쳤다.
“최 실장!”
김현우 상무는 크게 분노했다. 이런 일을 원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민혁은 이미 일이 이 지경이 된 마당에 그냥 끝낼 생각이 없었다.
“마침 몇 가지 보고할 것도 있는데, 이번에 사장님 뵙고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