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61화 (61/1,021)

#61

최민혁이 내놓은 자료는 바로 이와 관련된 핵심 특허 아이디어였다. 다른 표준화 특허에 밀려서 돈이 안 되지만 특허 출원은 가능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 MPEG 관련 논문으로 석박사 학위를 얻은 임기석 부장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료와 최민혁의 얼굴을 몇 번이나 쳐다보았다.

그는 마치 유성에 두들겨 맞은 사람처럼 몸을 가누지 못했다.

‘비록 가짜기는 하지만 저것 역시 진짜 못지않아. 그 가치는 가볍지가 않은데, 알아보는군. 실력도 합격이군. 아마 지금쯤이면 비슷한 관련 특허가 꽤 올라오고 있을 테니까.’

최민혁은 물론 DVD처럼 대용량 데이터와 관련된 MPEG-2 특허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가 할 사업도 아니고, 앞으로 이익이 나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꼭 이 특허를 이용해서 제품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다만 그런 내심까지 드러내지 않은 채 임기석 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김 상무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비밀리에 그 특허 개요를 가지고 한번 특허를 출원해 보세요. 물론 MPEG 표준화 작업에도 적극 나서 보시고요.”

‘과연 이 비밀을 지킬지 지켜보자. 그게 최종 면접이니까. 합격하면 특허 출원 일은 김 박사에게 앞으로 전담시키면 되겠어.’

“아, 알겠습니다. 그, 그런데 실장님은 어디서 이런 자료를 얻은 겁니까?”

“제가 한국대 전자과라는 것을 모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전 세계 유명 연구소에서 전문가 수십 명이 팀을 이루어서 연구해도 아직 결론 내지 못한다.

“죄송한 말이지만 저도 한국대 학부, 석사, 박사까지 나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 박사 학위조차도 이런 결과를 도출하지 못합니다.”

무안한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흠, 그런가요? 그러면 제 머리가 좋다고 해둡시다.”

“하, 하지만…….”

최민혁은 쓸데없이 대화가 길어질 것 같자 김명준 과장에게 눈짓했고, 눈치 빠른 김명준 과장은 동병상련의 정을 느낀 채 임기석 부장을 끌고 나갔다.

그런데 임기석 부장은 질질 끌려 나가면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자, 잠깐만요. 시, 실장님, 잠깐만 이야기 좀 부탁합니다. 정말 궁금한 것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실장님, 정말 부탁…….”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

김명준 과장은 임기석 부장을 쫓아내고 난 후에 혼자 툴툴거리는 최민혁을 보면서 조금 전에 낙서처럼 써 내려간 문서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정말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최민혁의 표정을 봐서는 절대로 대답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마 대학 입학해서 공부했다고 하겠지?’

실제로 최민혁은 한마디 해주었다.

“대학교에서 배우는 전공과목만 충실하면 얼마든지 이런 아이디어를 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 * *

최근 데이콤의 극적인 반등은 코스피에도 큰 영향을 줘서 하락세에 제동을 걸었다. 특히 오성 전자가 데이콤 지분 쟁탈전에 본격적으로 끼어든 것을 넘어서서 지분을 모은 것이 컸다.

오성 전자는 심지어 DL 그룹이 얻은 데이콤 지분을 노려서 노골적으로 DL 그룹의 하농 인수에 제동을 걸었다.

비록 비싼 가격이지만 데이콤 지분 인수에 지대한 역할을 한 김용만 전무의 입지도 자연스럽게 오성 전자 압박 때문에 떨어졌다.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상황을 부담스러워한 최민혁은 우영민 과장에게 이 문제에 끼어들라고 지시 내렸다.

우영민 과장은 자신이 아는 증권가 인맥을 통해서 데이콤의 현재 가치와 미래 가치를 평가하는 보고서를 던졌다.

이번 보고서는 사실 데이콤에 대해서 아는 기본적인 사실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라서 지라시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거품이 잔뜩 낀 데이콤의 가치를 적나라하게 평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덕분에 정신을 차린 차익 매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코스피 반등에도 별다른 손실을 메꾸지 못한 이들이 데이콤 지분을 조금씩 팔기 시작하더니, 이 보고서를 보자 마구잡이로 던졌다.

결국 데이콤의 주가는 18만 원을 넘어서서 17만 원까지 밀려 버렸다.

이런 현상은 오성 전자 역시 데이콤 주가에 부담을 느껴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려 20% 가까이 손해를 본 덕분에 김용만 전무는 DL 그룹 내에서 욕이란 욕은 다 먹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불과 단 일주일 사이에 벌어진 이 요란한 코스피 소동에도 국내 경기는 나쁘지 않았다.

비록 단기 차입금을 빌려서 부채를 늘린 기업은 KM 그룹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업 규모를 키우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인재를 선점하려고 했던 것이다.

임기석 부장은 이런 분위기 덕분에 활기찬 모교 모습을 은근히 즐기면서 자신의 스승이나 다름없는 한국대 이동호 교수를 찾았다.

여전히 연구실에 박혀서 일에 몰두하고 있는 이동호 교수는 졸업할 때와 비교해서 크게 바뀐 것은 없어 보였다.

오성 전자와의 갈등 때문에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이유로 연구실 분위기는 좀 처져 있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기석이구나, 요즘은 잘 지내냐?”

“고민이 많습니다.”

“너는 나랑 다르잖아.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 괜히 좌충우돌해서 문제 만들지 말고.”

“저도 그렇게 살려고 지금 노력 중입니다. 그런데 이게 또 쉽지가 않네요.”

“오성 전자 조직 문화가 힘들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은 다르지 않아. 나야 이 나이에 더 욕심 부릴 것이 없어서 그놈들이랑 갈등하지만 너는 다르잖아.”

“아, 저 이직했습니다.”

“응? 그래? 어디로 갔는데?”

“KM 전자라고 아시죠?”

“KM 전자? 거기가 뭐 하는 회사야? 아니, 그 잘나가는 오성 전자에 잘 붙어 있지. 왜 듣도 보도 못한 회사로 옮긴 거야?”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이동호 교수는 오성 전자를 비롯한 10대 기업만 제법 알 뿐 다른 중견기업에는 관심도 없었다.

여전하다는 생각에 임기석 부장도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다른 회사 몇 곳에 면접을 봤지만, 오성 전자에서 손을 쓴 탓에 들어가지 못했다.

결국 차선으로 이력서를 낸 기업 중에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KM 전자를 선택했다.

‘그게 또 함정이었어.’

설마 김현우 상무 같은 인간쓰레기를 만날지는 상상도 못했다. 이를 악물고 어떻게 해서라도 버텨 보려고 했지만, 그게 잘되지 않았다.

그런 차에 만난 이가 바로 최민혁 실장이었다.

그런 복잡한 사정을 스승인 이동호 교수에게 말할 수는 없었고, 애초에 자기 개인사를 털어놓으려고 이 자리에 온 것은 아니었다.

“그게 또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실 한 가지 일 때문에 왔습니다.”

축 늘어진 안경을 세워 올린 이동호 교수는 석사 2년차 고효주가 내온 커피를 내밀었다.

“한번 마셔봐. 맛은 정말 없는데, 입이 심심할 때는 나쁘지 않아.”

“교수님!”

팩 토라진 고효주는 눈을 살짝 흘기면서 이동호 교수를 압박했다.

이동호 교수도 지금 밀린 일 때문에 임기석 부장이 내놓은 자료를 책상에 올려두고 나중으로 일단 미루었다.

“내가 확인해 보고, 연락할게.”

“알겠습니다.”

임기석 부장도 이동호 교수 냉대가 서운했지만 다른 프로젝트 일정 때문에 밀린 것이라 어쩔 수 없이 돌아서고 말았다.

‘누구 탓을 해봐야 소용없겠지.’

* * *

임기석 부장은 회사에 돌아와서 다시 최민혁이 준 논문과 기술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

최민혁이 준 보고서는 나름 혁신적이기는 하지만 몇 가지 중간에 사라진 수학적인 이론 문제가 있었다.

최민혁이 이지수에게 원천기술에 대해서 배울 당시, 밑바닥부터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만 배웠던 것이다.

임기석 부장은 그 빠진 부분을 일일이 다 메꾸고, 최민혁에게 가서 직접 보여주었다.

“괜찮네요. 이대로만 하세요.”

최민혁은 겉으로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내심은 깜짝 놀랐다. 그 역시 배운 이론을 그대로 적용해서 만들기는 했지만 그 누락된 부분을 뒤늦게 알았다.

사실 그 자세한 수학적인 이론을 몰랐던 것이었다.

‘역시 혼자서는 한계가 있구나.’

이미 임기석 부장에 대한 신뢰 때문에 일을 진행한 것이라서 다른 부분은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아, 가능한 일정을 줄여야 합니다. 1년씩 뭐 이렇게 해서는 곤란해요. 필요하다면 자금은 얼마든지 댈 테니까, 이동호 교수님을 잘 설득해 봐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능력에 확신이 서자, 자신이 준 특허에 관심 없다는 영상 전문가인 이동호 교수의 처지를 생각해서 추가로 몇 가지 가짜 특허를 내놓았다.

“이 비디오 관련 특허도 같이 의뢰를 해보세요.”

“…알겠습니다.”

* * *

임기석 부장은 다시 이전처럼 작업한 추가 특허를 이동호 교수에게 보냈다.

그는 직접 연구실을 찾아가서 적극 나설까 고민하던 중에 뒤늦게 비디오 압축 분야를 파고 있는 이동호 교수가 전화를 받았다.

다시 달려가서 피로로 축 늘어져 있던 눈이 갑자기 동그랗게 변한 이동호 교수를 만났다. 그는 미친 듯이 보고서를 꼼꼼하게 확인하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검증 결과는 왜 없어?”

“그게 시간이 너무 없어서요. 이 일을 맡긴 최 실장님은 회사 내부에도 비밀을 요구하면서도 일정을 쪼는 중이라서요.”

임기석 부장 처지를 잘 모르는 이동호 교수는 여전히 논문에서 눈을 떼지 않다가 뒤늦게 임기석 부장을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 또 그래?”

“그게 또 사정이 있습니다.”

“너 또 거기서도 사고쳤냐?”

“그게 아닙니다.”

“넌 그게 문제야. 사교성이 어째 나보다 더 심각하냐?”

“그렇게 말씀하시는 교수님은 왜 오성 전자라 트러블을 일으켜서 기존 연구를 모두 드롭시켰습니까.”

“인마, 넌 안 당해봐서 몰라. 그 새끼들이 내 연구를 다 먹겠다고 하잖아. 내가 그 꼴을 어떻게 보냐?”

“저도 비슷해요.”

“그렇게 안 좋아?”

“지금은 다 때려치우고, 다시 대학이나 갈까 생각 중입니다. 정 안 되면 시간 강사라도 할까 생각 중이니까요.”

그제야 임기석 부장 상황이 별로 안 좋다는 것을 알아본 이동호 교수는 물끄러미 임기석 부장과 연구 논문을 다시 살폈다.

“아니, 그러면 이건 또 뭐야? 너 이 연구 논문의 가치는 알고 있는 거냐? 가만. 이거 너희 회사랑 무슨 관계라도 있어?”

사실 자신이 최민혁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었으니, 대답하기가 참 궁색했다. 고작 대학교 1학년생이 어디서 이런 연구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고 생각했다.

“교수님, 전 연구 의뢰를 협의하러 온 업체 손님입니다. 자꾸 이러면 최 교수님이나 박 교수님을 찾아갈 겁니다.”

“아, 알았어. 흠, 그러니까. 네가 지금 의뢰하고 싶은 것은 이 논문 검증이지? 이게 정말 현실적으로 구현이 가능한지 알고 싶은 거야?”

“아무래도 비디오 압축은 방송국을 비롯한 영향을 끼치는 곳이 많지 않습니까. 그쪽에 인맥이 있는 교수님이라면 잘할 것 같아서요.”

“그래. 그건 맞아.”

이동호 교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비디오 압축에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하이브리드 비디오 인코더 모델과 관련된 연구 과제를 내놓았다.

비디오 신호의 입력 프레임 예측 오류를 이용한 이 연구 과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꾸준하게 연구해 온 결과였다.

문제는 이 비디오 압축이 하나의 범주에 들어가는데, 이게 산업적인 파급 효과가 컸다.

특히 TV를 비롯한 매체에 대한 연구라서 MPEG-2 표준화에도 영향을 미친다.

최근 이 연구 결과는 과시적인 결과를 내놓을 정도로 발전했다.

이제까지 오성 전자에서 투자만 하고 지켜만 보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서 이 연구 실적 전체를 원하는 상황이 되었다.

“새끼들이 고작 몇 억 투자한 걸로 이것을 다 먹겠다고 하잖아. 미친 새끼들이지.”

다만 이 연구 결과에 아쉬운 점이 존재했다.

오성 전자가 굳이 무리하게 이동호 교수에게 압력을 넣지 않은 것은 이동호 교수 연구 팀이 해온 결과가 효율이 그다지 높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고안한 방식은 이론적으로는 몇 배 이상의 효율을 보인 것이었다.

이동호 교수는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내심은 많이 달랐다. 그는 어벙한 임기석 부장을 다시 살폈다.

“기석아, 너 도대체 이런 논문을 어떻게 고안한 거야? 설마 네가 아인슈타인이라도 된 것처럼 단순히 수식으로 이렇게 추론했다고는 말하지 마.”

날카로운 시선에 임기석 부장도 살짝 고민했지만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최 실장님이 준 겁니다. 전 거기에 살을 더 붙여서 완성한 것이고요. 뭐 교수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나머지 퍼즐입니다.”

실제 원천기술은 이미 이 논문에서 마무리된 상황이기에 남은 것은 단순 노가다였다.

그렇다고 시일이 제법 걸리는 노가다를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최 실장이 누구야?”

임기석 부장은 여기까지 온 마당에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해주었다.

최민혁은 한마디로 말해서 KM 기업을 노리는 서자 출신의 재벌 3세다. 그런데 보기보다는 아주 똑똑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어디서 다른 놈의 아이디어를 훔쳤나라고 생각하던 이동호 교수도 한국대 1학년생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뭔가 내부적으로 일이 있겠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일단 이 연구 논문을 완성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 입장이 있어서 일단 의견 일치를 봤다.

다만 임기석 부장은 다른 무엇보다 최민혁이 강조한 일정을 확인했다.

“시간은 어느 정도면 되겠습니까? 1년씩, 이러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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