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60화 (60/1,021)

#60

같이 간 밑의 직원도 한 손을 거들었다. 결국 분위기에 휩쓸려서 돈을 썼는데, 설마 그것을 걸고넘어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는 차마 김현우 상무에게 반박할 수는 없었다.

대꾸하는 순간에 이보다 더 악랄한 폭언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결국 한 시간 가까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듣고야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STB 연구소가 KM 전자의 미래 먹거리를 위한 엔진이라는 사탕발림에 속아서 KM 전자 본사 6층에 있는 이 연구소에 입사한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오성 전자가 더 나았나?’

* * *

STB 펌웨어를 담당한 공채덕 과장이 침울한 임기석 부장을 이끌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번 데이콤 주식 대박으로 활기 넘치는 기획 팀 직원들의 모습을 부럽게 쳐다보았다.

“힘내세요.”

“김현우 상무 담당 오 비서가 침울하게 다닌다고 하는데, 요즘은 회사 생활에 많이 지쳤어.”

훤칠한 키에, 연예인 못지않은 김홍준 과장이 오늘만큼은 참지 못했다.

“김 상무 그 새끼는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인지 모르겠습니다.”

직속상관 욕에 평소라면 뭐라고 했을 임기석 부장이었지만, 오늘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참담한 현실을 인식한 공채덕 과장도 오히려 흥분한 김홍준 과장에 공감했다.

“저도 들은 이야기인데, 최 실장님이 정말 STB 사업부를 재검토한다는 소리가 있어요.”

“솔직히 이제까지 돈만 깨먹고 좀 불안했죠. 투자를 줄이고 있던 VCR 신제품을 무리하게 밀어붙일 때부터 불안했습니다.”

안 그래도 회사 적자는 시간이 갈수록 쌓여 가는데, 아무리 알짜배기 회사라도 어려운 상황에서 STB 연구 개발이 제대로 진행될지 불안한 이는 많았다.

김홍준 과장은 낙담했다.

“구조조정 이야기는 그 때문에 나온 겁니다. 최근 기조실의 장 실장님이 몇 번 오고 간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김 상무도 최 전무처럼 되겠죠. 문제는 우리 사업부인데…….”

“쓸데없는 소리 마!”

“요즘 정말 걱정되어서 하는 소리입니다. 회사 출퇴근하는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입니다.”

실제로 최민혁이 꾸민 음모 때문에 KM 전자 본사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KM 전자 주식을 산 개미조차 이제는 질려서 다 털고 나갔다.

대주주 역시 심상치 않은 KM 전자 분위기 때문에 긴밀하게 회사 내부를 알아봤다.

전부 다 최민혁이 원한 그림대로 흘러갔지만, 그 사실을 잘 모르는 세 사람은 초조했다.

“설마 회사에서 그렇게까지 할 리가 없잖아!”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이번 중앙지검에서 압수수색할 때 나온 증거를 다 긁어서 갔지 않습니까. 그 자료 중에는 김 상무 불법에 대한 증거가 가득하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귀가 얇은 임기석 부장도 결국 두 사람 이야기에 흔들리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진짜?”

“네! 다만 그 증거를 수집한 검찰이 왜 그냥 킵만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뒤늦게 임기석 부장도 술자리에서 다른 팀장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건 아마 비자금 때문일 거야.”

“네? 저도 그런 소리를 들었지만 그게 사실입니까?”

“그거 폭로되는 것은 중앙지검에서도 원하지 않을 거야.”

그도 뒤늦게 회사 내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최훈열 전무가 비자금 조성에 주도적이었지만 김현우 상무 역시 나름 돈을 착복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야 출장 갈 때 같이 가서 봤기에 알지. 그래서 더 나를 쳐내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어.’

유독 김현우 상무의 폭언과 학대가 심해진 이유를 알게 되자 머릿속이 복잡했다.

폭언과 비방은 조직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방식을 사용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나가라고 할 수 없을 때에 말을 돌려서 하는 거다.

임기석 부장은 그 때문에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는데, 때마침 은근히 관심을 둔 오혜정 비서가 자신 앞에 다가온 것을 발견했다.

오혜정 비서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임 부장님, 최 실장님이 지금 찾으세요.”

“최민혁 실장님이 말입니까?”

“네.”

임기석 부장은 최민혁 실장의 이름을 듣자 왜 김현우 상무가 그렇게 미친놈처럼 설쳤는지 금방 깨닫고는 오혜정 비서의 뒤를 따랐다.

짙은 남색 정장을 입은 오혜정 비서는 고급스럽지 않은 옷임에도 옷걸이가 좋아서인지 잘 어울렸다.

‘진짜 미인이다.’

임원이 되면 저런 비서를 거느릴 수 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 부러워했다.

‘최 전무가 하렘을 꾸미기 위해서 아예 노골적으로 미인만 뽑았다는 소리가 있던데…….’

그들과 한쪽에서 떨어져서 지켜보던 천선구 과장이 다가와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두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사내에서 이상하게 김현우 상무를 끼고 도는 천선구 과장이라서 공채덕 과장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공 과장님이 모르면 누가 압니까? 회사 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두 분은 모른다고 할 겁니까.”

“아는 것이 있어야 안다고 하죠.”

“허, 참 눈치는 더럽게 없어서 앞으로 회사 생활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 만약 김 상무님이 이 사실을 알면 두 분을 그냥 두겠습니까?”

“하.”

어이가 없는 공채덕 과장은 뒤돌아섰고, 김홍준 과장 역시 무시해 버렸다.

둘의 태도에 화가 잔뜩 난 최선구 과장이 오히려 더 큰 소리를 쳤다.

“어디 한번 두고 봅시다!”

* * *

최민혁도 처음에는 다국적기업의 전장인 된 MPEG-2에 관해서 관심이 없었는데, 막상 임기석 박사의 MPEG 표준화 관련 문서를 토대로 만든 미끼 MPEG-2 특허를 정리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아직 일부만 발표된 건가?’

뒤늦게 MPEG에 대한 기억을 하나둘씩 찾아 들어갔다.

다행히 감옥에서 나온 후에 외국을 떠돌면서 멀티미디어 관련 사업을 한 적이 있었기에 MPEG과 관련된 자료를 꽤 많이 접했다.

그 자료 중에는 특히 돈이 될 만한 특허가 상당 부분 있었다.

‘하, 이게 웬 재수야?’

로또 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던 자기 능력 비하를 이번만큼은 철회했다.

최민혁은 소니, 도시바, 히타치를 비롯한 다국적기업이 관여한 특허 목록을 하나씩 적어 나가면서 세부 항목을 채웠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상세한 부분까지 다 기억이 났다.

그리고 이게 모두 지금쯤 MPEG 표준화 활동에 적극 관여하고 있는 이지수의 특훈 때문이라는 것을 새삼 절감했다.

‘실로 대단한 여자지.’

뒤늦게야 자기 능력의 특전을 활용하는 방법을 찾았다.

자신이 미래에서 구체적으로 작업했던 것은 연상을 통해서 어느 정도 기억해 낼 수가 있었다.

특히 특허와 관련된 것은 꼭 구체적인 필요가 없이 개념적으로 충분했다.

MPEG-2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면서 한편으로 아쉽기만 했다.

‘지금 내 능력으로 이걸 다 먹으려고 했다가는 오히려 배탈 나.’

결국 최민혁은 MPEG-2 핵심 특허 다섯 가지 포트폴리오를 나눈 후에 그 항목을 다시 세분화해서 하나씩 정리했다.

‘재미있네.’

* * *

한창 정신없이 특허 관련 문건을 정리하던 최민혁은 마침 임기석 부장을 데려왔다는 오혜정 비서의 이야기에 일단 서류를 책상 안에 넣었다.

순둥이 같아 보이는 임기석 부장은 전형적인 공돌이 타입이었고, 지시받은 일에 묵묵히 수행할 타입으로 보였다.

실제로 인사팀 평가에도 정직, 근면이 그의 키워드였다.

‘첫인상은 합격.’

최민혁은 이미 김현우 상무의 패악질에도 묵묵히 회사에서 버틴 그의 인내심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자신을 대신해서 MPEG-2 특허 작업을 잘 수행할 수 있을지 확인이 필요했다.

“임 부장님은 어떤 사람입니까?”

“네?”

“아, 미안해요. 으음, 다시 질문하죠. 서울대 출신으로 오성 전자에서 꽤 오랫동안 잘 다니다가 왜 그만둔 겁니까?”

“그게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떤 점이 말이죠?”

“너무 꽉 막힌 조직 관리가 저에게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습니다.”

오성 전자를 싫어하는 이들이 내놓는 전형적인 주장이었다. 딱히 그 선에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임기석 부장은 솔직하게 자기 푸념을 털어놓았다.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견딜 수는 있지만, 너무 희망 없이 사는 것은 싫었다.

KM 전자는 그런 면에서 자신과는 궁합이 잘 맞았다.

“그런데 회사 분위기를 잘 몰랐습니다.”

김현우 상무는 면접 볼 때 STB 사업 미래에 대해서 달콤한 사탕을 늘어놓았다. 앞으로 3년간 모두 400억을 원천기술에 투자할 것이라 설득했다.

말은 정말 그럴듯했다.

당시 오성 전자 회사 생활 때문에 지쳐 있던 공돌이가 KM 전자 내부 사정을 알 턱이 없었다.

“모르고 들어온 건가요?”

처음에는 망설이던 임기석 부장은 최민혁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최근 김현우 상무의 학대가 갈수록 심해지자 은근히 화가 났다.

자신 앞에 있는 상대는 김현우 상무를 죽이려고 하는 최민혁 실장이었다.

“그게 처음에는 김현우 상무도 잘해줬습니다. 진짜 좋은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정도 지나니,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지킬 박사처럼 두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느꼈습니다.”

“쯧.”

심각한 최민혁은 자신이 생각해도 바보 같아서 계획한 질문을 다 접었다. 임기석 부장은 사내 정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안분지족한 공돌이 삶이면 만족한 이였다.

‘내 작업이 한몫했지. 우리 김 상무가 미쳐서 날뛰니, 결국 이런 불협화음은 더 커질 수밖에 없지. 흠, 괜찮네.’

공감 어린 시선으로 물끄러미 임기석 부장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임기석 부장은 자신의 처지를 너무 잘 알아주는 최민혁 실장에게 결국 진심으로 감복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일단 첫 만남은 잘 해결된 것 같은데.’

“제가 할 말이죠. 회사가 직원에게 충분한 배려를 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갈취만 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

삼두육비 괴물로 소문난 최민혁 실장의 따스한 이야기에 임기석 부장은 큰 눈동자를 끔뻑거렸다. 김현우 상무에게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저기 실장님…….”

“아, 그냥 바로 본론으로 가죠. 혹시 김현우 상무에 대한 것은 임 부장이 잘 알 테고, 특별하게 가지고 있는 자료는 없습니까?”

“네? 그게 무슨…….”

“왜 이러세요. 김현우 상무가 노골적으로 임 부장님을 압박하던데, 뻔한 수작 아닙니까. 설마 이대로 있다가 당할 겁니까?”

“아.”

침울한 임기석 부장도 순간 갈등했다. 그 역시 바보가 아니라서 돌아가는 회사 분위기는 잘 알았다. 아마 최훈열 전무 구속 전이라면 이제 대학교 1학년인 최민혁을 믿지 않겠지만, 최민혁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는 소문을 나고 있는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무자비할 정도로 상대를 밟아버리는 그의 성정이라면 김현우 상무를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솔직히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뭔데요?”

그는 뜻밖에 가방에서 CD 몇 장을 주섬주섬 꺼내서 내밀었다.

최민혁은 노트북으로 CD 내용을 확인하고 나서는 혀를 내둘렀다.

‘맙소사. 이거 해외 나가서 여자 만난 사진이잖아.’

날짜별로 분류된 사진은 김현우 상무가 해외에서 딴짓을 한 증거였다.

“뒤끝이 있군요. 설마 아예 따로 감시라도 한 겁니까?”

“감시까지는 아닙니다. 김현우 상무는 해외 나가면, 이상할 정도로 경계심이 흐려집니다. 저는 눈에 보이는 것만 사진으로 증거를 남겼을 뿐입니다.”

그랬다.

김현우 상무는 임기석 부장을 얕잡아보고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임기석 부장은 그 점을 노려서 눈에 보이는 증거는 따로 모았다.

몇 년에 걸쳐서 누적된 데이터는 김현우 상무의 해외 행적을 적나라하게 잘 보여주었다.

심지어 유럽에 같이 데려가서 즐긴 여자의 정체에 대한 것도 있었다.

“이건 흥신소라도 고용한 겁니까?”

“같이 유럽에 갈 때 같이 데려가는 여자입니다. 국내 들어올 때 우연히 신분을 들었을 뿐입니다.”

평범한 답변이지만 사진 증거는 오히려 상대를 철저하게 망가트릴 각오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불륜인가. 흠, 보기와는 다르네. 하긴 나 때문에 김현우 상무가 요즘 아주 노예처럼 갈구고 있다고 소문이 돌 정도이니.’

“왜 이렇게 학대를 당하면서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버틴 겁니까?”

“이렇게 힘든 날이 있으면 좋은 날도 오지 않을까, 그것만 믿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두 번째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었고요.”

가슴 찡한 말에 최민혁은 인내와 인성에도 합격점을 줬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의 능력을 한번 확인하고 싶어서 자신이 만든 서류 중에서 앞에 한 장만 그에게 내밀었다.

“이게 무엇… 헉, 서, 설마 실장님이 MPEG-2 표준화에 관한 것도 알고 계십… 가만, 이것은….”

최민혁은 핵심 특허 세 가지 외에 가짜로 만든 몇 가지 특허 중의 하나였다. MPEG-2 비디오 표준에서 MPEG 비트 스트림 해독과 디코딩에서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중복된 공간 데이터를 제거하는 공간 코딩 기술과 일시적으로 중복된 정보를 제거하는 임시 코딩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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