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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53화 (53/1,021)

< #053(여기까지 무료) >

“내 제안에 답이나 해. 정말 회사 옮길 생각 없냐? 너 정도 되면 우리 오성 전자에서도 과장으로 시작해서 본사 기조실로 바로 가고도 남아. 내가 장담해.”

“생각 중입니다.”

“언제까지 생각만 할래?”

이전보다 스토커처럼 집요한 황광수 차장 태도에 우영민은 피식 웃었다.

“VCR은 어때요?”

“뜬금없이 VCR 이야기는 왜 해? VCR이야 뭐 늘 그렇지.”

“이번에 우리도 VCR 신제품을 내놓을 건데, 설마 이번 일에 대한 보복으로 그것까지 공격할 겁니까?”

“글쎄.”

당혹한 황광수 차장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런 문제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황광수 차장은 영문을 몰라서 눈만 껌뻑거렸다. 그 날카로운 우영민이 왜 자기 약점을 들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영민 과장은 뒤늦게 이전 대화 속에서 오성 전자가 KM 전자에 대해서 이를 갈고 있다고 했던 것을 생각해 냈다.

“혹시 그 공동 연구 과제 중에 자동 예약 녹화 기능과 프로그램 안내 정보 기능은 아직 연구 중인 겁니까?”

“그 정도 기술은 이미 탑재했어. 다만 정통부 쪽에서 방송국 타령하면서 떡고물을 뜯어먹으려고 국내 판매 일정이 늘어져서 문제가 될 뿐. 아니, 그건 왜 묻는 거야?”

“좀 걱정이 되어서요. 혹시 보복으로 두 가지 기능을 홍보 수단으로 삼으면 우리 신제품 VCR 타격이 크잖아요. 그런 생각을 안 해서 다행입니다.”

“그러냐? 그런데 구멍가게 수준의 KM 전자 VCR을 타깃 삼아서 건드려 봐야 오히려 그 공격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

“그렇습니까. 잘되었습니다. 그러면 술이나 한잔합시다.”

우영민 과장도 뒤늦게야 자신들이 막고 자시고 할 시기가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고, 새삼 치밀한 최민혁 실장 지시에 경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 양산성 검토가 끝난 후에 초도로 곧 찍을 3만 대가 문제야. 만약 오성이 나중에 이걸 빌미로 공격하면, 그거 다 재고로 쌓여서 타격이 엄청날 거야. 지금이라도 부품 조달을 막는다면 손실을 대폭 줄일 수가 있어. 실장님이 이걸 걱정한 거였구나. 진짜 대단한 분이다.’

***

황광수 차장의 보고를 받은 권태성 실장은 안 그래도 와이드 TV 때문에 열받아서 기회만 노리는 중에 이 일을 가지고 정보통신부와 협의했다.

정보통신부 역시 와이드 TV 스캔들이 터지면서 당혹스러웠던 터라 KM 전자를 혼내 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했고, 의도적으로 질질 끈 인허가 문제를 일괄적으로 통과시켰다.

오성 전자가 황광수 차장의 보고를 받은 지 일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 그들은 북미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두 가지 기능이 들어간 VCR 신제품을 국내에 팔 것도 아니면서 마치 팔 물건인 양 홍보했다.

[DX1329 모델은 VCR의 새로운 시도를 열어간다!]

사용자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기술은 오성 전자라면서 오성 전자를 추켜세우지 않는 이가 없었다.

드문드문 오성 전자에 반감을 드러낸 이는 있었지만 잘 드러나지 않았다.

KM 전자 김현우 상무실은 발칵 뒤집혔다.

뒤늦게 김현우 상무가 내막을 알아보고 나서 두 가지 기능을 양산 일정 때문에 빼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파악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아니, 빼라고 했다고 해도 그냥 빼면 어떻게 해? 일단 무조건 기능을 넣어둬야 할 것 아냐!”

전용 칩이 들어가야 하는데, 단가 상승과 일정 지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사전에 설계할 때 공간이라도 만들어 두었으면 부품만 찍으면 되는 것인데, 그것마저 어려워졌다.

최훈열 전무 구속 여파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간 김현우 상무가 실적 때문에 무리하게 일을 진행한 결과였다.

이번 VCR 개발에 기획단계에서 큰 역할을 한 천선구 과장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이 건에 대해서 변명했다.

“그, 그게 상무님이 어차피 방송국 때문에 일정이 늘어지는 것이라서 언제 될지 모른다고 일단 진행하라고 해서······.”

“야, 이 병신아, 그렇다고 기능 자체를 빼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어떻게 해서라도 김현우 상무의 줄을 잡으려던 천선구 과장은 마치 간신배라도 된 것처럼 계속해서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아, 씨발. 너 진짜 미친 거 아냐? 인사 팀에서도 너 때문에 말 많은 거 알잖아. 내 덕분에 어렵게 회사에 들어왔으면 죽으라고 일을 해야 할 것 아냐. 아니, 최소한 이런 사고를 치지 말아야지!”

“그게 기획 팀에서도 별문제가 없다고······.”

김현우 상무는 지독한 최민혁 실장 얼굴을 떠올리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야, 이 병신아, 빼라고 한 것은 나라면서? 그런데 기획 팀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최 실장 그 새끼가 입에 거품까지 물고 날 물고 늘어질 거란 말이다!”

패닉에 빠져서 새파랗게 질린 김현우 상무는 크게 당황했다. 최훈열 전무가 있을 때만 해도 우산이 되어주어서 이런 문제를 쉽게 넘어갔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을 호시탐탐 노리는 최민혁 실장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오수연 비서가 마침 전무실 분위기에 몸을 떨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저기 전무님, 지금 사장실에서 임시 회의가 있다고 연락 왔습니다.”

버럭 소리 지르려고 했던 김현우 상무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알! ···았어.”

그리고 한 마디 더.

“오 비서, 내 마음 알지? 내가 지금 화가 많이 나서 실수한 거야. 가능하면 빨리 오 비서 원하는 대로 다른 팀으로 보내줄 테니, 좀 참아.”

“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오수연 비서도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영문을 몰라서 눈만 껌뻑거리다가 고개를 갸웃한 채 나가고 말았다.

마른침을 삼킨 김현우 상무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계집에게 신경 쓸 때가 아냐.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안 그러면 나도 최 전무랑 같은 꼴을 당할지도 몰라.’

***

차가운 사장실 분위기는 북극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칼날 같았다.

잔머리에 능한 이일태 이사는 김현우 상무 얼굴도 쳐다보지 않았고, 원종상 전무도 올라온 기획안을 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이 있는 두 사람도 이번 사태를 그냥 덮고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형섭 부사장은 신이 난 얼굴로 불구경하는 자세였고, 오영근 사장만 무거운 얼굴을 한 채 침묵하고 있었다.

최민혁은 맛있게 요리된 통돼지 요리를 앞에 둔 사람처럼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씨발.’

식은땀마저 흘린 김현우 상무는 마치 효수형을 앞에 둔 사형수처럼 조용히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포문을 먼저 연 것은 최민혁이었다.

“일단 문제점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다채널 시대로 넘어가면, 모든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소비자 욕구는 강해집니다. 소비자는 이런 요구가 반영된 VCR 제품을 원합니다.”

다양한 채널에 대해서 필수적인 것이 바로 방송사의 별도 전파가 있어야 하고, 가전업체에서 이 전파 안내 신호를 수신해서 응용 가능한 수단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정보통신부의 압박을 받은 방송국에서 계속 시간을 차일피일 미루어서 늘어졌는데, 이 족쇄가 일부 풀렸다.

몇 개월이 앞서서 이루어진 일 때문에 상황은 아주 달라진 것이었다.

“생각해 봅시다. 이런 소비자 욕구가 반영되지 않는 오성 전자 VCR 제품도 소비자는 선택을 망설일 겁니다. 하물며 그보다 격이 떨어지는 우리 회사 VCR 제품을 정말 소비자가 구매할 거라 생각합니까?”

눈을 번뜩인 최민혁은 한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김현우 상무를 살벌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니, 좋습니다. 영업 시장 말처럼 국내 시장은 저가에 팔아치운다고 하죠. 그러면 설마 안내 방송도 안 되는 제품을 미국 시장에 팔 겁니까?”

말없이 고개만 숙인 김현우 상무는 처분만 기다리는 죄수처럼 답하지 못했다.

최민혁은 신이 나서 손뼉까지 쳤다.

“아, 맞다. 이번 초도 물량을 미국에 마케팅까지 할 생각인 것으로 압니다. 그게 정말 될 거라고 생각합니까? 아니죠. 알아보니, 영업 팀은 난리가 났습니다.”

“···그, 그건 아직 시기상조라서 최소한 3년 이상은 걸릴 겁니다.”

드디어 김현우 상무 입이 열린 것을 본 최민혁은 쾌재를 불렀다.

“그러면 지금 TV에 나오고 있는 저 오성 전자 광고는 사기입니까? 이미 양산 다 끝났고, 방송사와 협의도 타결되었습니다. 이제 팔기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 그저 광고일 뿐입니다.”

“아직도 모르는군요. 오성 전자에서는 이미 저 VCR를 북미 지역에 수출 계약까지 체결했어요. 그런데 무슨 광고일 뿐입니까?”

“그,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럴 리가 있습니다.”

오영근 사장을 비롯한 나머지 임원도 최민혁의 핍박에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오성 전자가 설마 수출 계약까지 따냈을지는 몰랐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해외 공장에 막대한 투자를 진행한 것도 오성 전자는 애초에 국내가 아니라 북미 시장을 노린 겁니다. 안에 들어간 칩도 스타사이트 텔레캐스트사 칩이니까요. 이제 언론을 통해서 그런 사실까지 홍보할 겁니다. 국내 TV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말이죠.”

이런 홍보가 실제적인 효과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기능 칩이 들어가면 이제부터 얼마든지 서비스를 받을 수가 있는데, 그렇지 않은 모델은 아예 새로 사들여야 한다.

가격도 비슷하고, 같은 제품이라면 어떤 제품을 선택할지 불을 보듯 뻔했다.

오영근 사장은 뒤늦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오성에서 비밀리에 개발한다고 하던 신형 VCR이 그 VCR이었구먼.”

“네.”

물론 이 문제에 대해서 왜 기획 팀이 사전에 검토했느냐고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일정 문제 때문에 그 안건을 빼자고 똥고집을 부린 이가 다름 아닌 김현우 상무였기 때문이다.

최민혁도 자기가 관여하지도 않는 부분까지 따지지는 않았다.

“도대체 이번에 얼마나 까먹은 겁니까? 만약 3만 대 초도 물량을 생산까지 했다면 적어도 50-60억은 깨졌을 텐데, 할 말이 없습니까?”

60억은 좀 과장한 수치였지만 김현우 상무는 반박하지 못했다.

“아니, 그걸 떠나서 VCR 사업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비용까지 날려 버렸습니다. 김 상무는 무슨 생각으로 일을 이따위로 처리한 겁니까?”

최민혁은 마치 자신이 사장이라도 된 것처럼 김현우 상무를 갈구기 시작했고, 욕설까지 나왔다.

하지만 오영근 사장과 문형섭 부사장은 말리기는커녕 십 년 먹은 변비가 뻥하고 뚫리는 쾌감에 희희낙락해서 불구경만 할 뿐이었다.

두 사람 다 이제까지 김현우 상무의 갑질에 치를 떨었고, 차마 내색하지 못한 스트레스를 받아 왔다가 이번에 최민혁 실장을 통해서 대리만족한 것이다.

이일태 이사와 원종상 전무조차 시선을 피한 채 모른 척했다.

“김 상무님, 도대체 회사에 끼친 손실이 얼마나 되는 지나 압니까? 정말 당신이 책임감이 있다면 당장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미, 미안합니다.”

최민혁은 사장실 회의 테이블을 양손을 쾅 내리치고는 김현우 상무랑 얼굴을 바짝 들이밀면서 으르렁거렸다.

“제가 그런 사과를 듣자고 이런 말을 합니까? 책임을 지라는 말입니다. 책임을 지세요!!”

그래도 그만두겠다는 소리를 김현우 상무는 하지 않았다.

최민혁은 독사같이 밀어붙여도 여전히 입을 다문 김현우 상무의 인내심에 혀를 내두르면서 고름 짜듯이 쥐어짰다.

정신적인 고문 수준을 넘어선 광경에 원종상 전무가 보다 못해서 끼어들었다.

“최 실장 마음은 이해가 되지······.”

하지만 오영근 사장이 냉큼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김 상무, 최 실장 말도 일리가 있어.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 지 다음 임원회의 때까지 보고를 올리게.”

통쾌한 오영근 사장 목소리에 차별이 심하지 않냐고 하던 말을 꿀꺽 삼킨 원종상 전무도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결국 임시 회의는 이렇게 끝이 났다.

나가는 김현우 상무 어깨는 천근 바위를 올린 것처럼 무거웠고, 그 뒤를 따르는 두 사람 역시 표정이 단단히 굳었다.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세 사람에게 최민혁 실장이 불과 며칠 전에 요구했던 것이다.

결과.

오영근 사장은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차라리 일찍 발견해서 다행이었어. 만약 생산 다 끝나고 터졌다면······.”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냉정하게 말해주었다.

“기회비용까지 합치면 최소한 100억은 날렸을 겁니다.”

“······.”

두 사람은 아찔한 얼굴을 한 채 입을 다물고 말았다.

***

자동 예약 녹화 기능과 프로그램 안내 정보 기능을 요구한 것은 원래 기획 팀이 아니라 바로 북미 지역을 담당한 해외영업 팀이었다.

해외영업 팀이 시장이 좁은 국내보다는 북미 지역을 노리면서 이 기능이 꼭 필요하다고 기획 팀에 요구해서 진행된 것이었다.

그런데 최훈열 전무 사태가 터지면서 이 중요한 이슈는 쑥 들어가 버렸다.

담당자인 김현우 상무가 자기 일에만 집중했다면 이런 문제가 터지지 않았을 텐데, 마지못해서 진행하던 VCR에 등한시했다.

그는 본사 압수 수색이 진행되면서 수십 명이 구속되자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서라도 무리하게 VCR 양산을 밀어붙였다.

< #053(여기까지 무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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