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2 >
“이미 와이드 TV 사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작 하루였죠. 그렇게 소비자가 난리 치는데, 정부와 가전 3사가 합작해서 다 덮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뉴스로 세뇌하자 시민은 다들 손뼉 치고 있어요. 이런 것을 보면서 두 분은 느끼는 게 없습니까?”
문형섭 부사장은 민망한 얼굴로 머리를 조아렸다.
“최 실장, 이번 일은 정말 미안하네. 나도 김 상무가 싫어. 하지만 맞는 소리를 하는 것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어.”
“압니다. 그래도 두 분 태도를 보면 아직 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일단 가서 지켜보기만 하시죠. 제가 장담하지만 두 분은 절대로 피해 보는 일은 없을 겁니다.”
“김 상무는 아니라는 이야기군.”
“설마 김 상무를 옹호하는 겁니까. 그리고 이유는 두 분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김현우 상무가 회사에 끼친 손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문형섭 부사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도 능력이 있었다면 최훈열 전무에 이어서 김현우 상무를 가장 먼저 쳐냈을 거기 때문이다.
“......자신 있나? 비록 사채업자인 최두진 사장은 자네 할아버님과도 깊이 신뢰하는 사이네.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거야.”
“전 200% 확신이 없으면 일을 진행 안 합니다.”
“으음.”
두 사람은 물끄러미 최민혁 눈을 정면에서 쳐다보았다. 강한 신념과 의지가 뚜렷한 그의 두 눈에는 단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확실히 뭔가 있지 않고서야 지금처럼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지. 경영권 승계 문제도 있을 테고, 아직은......자기 능력을 감추는 거군.’
“알겠네. 기다려 보겠네.”
“감사합니다.”
***
최민혁도 요즘 계속 언론 통해서 죽일 놈으로 마녀 사냥 당하는 최훈열 전무 때문에 죽어지내던 김현우 상무가 대놓고 한 압박 때문에 오영근 사장과 문형섭 부사장까지 부추겨서 찾아온 것에 피식 웃었다.
다행이라면 열 받은 김현우 상무는 오수연 비서를 계속 괴롭히지 않았다.
그래도 김현우 상무는 쇠고랑(?)을 찬 최훈열 전무가 계속 언론을 통해서 주목받는 것 때문에 상당한 자제심을 보인 것이었다.
최민혁은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시 가장 좋은 타켓은 제품 양산에 정신이 없는 VCR이었다.
그 역시 왜 유독 VCR 이슈를 자꾸 떠올릴까 고민하다가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자동예약녹화기능과 프로그램안내 방송이 있었구나.’
특히 프로그램안내 방식은 단순한 프로그램 기능이 아니라 VCR에 내장된 칩이 방송국에서 송출된 프로그램 안내신호를 따로 처리한다.
최민혁은 조성돈 기획팀장을 불러 VCR 양산 관련 보고를 받았다.
“현재까지는 초도 물량 1,000대를 찍었고, 양산 검토에 한창입니다. 특히 보드 칩 중에 몇 개가 PCB 설계 오류로 계속 불량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 외에는 더 문제가 없어요?”
“더 많습니다.”
초도 물량에서 발생한 불량 보고서는 발견된 건수만 해도 175건이나 되었고, 대부분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조성돈 기획팀장이 파악한 초도 생산 문제는 생각보다는 더 많았다. 이 정도 수준으로 과연 양산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불량 항목을 살피던 최민혁은 굳이 그런 부분까지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양산 전 단계에서 자잘한 문제가 많은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개발 비용까지 합쳐서 지금까지 들어간 비용은 어떻게 됩니까.”
“.......대략 25억이 좀 더 될 겁니다.”
“많네요.”
“주로 인건비와 초도 물량 자제 비용이 많이 듭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경쟁 업체를 상대로 영업과 광고비용이 꽤 들어갑니다.”
한국 전자 업체 제품 중에 오성 전자는 VCR만 세계 시장 점유율 11%로 일본에 이어서 2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LC 전자 역시 더블데크 VCR를 내세워서 수출 드라이브를 걸고 있었다.
이들 제품은 해외 생산 기지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 점진적으로 가격 인하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조성돈 기획팀장은 어두운 안색으로 이 문제점을 계속 지적했다.
“솔직히 VCR이 과연 시장에서 얼마나 통할지도 의문입니다. 기존 제품을 다 단종시키고, STB으로 갈아탔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오성 전자, LC 전자, 심지어 대운 전자는 다른 상대를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VCR 사업부를 가능해지려면 줄여나가던 계획을 바꾼 사람이 실적 타령을 하던 김현우 상무였다. 그는 과시적인 결과를 위해서 무리하게 이번 VCR 제품 개발을 밀어붙였던 것이다.
최민혁은 대략 VCR에 대해서 돌아가는 상황을 알게 되자 혀를 찼다.
“김 상무도 문제고, 거기에 오성이 우리를 죽이려 한다는 말씀이군요?”
“네.”
조성돈 기획팀장도 딱 이 말만 하고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최민혁은 집요했다.
“그들이 어떤 방법을 쓸 것 같은가요?”
“네?”
“아니 조 팀장님이 방금 한 말을 잊었습니까? 그들이 우리 회사를 용납하지 않을 거면 다른 편법을 쓸 것 아닙니까. 그게 뭐가 될까요?”
“가격 인하와......”
요식적인 답변을 하는 조성돈 팀장 입을 막은 최민혁이 따로 지시했다.
“그들의 전략을 한 번 살펴서 오늘 저녁까지 보고를 해주세요. 오늘만큼은 늦게까지 퇴근하지 않을 테니, 기다리겠습니다.”
“그게 좀......”
“오늘까지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영문을 모른 채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조영돈을 본 김명준 과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기획팀에게 기획팀에 맞는 일을 지시한 것뿐입니다. 그게 이상합니까?”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기획 실장으로 당연한 지시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기는 합니다.”
최민혁도 지금까지 너무 쉽게 갔다는 것에 대한 시선을 의식했다.
‘앞으로는 기획팀의 능력도 필요하니까. 그들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려면 번거로워도 이런 방식을 쓸 수밖에 없어. 그리고 기획안을 보면 새로운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고.’
***
기획팀은 갑자기 떨어진 최민혁 지시에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단 하루 만에 VCR에 대한 상대 대응책을 찾아내란 소리에 다들 어이가 없었다.
신기한 것은 그런 혼란도 잠시였다.
이미 최민혁 실장을 이미 인정한 기획팀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브레인스토밍과 비슷한 미팅을 하루에 다섯 차례나 가지면서 오성 전자에 있는 지인을 통해서 알아보았다.
다행히 정성근 대리가 실마리를 찾았다.
“혹시 자동예약녹화방식을 말하는 게 아닐까요?”
VCR 쪽을 전담하는 이정원 과장이 툴툴거렸다.
“그건 이미 반영되었어. 명색이 20억을 들여서 오성 전자, 대운 전자, LC 전자와 같이 연구한 결과인데, 빼놓을 이유가 없잖아.”
다른 팀원도 고개를 갸웃한 채 정성근 대리를 쳐다보았다.
늘 다른 사람과는 다른 관점을 가진 정성근 대리는 맹점을 찍었다.
“최근 이슈가 된 케이블 TV, 위성 방송과 같은 다양한 컨텐츠 때문에 신문을 이용하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방송국 프로그램 안내신호를 통해서 TV 화면에 보여주는 방식이 이미 꽤 오래전에 검토가 된 것으로 압니다.”
“그랬지. 하지만 그 일이 쉽지는 않아.”
“제가 알기로 VCR에 따로 전용 칩을 내장해서 가능한 것으로 압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이런 안내 시스템이 서비스되고 있으니까요.”
“아, 그건 프로그램안내정보를 말하는 거군.”
뒤늦게 내용을 확인한 이정원 과장 안색이 좋지가 않았다. 그도 미처 간과한 사실이라서 다급하게 다른 회사나 대학 연구소와 공동 과제를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 가지 발견했지만, 연구소 쪽에 확인해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전 3사에서 공동으로 자금을 대서 연구하는 것이기는 한데, 당장은 어려워. 적어도 올 하반기는 되어야 기능이 가능하고, 칩을 탑재한 제품은 내년이나 되어야 가능할 거고.”
“그렇습니까.”
뒤늦게 추가 확인이 이어졌지만, 이정원 과장 주장처럼 아직은 연구 단계 중이었다.
조성돈 팀장도 일단 가능한 자료를 모두 정리해서 최민혁에게 보고했다.
보고 안을 묵묵히 살피던 최민혁은 이상야릇한 표정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몇 달이 있어야 발표가 되겠지만 늘어진 것도 정통부에서 딴죽을 걸어서 생긴 문제라는 것까지는 모르는군.’
“수고했습니다.”
“......시간이 너무 짧아서......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사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내막을 알 것이라고 예상한 최민혁은 딱 여기에서 선을 그었다.
“네. 훌륭해요. 오늘은 이 법인 카드로 회식이나 한번 하세요.”
“......알겠습니다.”
선뜻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한 조성돈 팀장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최민혁은 보고와는 달리 이미 가전 3사 내부적으로 전용 칩을 이용한 자동예약녹화방식과 프로그램안내정보 관련된 연구가 끝난 것을 알았다.
다만 굳이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한 것은 이제까지 자신의 행동이 너무 튀기 때문이다.
지금 김명준 과장만 해도 이전의 그 이상한 시선은 아니었다.
“이건 기획팀 안을 참고로 해서 만든 지시 안이니, 이대로 따라 주세요.”
“알겠습니다.”
김명준 과장은 평소처럼 대수롭지 않게 지시서를 들고 사라졌다.
‘오성 쪽에도 라인이 있는 우리 유능한 우 과장이 바로 알아서 잘 처리를 할 거야.’
***
우영민 과장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지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결국 가전 3사 쪽에 아는 라인 통해서 우리 회사의 VCR 개발 일정과 심지어 와이드 TV 설문 조사한 것까지도 알리라는 말이군요.”
김명준 과장 역시 약간은 찜찜한 지시에 반문했다.
“문제가 될 것 같으면 나에게 말해. 실장님에게 다시 요청해볼 테니까.”
“아뇨. 굳이 그럴 것까지는 없습니다. VCR 개발이나 와이드 TV 설문 조사에 대한 것은 그쪽도 압니다. 그런데 딱히 우리를 제재하고 싶어도 방법이 쉽지 않거든요. 오디오를 비롯한 반도체 패키징까지 그쪽하고 겹치는 부분이 별로 없어요. 있다면 고작 TV 사업부 정도인데, 그건 이미 오성 쪽에서 우리를 상대로 살벌하게 작업 중입니다.”
“그러면 결국 자동예약녹화와 프로그램안내정보 기능인데, 그게 과연 의미가 있는 거야?”
“저도 오성 전자 내부 사정을 잘 몰라서 뭐라고 하기는 그렇습니다. 다만 이게 만약 실장님 계획대로 된다면 VCR 사업은 타격이 불가피합니다.”
“실장님이 왜 그러는 걸까?”
현명한 우영민 과장은 어리석게 최민혁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히 김현우 상무를 공격할 수단만은 아닐 겁니다. 한 번 알아봐야죠.”
“누구에게 말인가?”
“황광수 차장님요.”
***
황광수 차장은 장승일 실장 스카우트에 실패한 후에 권태성 실장에게 질책을 받기는 했지만 딱 거기까지 다였다.
다시 받은 지시를 장승일 실장을 꾸준히 지켜보고 기회를 노리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성공만 한다면 승진과 더블어서 막대한 성과보수 보장까지 받았다.
KM 전자 내부 정보를 빼내는 것은 덤이다.
그는 때문에 본의 아니게 KM 그룹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우영민 과장 전화를 받자 번개처럼 약속 장소인 대학가의 한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우영민 과장과는 과거 KM 전자 최병문 상무를 도와주면서 안면을 익혔는데, 서로 호형호재하면서 살갑게 지냈다.
“광수 형, 오랜만입니다.”
“그래. 영민이 넌 어떻게 지내냐?”
“저야 널 그렇죠.”
“어때? 내 제안은 받는 거지. 솔직히 너희 쪽 인원은 이미 다 떠나갔잖아. 남은 사람이라고 해봐야 몇 명 안 돼. 고작 그런 조직에 있다가는 네 창창한 앞날이 불투명해져.”
“말씀은 고맙습니다.”
우영민 과장은 서두르지 않은 채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자연스럽게 와이드 TV 이슈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우리 기획팀은 난리가 났었다. KM 전자에게 보복하자는 둥, 전쟁해야 한다는 둥 말이 많았어. 그런데 우리 회사랑 겹치는 것은 고작 TV 사업부이고, 이미 작업 들어갔어. 이미 먼저 선전포고를 한 상황에서 방법이 없었지.”
“그러면 분위기는 안 좋겠네요?”
“말도 마라. 공장에 쌓여 있는 재고 물량도 그렇고, 하다가 만 생산 설비도 골치야. 일단 마무리까지는 진행하고 있는데, 수백억 이상의 손실이 날 거야. 거기 실무자는 KM 전자에 대해서는 이를 갈고 있어.”
기사는 내려갔지만 이미 당한 몇몇 소비자 원성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고, 심지어 오성 대리점에 가서 반품을 요청했다.
아니 소수 몇 사람은 아예 가전 3사를 상대로 사기죄로 고소까지 했다.
“큰일이군요.”
불구경하는 듯한 우영민 과장 말투에 황광수 차장은 혀를 찼다.
“너희 회사에서 한 일인데, 나 몰라라 하는 것도 그렇지 않냐?”
“아니 그러면 우리 회사에서는 와이드 TV 개발하면 안 되는 겁니까?”
“내 말은 왜 쓸데없는 조사를 해서 그걸 언론에 흘렸어?”
“아니 기사가 와서 와이드 TV 특종을 취재하는데, 저희가 뭐라고 합니까. 그거도 오성 전자 대리점 사장이 한 말이에요.”
“글쎄다.”
비록 전 회사였지만 큰 앙금이 없는 황광수 차장은 세세한 것까지 기획팀에 보고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지금 한 것뿐이었다.
그는 이보다 스카우트 제안에 여전히 대답이 없는 우영민이 의아했다.
< #052 > 끝
ⓒ SSDH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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