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9화 (49/1,021)

< #049 >

최민혁은 VCR 문제를 가지고 임원 회의에서 김현우 상무를 어떻게 구워삶을까 고민하다가 자신이 너무 서두른다는 생각해서 심호흡까지 했다.

그 역시 자꾸 일을 빨리 진척시키려는 마음이 끊어 올랐지만 참았다. 섣불리 나섰다가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차분하게 KM 전자를 인수하면서 첫째 큰아버지 영향력을 줄이고, 거기에 더해서 자기 체급을 올린 후에 크로스 카운터를 날려버리겠다는 계획을 다시 점검했다.

문득 당장은 자기를 내세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임원회의 전에 말뿐인 와이드 TV 분석이 아니라 과시적인 성과가 필요했다.

머리를 굴리고 또 굴리면서 신문을 세세하게 확인하다가 와이드 TV와 관련된 부분을 떠올렸다.

‘이백만대 와이드 TV 신제품 준비라.’

그는 특히 오성 전관이 이 신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월 생산 능력이 10만대가 넘는 생산 설비 확충의 막바지 단계란 것을 기억했다.

즉시 이와 관련해서 앞으로 생길 참사에 대한 메모를 정리해서 김명준 과장에게 내밀었다.

“이 작업 후에 한영일보에 설문 조사 명분으로 연출해서 정보를 넘기세요.”

“......알겠습니다.”

메모를 읽던 김명준 과장은 새삼 야릇한 최민혁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

“......이건 정말 이상하네요. 도대체 이런 정보를 어떻게 얻은 거죠?”

우영민 과장은 영문을 몰라서 김명준 과장을 쳐다보았다.

“나도 몰라. 실장님이 그냥 그 자리에서 메모만 해서 준 것이니까.”

“이건 오성 전자, LC 전자, 심지어 대운 전자 내부 정보입니다. 실장님 곁에 우리 말고 따로 정보 계통이 있지 않고서야 이렇게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가?”

특히 오성 그룹 계열사로 고작 월 3천 개 와이드 TV 생산 규모인 오성 전관이 생산설비를 확충한 일은 아직 핵심 담당자 외에는 아는 이가 없는 정보였다.

“......솔직히 이젠 나도 모르겠다.”

“역시 비밀이 많은 우리 실장님입니다.”

“그럴지도.”

“흠.”

두 사람은 의아하기는 했지만, 굳이 최민혁에게 따로 질문하지는 않았다.

최민혁 지시대로 설문 조사라는 명분으로 전국 가전 3사 대리점을 돌면서 와이드 TV 문제를 실제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3월에 시판된 LC 전자 대리점 고객의 불만은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았다.

[아니 제품이 좋으면 뭐합니까. 볼 수 있는 컨텐츠가 없잖아요. 돌아다니는 DVD 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줄 압니까. 아니 최소한 CD라도 어떻게 구해주든지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친절하고, 배송이 바른 것이 다가 아닙니다. 제가 고객 처지에서 좀 생각을 해주세요. 이 비싼 TV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차라리 기존 TV가 훨씬 나았어요. 이건 뭐 옆으로 퍼진 것을 떠나서 뒤로 툭 튀어나온 것은 또 뭔지. 아 짜증이 나.]

설문 조사하면서 혹시나 의혹을 받을까 싶었지만, 오히려 어떻게 해서라도 이 황당한 사실을 제발 좀 외부에 알려서 피해자가 없도록 해달라는 부탁만 받았다.

우영민 과장은 우선 한영일보에 이전과는 달리 최민혁 지시대로 우연을 가장해서 제보했다.

한영일보도 이 뜻밖의 제보에 특종이라고 생각했지만 엮여 있는 것이 너무 많아서 망설였다. 지금까지 터트린 특종 때문에 쌓인 앙금을 해결하지 못해서 부담스럽기만 했다.

“이번에는 손실이 제법 클 텐데, 괜찮을까요?”

“다른 대안을 선택해야지.”

결국 한영일보는 차악을 택해서 다른 언론사에도 슬쩍 기사를 흘린 후에 동시에 이 기사를 제대로 터트려 버렸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KM 전자는 와이드 TV 시장의 문제점을 익히 알아보고, 이 분야에는 아무런 투자를 하지 않았다. 신중한 이들의 행동 덕분에 빗발치는 고객 불만의 포화와 미래에 생길 막대한 손실의 늪에서 벗어났다.]

한영일보를 위시해서 한국 언론의 대대적인 이 융단 폭격은 단순히 가전 3사만이 아니라 생각이 없는 담당 공무원을 말을 빙빙 돌려서 간접적으로 비난했다.

대신에 띄운 것은 뜻밖에도 조용히 자기 일만 집중한 KM 전자에 주목했다.

KM 전자에게는 실로 오랜만에 긍정적인 기사였다.

‘딱 좋네. 앞으로 이렇게만 하자.’

***

아무것도 하지 않은 KM 전자 분위기는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임원 회의 분위기 역시 마찬가지다.

최민혁은 최훈열 전무와 조상도 소장이 빠져서 썰렁한 임원회의 처음부터 주목을 받았다.

어지간해서는 타인을 칭찬하지 않는 문형섭 부사장도 훈훈하게 웃었다.

“최 실장, 정말 잘했네. 아, 이런 내가 말을 잘못했군. 자네는 분석만 제대로 했고, 이번에 기사화한 언론을 칭찬해야지. 이번에 한국 언론사가 오성 전자 얼굴을 아주 납작하게 만들었어!”

최민혁 보고서와 기사화가 관련이 있는지는 크게 따지지 않았다.

오영근 사장도 오로지 오성 전자를 비난했다.

“그놈들은 남 잘되는 것을 절대로 못 본다니까. 이번에 정말 뜨거운 맛을 제대로 봤어. 오성 전관 생산 라인 공장 확충도 막바지 단계라고 하던데, 앞으로 어쩔 생각인지.”

수요가 있다면 생산 라인을 바꿀 이유는 없다. 그런데 그 수요가 사라진다면 전부 재고가 된다. 결국, 생산 공정 자체가 완전중지 된다.

결국 생산 라인을 축소하려면 그것도 손실이고, 남은 재고를 정리하면 그것 역시 회사에는 적자가 된다. 거기에 이 사업 덕분에 다른 사업 역시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차라리 생산이 끝났다면 과장 광고로 소비자에게 피해를 전가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몽땅 그 손실을 전부 다 자신이 떠 앉아야 한다.

실제로 대국민 사기극이 진행되면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이는 소비자였다. 저가로 막 팔아치우고 나서 나 몰라라 하면 되니까.

그런데 이런 상황이 다 바뀐 셈이다.

생각만으로도 통쾌한 지 연일 웃기에 바빴다.

하지만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부를 책임진 이일태 이사는 그다지 안색이 좋지 않았고, 멀티미디어 사업부 원종상 전무는 굳은 얼굴이었다.

이 두 사람의 보스 격인 김현우 상무는 바위처럼 굳은 안색으로 최민혁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마 몇 달 전에 임원 회의가 열렸다면 조카 환영식 비슷하게 흘러갔을 테지만 지금은 강적을 상대한 것 마냥 분위기가 딱딱하기만 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이번 일과는 무관합니다. 그저 와이드 TV 리스크만 조사했는데, 갑자기 이런 기사가 터진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KM 전자 임원분을 볼 수 있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오영근 사장과 문형섭 부사장은 부드러운 미소를 한 채 최민혁을 환대했다.

“최 실장 솜씨가 이렇게 대단한지 알았으면 급한 일이 있으면 도움을 청했어야 했어.”

임원 회의가 이렇게 늦어진 것도 따지고 보면 대부분이 최민혁을 무시해서다. 가끔 몇 사람만이 모여서 회의할 때도 최민혁을 의도적으로 뺐던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최민혁이 이렇게까지 실장 자리를 유지할지는 상상도 못했다.

더욱이 최민혁은 최훈열 전무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일어난 사건을 가상하면서 다른 이들 시선을 피해서 불쾌한 표정을 한 김현우 상무를 ‘돼지야, 뭘 봐?’란 의미를 담은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STB 사업부를 재조사한다는 명분으로 들쑤시고 다니는 기획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김현우 상무는 발끈했다.

“만약 오성 전자에서 우리가 한 일을 알면 가만히 있을 거로 생각합니까?”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기획팀에서 한 것은 향후 와이드 TV 시장 공략을 위한 사전 설문 조사를 한 겁니다. 그 와중에 그 정보가 기자에게 흘러들어 가서 이 사태가 생긴 겁니다.”

“우연히 설문 조사하고, 우연히 기자가 그 설문을 얻어서 기사화했다는 사실을 지금 믿으라고 하는 소리입니까?!”

“그 정말 의심 많네요. 기자가 몰래 설문 조사한 것을 보고 기사화한 것까지 우리가 막아야 합니까. 도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

“그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괜히 분란을 자처해서 적을 만들 이유가 있습니까. 오성 전관이 이번 기사 통해서 입은 손실이 얼마인지나 압니까?”

“모르죠. 알 필요도 없고. 차라리 놈들이 뜨거운 맛을 봐서 통쾌하네요. 가만 지금 우리 TV를 공격하는 오성 전자 편을 드는 김 상무님은 이 회사 직원입니까. 아니면 오성 전자 직원입니까?!”

분노한 김현우 상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리쳤다.

“최 실장, 그 정말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 거 아냐. 다른 것을 떠나서 내 장남이 자네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많아. 아버지 같은 나에게 그따위 말버릇은 뭐야?”

씩씩거리는 김현우 상무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도 자기 성격을 이기지 못한 채 최민혁에 대한 반감을 품다가 노골적인 비웃음이 담긴 눈빛을 보자 폭발하고 만 것이었다.

물론 임원 회의 분위기는 사늘했다.

특히 오영근 사장과 문형섭 부사장은 자기 있는 자리에서 나댄 김현우 상무를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더욱이 이 자리에는 입에 가시 같은 최훈열 전무도 없는 상황이었다.

“김 상무,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냐?”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김현우 상무는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아차 해서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사장님, 그게 아니라......”

최민혁이 슬쩍 끼어들어서 사건을 살짝 키웠다.

“그 일은 그렇다고 쳐도 VCR 신제품 곧 나온다고 해서 하는 말인데, 지난달에 대운 그룹은 25억 달러, 오성 전자는 20억 달러를 퍼부어서 동남아 대규모 해외 투자를 진행했습니다. 그 아이템 중의 하나가 VCR인데, 주로 중저가 제품이 나올 겁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임원 회의는 조용해졌다.

그는 피식 웃으면서 다른 이들의 관심을 고조시킨 후에 한 가지를 경고했다.

“저렴한 인건비를 바탕으로 생산량을 늘릴 계획인데, 그중에 국내로 거꾸로 들어오는 제품도 많습니다. VCR이 그 대표적이죠. 과연 이 가격 경쟁에서 이길 수가 있습니까?”

“흥, 성능은 비교가 안 됩니다.”

“그 성능조차 별반 차이가 안 나는 것으로 알아요. 김현우 상무가 독단적으로 밀어붙인 이 사업이 과연 잘 될 것이라 장담합니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오영근 사장을 비롯한 다른 임원 안색은 좋지가 않았다. 세계화 바람을 타고 값싼 인건비를 찾아서 해외 투자를 늘린 기업은 적지 않았다.

특히 10대 기업 대기업은 해외 투자 확대 기회로 삼았다.

최민혁은 임원 회의 분위기가 완전히 자신에게 돌아섰다는 것을 확신하자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STB 연구한다고 벌써 100억 넘게 날려 먹고도 아무런 결과가 없는데, VCR마저 실패한다면 김현우 상무님이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

김현우 상무는 차가운 임원의 시선에 차마 반박하지 못한 채 분노로 이를 으드득 갈았다. 심지어 원종상 전무도 이번 지적에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최 실장, 이 새끼가.’

어금니가 부러지도록 깨물었지만 오 사장과 문 부사장의 차가운 시선에 애만 태웠다. 최훈열 전무가 이 자리에 있다면 저들이 저런 반응을 보일 수조차 없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그 역풍을 맞았다. 아예 노골적으로 자신을 찍어내려고 한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젠장맞을!’

***

최민혁은 임원 회의 통해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실히 드러낸 후에 조성욱 인사팀장을 따로 호출해서 혹시나 있을 문제를 언급했다.

요즘도 TV만 틀면 나오는 최훈열 전무 재판 이야기에 질린 조정욱 인사팀장은 이전과는 사뭇 저 자세로 입을 열었다.

“STB 사업부는......현재까지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굳어 있는 조정욱 인사팀장 모습에 최민혁은 가볍게 협박했다.

“만약 제가 따로 조사해 문제가 나오면 조 팀장이 책임지실 겁니까?”

책임은 곧 구속으로 받아들인 조정욱 인사팀장 안색은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식은땀으로 범벅된 이마를 손을 닦으면서 말을 더듬거렸다.

“아, 아닙니다. 아, 생각해보니, 문제가 있습니다. 일전에 인사팀에서 직원을 상대로 면담할 때 나온 내용이었는데, 그때 넘어간 겁니다.”

협박에 말 바꾼 조정욱 팀장 태도에 태클을 걸지 않았다.

“무슨 문제죠?”

“최근에는 김 상무의 성추행 때문에 말이 나옵니다. 상담할 때 간간히 그런 점을 말하는데......”

“그거야 늘 나온 이야기죠. 가만 그 성추행 당사자가 김현우 상무 비서 오수연씨입니까?”

“......마, 맞습니다.”

오수연이 김현우 상무랑 유럽 출장 가서 호텔에 같이 투숙할 때 강간당한 뻔 했다. 그녀는 한국에 돌아온 후에 인사팀에 이 사실을 알렸다.

당시 인사팀도 이 사건 때문에 난리가 났었지만 흐지부지되었다.

소심하고, 겁이 많은 오수연은 개인적인 일과 직장 문제 때문에 공개적으로 적극 나서지 않았고, 인사팀이 중재에 나서면서 쉬쉬한 채 넘어갔다.

최민혁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김현우 상무 뒤에 있는 최훈열 전무 때문에 제대로 처리를 못 했겠군요.”

“......네.”

결국 조정욱 인사팀장을 압박해서 계속 김현우 상무의 문제점을 들으면서 STB 사업부 프로필을 확인했다.

TV 3사와 경쟁하는 TV 사업부와는 달리 미래 중견 기업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STB 사업부를 없애는 것은 아무리 최민혁이라도 명확한 명분이 없다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예상치 못한 부분을 발견했다.

‘MPEG 표준화에 이름만 올렸다고 알았는데, 아니었나. 직접 논문도 발표하고, 특허 출원도 하고 했구나. 뭐 영양가 없는 특허이지만.’

< #04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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