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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8화 (48/1,021)

< #048 >

그런 생각까지는 해보지 않은 김명준 과장도 안색을 굳히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최문경 부회장이 직접 압력을 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혀를 내둘렀다.

“사람들이 첫째 큰아버지를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는데,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둘째 큰아버지와 달리 큰 약점도 없습니다. 정·재계 영향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지금이야 워낙에 큰 사고를 쳐서 주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상황이 달라질 겁니다. 더욱이......아, 여기까지만 하죠.”

“부 회장님 움직임에 대해서는 제가 따로 조사해보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인원은 더 늘려서라도 전담 인원을 꾸리세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등골이 서늘한 느낌에 이것만으로 부족하다고 확신하자 간단하게 MPEG의 미래에 대해서 몇 가지 정리한 문서를 작성해서 김명준 과장에게 내밀었다.

“장 실장에게 이거 좀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뭘 또 그렇게 궁금한 얼굴로 모른 척합니까. 얼마 전에 했던 이야기에 약간 색을 더해서 덧칠한 겁니다. 읽어 봐도 괜찮아요.”

김명준 과장은 냉큼 낙서하듯이 써 놓은 문서를 읽어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PDP를 넘어선 LCD가 새로운 시대 변화를 이끌어낸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최민혁은 히죽 웃었다.

“그냥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장 실장 실력이 얼마나 좋은 지 한 번 알아보자고요. 만약 1할만 이해해도 재미있어질 겁니다.”

세상 일에 어지간해서 무관심한 김명준 과장도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냥 저에게만 쉽게 말해주면 안 됩니까?”

최민혁은 지금 기술로는 문제가 너무 많은 LCD를 양산할 그 어떤 대안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장 실장이 자신의 뜻을 따르는지 알고 싶었다.

“어허, 천기누설입니다!”

“......알겠습니다.”

요즘 들어서 비밀이 많은 최민혁 태도에도 김명준 과장은 불평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런 일을 어떻게 아는지 그게 더 불가사의했다.

‘본가에 넘어온 후에 내가 지켜본 바로는 딱히 특별하게 공부하는 것도 없었어. 집에서도 그다지 책 보는 것 같지도 않아. 도대체 저런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신문만 보는 것으로 저게 가능한가?’

***

기획 조정실은 한마디로 말해서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데, 감사, 기획을 포함해서 그룹 전체를 담당하는 역할을 한다.

기업마다 저마다 이름이 다르고, 경영자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기획 조정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기업 전략이다. 기호와 가격대를 구분한 모델로 전략적인 우위를 차지해서 포드를 넘어선 GM이 이 중요성을 보여준다.

KM 그룹은 반도체 패키징 분야에 우월적인 직위를 가진 KM 산업이 중심이 되어서 KM 건설, KM 전자를 비롯한 다양한 계열사가 설립되면서 그 덩치를 키워나갔다.

불행히도 아직은 KM 전자, KM 건설을 제외하고는 계열사가 다 고만고만하다.

굳이 막대한 차입금을 이용해서라도 기업 체질을 바꾸려고 시도한 것도 이런 바탕이 깔렸다.

KM 기획 조정실은 그 어느 때보다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는데, 차입금 재검토에 들어가면서 상황은 아주 달라졌다.

심지어 후계 구도를 둘러싼 내부 잡음마저 끊이지 않았는데, 최훈열 전무 구속 사건이 대두하면서 이제 내부 부패 문제마저 터져 나왔다.

이미 손명수 차장이 LC 전자로 이직하면서 불협화음이 터져 나왔는데, 그 와중에 임권수 팀장이 사직서를 내고 오성 전자로 가버렸다.

구길모 과장으로서는 자신과 사이가 안 좋은 두 사람이 그만둬 버리자 한 편으로 시원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기획팀 내에서도 거친 목소리 때문에 이미지가 좋지 않은 천경구 과장이 숨김없이 그대로 불만을 토로했다.

“실장님은 앞으로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곧 차장 진급을 앞에 둔 구길모 과장은 일축했다.

“천 과장, 자네 일이나 잘해.”

“임 팀장님과 손 차장님이 그만둔 것도 최 부회장님과의 대립 때문이라는 것은 기조실에서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천 과장!”

“후유, 아닙니다. 그냥 해본 소리입니다.”

실제로 다른 기조실 직원 역시 굳은 안색을 한 채 있었다. 그들 역시 회사 분위기가 요즘 들어서 더 나빠졌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최 부회장의 노골적인 압력 때문에 기조실 업무 역시 삐걱거렸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런 일 때문에 최 부회장도 독단적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게 최 회장님이 원하는 것이지만 너무 버겁다는 생각이 들어.’

머리가 복잡한 구길모 과장은 갑자기 장 실장의 호출을 받아서 기획 조정 실장실에 갔다가 한 가지 문서를 받았다.

“그걸로 팀 회의 준비해. 지금 하는 일을 다 보류하고, 그 일이 가장 우선이야.”

“알겠습니다.”

구길모 과장은 MPEG 관련해서 간단한 내용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몇 년 전부 검토를 했던 내용이라서 다를 것이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간결하게 정리된 몇 가지 지시안건이다.

[MPEG과 전자 산업의 미래를 조사할 것.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 LCD를 비롯한 다양한 영역을 참조로 해서 기존 보고 안을 재검토할 것.]

기조실 직원 의견도 구길모 과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장승일 실장이 기존에 하던 모든 일을 보류한 채 이 일을 하라는 지시 내용이다.

장승일 실장 성격을 잘 아는 기조실 직원은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과거에 검토했던 자료와 최근 일어난 변화를 토대로 해서 정리했다.

MPEG 관련 기조실 미팅은 평소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달라진 것은 역시 최민혁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에 깨달은 바가 있는 장승일 실장이었다.

“MPEG 활성화에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 디지털인데, 아직은 그 바탕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소리인가?”

구길모 과장에게는 불만을 토로하던 천경구 과장은 그저 눈치만 봤다.

“당장 TV만 해도 아날로그가 대세입니다. 디지털 시대가 열린다고 하지만 그게 몇 년이나 걸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미 최민혁에게서 디지털 변화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는 구길모 과장이 슬쩍 반대했다.

“만약 디지털의 강점이 있다면 디지털 시대 도래는 오히려 단축될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 MPEG 표준화도 더 큰 영향력을 미칠 겁니다. 결국, 이런 움직임이 디지털 시대를 더욱 더 앞당길 수도 있습니다.”

조용했다.

이제까지 막연하게 아날로그와 디지털로 구분해서 사용하던 기조실 직원도 다들 똑똑한 직원이라서 금방 구길모 과장 의견을 이해했다.

물론 천경구 과장이 계속 반박했다.

“너무 막연하지 않을까요. 당장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PDP만 수명이 상대적으로 짧아서 시장에서 사장될 거라고 봅니다. LCD 역시 성능이 아주 나빠서 아날로그와 경쟁하기 힘듭니다. 응답 속도 특성이 너무 나빠서 게임이나 영화에는 무리입니다.”

실제로 오성 전자에서 매년 막대한 투자를 해서 개선하고 있지만 아직은 머나먼 길목에 놓여 있었다.

현실적인 의견이 나오자 기조실 직원도 이번에는 갈등했다.

바로 PDP와 LCD의 근본적인 한계 이야기가 나오자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장승일 실장도 최훈열 전무 구속의 패배란 경험을 당하지 않았다면 최민혁이 보낸 낙서에 가까운 몇 가지 메모를 무시했을 것이다.

지금은 좀 달랐다.

“PDP는 문제가 있지. 하지만 만약 LCD가 기술적인 진보를 이룬다면 어떨까?”

“네?”

“LCD가 상업적으로 성공한다면 그 영향력은 단순히 TV만이 아니라 핸드폰, 카메라, 캠코더와 같은 분야에도 넓어질 거야.”

천경구 과장이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기 실장님, 그건 LCD가 성공한다는 전제 조건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가정이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향후 아날로그는 사장될 거고, 디지털이 주류가 된 거야. 그러면 전자 공학은 CPU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겠지.”

“......가정이 틀렸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가정이 옳다면, 동영상 표준화 그룹인 MPEG의 영향력은 지금과는 차원이 다를 거야. 단순히 이름만 올린 우리와는 달리 원천 기술에 수천억을 퍼부은 오성 전자는 그런 미래를 보고 표준화에 적극 나선 것이겠지.”

“하, 하지만......”

이미 오성 전자에 대한 견제가 들어온 상황에서 그 대응책을 고민하던 장승일 실장은 이 방법도 하나의 수단으로 확신했고, 손을 들어서 천경구 과장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는 힐끗 혼란으로 고민하는 기조실 직원을 살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최 실장님 앞의 내 모습이 저랬던 것 같구나.’

이제는 그도 디지털 시대가 뭔지 알 것 같았지만 아직은 뜬구름 잡는 식이다.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할지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설마 최 실장님은 그 대안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고야 교묘하게 자신을 부추길 수는 없었다.

그 치밀한 심모는 실로 무서웠다.

“다음 주 이 시간에는 기존 광주 반도체 건설 보류 일을 그대로 진행하데, PDP를 시작으로 LCD 대한 재조사부터 우선 진행한다. 그렇게 알고 각자 준비하도록 해. 이번 안건은 단순히 조사에서 끝내지 않을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회의가 끝나자 안 그래도 어수선한 기조실 분위기가 더 혼탁해서 걱정스러운 구길모 과장이 장승일 실장 뒤를 따랐다.

“저기 실장님, 정말 디지털 시대에 대한 전략을 새로 구상하게 되면, 과거 최 부회장님이 KM 전자에서 한 모든 실적을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최 부회장님이랑 부딪치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아니 꼭 그렇게 될 거야.”

“괜찮겠습니까? 지금도 두 분의 사이가 안 좋다고 계속 난리인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

최근 사장단 회의 이야기를 이미 들은 구길모 과장은 한 숨을 내쉬었다.

“저도 최 회장님이 실장님을 그렇게 신뢰하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하지만 두 분이 자꾸 반목하면 좋을 리가 있습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어쩔 수 없네.”

그는 슬쩍 주변 눈치를 보면서 사람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저기 실장님, 그 오성 말입니다. 도대체 왜 그 제안을 거절하신 겁니까?”

“처음부터 생각이 없었어. 뭐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좀 더 확신했을 뿐이야. 자네도 이제 눈치를 챘을 텐데?”

“......설마 최 실장님을 말하는 겁니까?”

“어.”

“오성 전자와 최 실장님을 비교......그런, 마, 말도 안......아, 아닙니다. 저기 실장님, 아무리 그래도 최 실장님은 이제 대학교 1학년생입니다. 알아봐야 얼마나 안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거 말입니까? 이것도 혹시 그냥 인터넷 자료보고 그냥 써 놓은 것이 아닐까요.”

“멀리 가지 말고, 오늘 회의 내용이나 한번 잘 고민해 봐. 자네라면 스스로 깨달을 수 있어. 그래도 모르겠다면 최 실장님에게 한 번 도움을 청하던지. 참, 자네 차장 진급도 다음 주에 있을 거야.”

장승일 실장은 매우 놀란 구길모 과장 어깨를 툭툭 치면서 돌아섰다.

“......스, 승진이라고요?”

지금 시기라면 정기 인사도 아닌 상황에서 이루어진 인사다. 당연히 최 회장의 구체적인 지시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구길모 과장은 당혹스러워서 한동안에 입을 열지 못했다.

‘에이, 모르겠다. 정 안되면 최 실장님에게 전화할 수밖에.’

***

전자시계부터 시작해서 광범위한 전자 제품에 사용되는 TN 패널은 빠른 속도와 저렴한 가격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낮은 색 재현율과 좁은 시야각 때문에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도 이 TN 패널이 상당히 빠르게 기술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최민혁은 이 TN 패널에 대해서 간단히 정리한 키워드를 팩스로 구길모 과장에게 보내줬다.

도움은 딱 여기까지.

김명준 과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정도 자료는 찾아보면 다 나올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겠죠. 하지만 제 의견을 듣고 싶어서 그랬을 겁니다. 그러니 딱 거기만 맞도록 해준 거죠. 그 이상은 없습니다.”

“TN 패널 이야기는 저도 신문에서 본 것 같은데, 그 이상도 있습니까?”

“더 있죠. 그보다는 기조실에서 방향을 틀면 첫째 큰아버지가 만든 KM 전자의 실적이 다 박살 나기 때문에 우리 첫째 큰아버지랑 계속 부딪치게 될 겁니다.”

“설마 둘 사이의 갈등을 더 부추길 생각입니까?”

“이간질한다기 보다는 배가 옳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논쟁을 시킨 거죠. 그래야 배가 산으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네. 혹시 제가 모르는 것이 더 있습니까?”

최민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한 채 툴툴거렸다.

“세상 일을 다 알면 얼마나 재미없습니까. 아는 재미가 있어야죠.”

장난치는 듯한 말투에도 김명준 과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했다.

“잠깐만요. 실장님, 그러면 그 이상의 또 다른 기술도 있다는 말입니까?”

“글쎄요.”

최민혁은 다른 내용과는 달리 구체적으로 언급해주지 않았다. 이미 일본에서 아직 특허로 출원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고, 자신이 특허 등록 후에 말해줄 생각이었다.

이보다는 최훈열 전무 구속 이후에 방심하다가 당할 수도 있어서 조금 더 긴장했고, 기존 TV 사업부 신제품 득템 경험을 살려서 STB 사업부 인력을 철저하게 조사했다.

STB 사업부는 기존 VCR 사업부가 이름이 바뀌면서 확장되었는데, 지금 한창 하반기에 나올 VCR 신제품 양산 때문에 바빴다.

지금까지 돈만 까먹다가 겨우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신제품을 내놓은 것 때문에 사업부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물론 신형 VCR이 얼마나 잘 팔린 지는 좀 다른 문제였다.

‘잘 안 되겠지.’

< #04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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