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7 >
1993년에 최종 발표된 MPEG-1이 VCR과 관련이 있다면, 올해 발표되는 MPEG-2 Audio Part3를 시작으로, 내년에 본격적으로 세부 표준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하는 MPEG-2는 주로 DVD와 연관된다.
STB 사업부에서 이 부분에 투자를 진행하는 것도 전략적인 횡보의 일환이다.
이 부분은 KM 전자만이 아니라 새롭게 검토 중인 KM 모바일 계열사와 관련해서도 기획 조정실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전문적인 분야라서 기조실에서도 아직 의견을 내리지 못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아는 최민혁 태도에 장승일 실장도 신기한 눈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저기 실장님,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그것을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디지털 기기의 장점을 고려하면, 벌써 MPEG-2 오디오 부분 세부 표준화 진행을 통해서 시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파트가 하나씩 나오면, 세상에 큰 변화를 일으킵니다. 결국 3~4년 후면 거대한 변화가 시작될 겁니다.”
익히 다 알려진 사실이고, 짐작하는 기업은 다 아는 내용이다. 다만 그런 변화를 제대로 이용해서 이익을 보려는 기업은 한국 대기업 중에 오성 전자 하나뿐이다.
KM 그룹 역시 나름의 노력하고는 있지만, 그 의미를 잘 몰랐다.
최민혁은 자신이 지금 말한다고 해서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 미국 쪽이 다 먹는 MPEG-2 특허는 참 아쉬워. 당장 지금 내가 노리는 MP3(MPEG-1 Layer-3) 특허만해도 MPEG-2에 비하면 1.5Mbps라는 태생적인 제한 때문에 기업 관심에서 많이 비켜나 있으니까.’
기조실에서 향후 그룹이 핸드폰 사업을 포함한 멀티미디어 사업을 공략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검토하고는 있지만 알아도 그 의미까지 몰랐다.
하지만 그 배경을 잘 몰라도 설득력이 높은 최민혁 주장에 장승일 실장은 짜릿한 전율마저 느꼈다.
“......그, 그러면 결국 지금 하는 연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씀이군요.”
최민혁은 물론 동영상 컨텐츠가 이룩하는 새로운 디지털 혁명 시대에 대한 미래 지식을 대놓고 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알맹이만 다 빼고, 적당히 껍데기만 늘어놓았다.
“저에게 묻지 마시고, 기조실이라면 그 정도는 조사했지 않습니까. 우선 STB 사업부처럼 MPEG부터 추가로 확인해보면 스스로 답을 찾을 겁니다.”
‘하긴 시간이 문제야. 그 동안 계속 까먹는 투자금을 무시할 수는 없어. 확실히 아날로그 STB는 애매해. 만약 디지털 STB 시장이 열린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질 거야.’
“......그렇다고 하죠. 결국 최 실장님은......”
최민혁은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판단하자 굳이 말을 돌리지 않았다.
“일단 STB 사업부를 재검토할 건데, 결과가 나쁘면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빨리 사업부를 정리하는 것이 모두에게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장승일 실장은 굳은 안색으로 소리쳤다.
“설마 김현우 상무를 쳐낼 생각입니까?”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한 채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김 상무를 내쫓겠습니까. 다만 결과가 없다면 상무 직책은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입니다!”
장승일 실장은 아직 최두진 사장과 갈등할 타이밍이 아니라서 이를 악물었다.
“실장님 의견을 저도 공감합니다만 대주주가 김 상무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녹록하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더욱이 최훈열 전무 구속 이후에 지금 그룹 사정도 좋지 않습니다.”
최민혁은 은근히 포기하라는 제안에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만약 최두진 사장 지분을 정리할 수 있다면 가능하겠습니까?”
얼마나 당황했는지 장승일 실장은 말을 더듬거리고 말았다.
“네? 그, 무슨, 가, 가만 , 무, 무슨 수로 말입니까?”
“그 정도 계획도 고민하지 않고, 제가 섣부르게 그런 소리를 하겠습니까. 그건 장승일 실장님도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
“......진심이시군요.”
“그것이 기조실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 될 겁니다. 실장님은 옆에서 지켜보면서 떨어지는 콩고물만 챙기는 것만으로도 KM 그룹을 혁신할 수 있을 겁니다.”
최민혁은 ‘관련 핵심 특허나 산업 방향을 구체적으로 모른다면 의미가 없겠지요.’란 말까지 굳이 하지는 않았다.
“하아.”
그는 이미 최훈열 전무 사태를 지켜보면서 집요한 최민혁 성정을 봤기에 때문에 설득 자체를 포기하고 말았다.
아니 내심 한 편으로 무난하게 김현우 상무를 정리해서 KM 전자에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룹 미래를 위해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최두진 사장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최훈열 전무 구속에 영향을 끼친 최민혁 실장도 가볍게 볼 사람은 아니니까.’
이보다는 최민혁의 해박한 지식에 더 놀랐다.
“저희 기조실에서도 명확하게 앞으로 미래를 예측하지 못했는데, 도대체 이런 사실을 어떻게 추론하고 계시는 겁니까?”
“STB 사업부 자료에 다 나와 있습니다. 다 알려졌는데도 모른다는 의미는 기획 조정실에서 제대로 제 역할을 안 한 겁니다. 아무리 10대 그룹에 못하다고 해도 실망스러운 일이죠.”
“그렇습니까.”
실제로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방대한 자료 중에 딱 핵심만 골라서 이해하는 일이 쉬운 턱이 없어서 ‘차마 그게 말이 됩니까?’란 말까지 굳이 하지는 못했다.
충격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을 설득하기는커녕 오히려 KM 전자 구조 조정 숙제에 충격을 받아서 멍하니 실장실을 떠나가고 말았다.
최민혁은 장승일 실장을 설득하면서 스스로 느낀 몇 가지 사실로 MP3 특허권 획득이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김명준 과장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몇 년 후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떠들썩한 MPEG-2 표준화 때문에 MP3 특허권을 얻는 것이 마냥 비관적이지만은 않겠어. 문제는 폭탄 맞은 첫째 큰아버지가 그동안 조용히 지내야 할 텐데, 일단 한 번 알아봐야겠어.’
***
KM 그룹은 최훈열 전무 구속 이전만 해도 아주 잘 돌아갔다. 부채가 비록 높지만, 회사 자산도 탄탄하고, 수익성도 다른 쓸데없는 대기업에 비해서 나쁘지 않았다.
차입금 이야기만 없다면 최소 10년 정도는 잘 나갈 회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져서 적지 않은 곳에서 KM 그룹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불법 은행 대출과 관련해서 적지 않은 직원이 구속된 서울 은행을 비롯한 KM 그룹과 거래하는 주거래 은행이다.
이들이 갑자기 KM 그룹 전체에 걸쳐서 추가 대출을 중단했다.
결국 KM 건설과 어렵게 타협해서 진행하던 필리핀 투자 건도 은행 대출 거절 때문에 보류되었다.
최문경 부회장도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대출이 안 된다는 거야?!!”
쩌렁쩌렁 울리는 분노 때문에 부회장 비서실 직원도 두려움에 떨었다.
긴장한 권재홍 비서실장도 차마 바로 대답하지 못한 채 최문경 부회장 화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씩씩거리던 최문경 부회장도 겨우 화가 가라앉자 냉수를 마셨다.
“이유가 뭐래?”
“그게......”
“권 실장, 지금 내 얼굴 보고 더 화나게 할 거야?”
“아무래도 최훈열 전무 구속 배후에 부회장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서울 은행 대출 담당자는 억울하게 토사구팽당했다고 생각합니다.”
황당한 이야기에 최문경 부회장 분노가 또다시 폭발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말이 안 되지만 외부에서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야 최훈열 전무 구속 과정이 말이 안 됩니다. 중앙지검과 언론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부회장님입니다.”
“그거야......”
붉게 달아오른 얼굴의 최문경 부회장도 문득 자신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다고 해도 이유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한국에 있는 모든 은행이 배척할 수는 없잖아.”
“그건 아무래도 위에서 압력을 받은 건데, X 리포트에서 언급한 한부철강 때문입니다.”
“하, 지금 내가 X 리포트를 만들어서 퍼트렸다는 소리야?”
“......그게 사실인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리고 긁어서 부스럼을 낸 것 때문에 언짢은 사람이 많아서 그렇게 흘러간 것으로 들었습니다.”
“하.”
최문경 부회장은 숨이 턱하고 막히자 넥타이도 풀고, 양복 상의도 벗어 던졌다. 이제 좀 살 것 같아 문득 한 가지 사실을 퍼뜩 떠올렸다.
“서, 설마 광주 첨단 과학 산업단지에 조성하기로 한 13만 평 반도체 제조 공장 건설도 중단된 것은 아니겠지?”
“......일단 좀 두고 보자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아니 그건 정말 말이 안 되잖아. 사업비만 해도 8천억으로 연간 50억 달러 규모야. 신규 고용 인원만 해도 7천 명이 넘어. 강운태 광주 시장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걸 내버려둘 이유가 없잖아?”
“그게......더 윗선에서 보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해서......죄송합니다.”
이제는 긴장으로 딱딱한 최문경 부회장은 오히려 목소리를 낮추었다.
“설마 광주 반도체 건설 건이 취소라도 되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다만 분위기가 너무 좋지 않으니, 일단 조금만 참아주면, 은행 쪽에도 자신이 알아봐 준다고 했습니다.”
더 화를 참을 수가 없어서 책상을 주먹으로 내린 친 최문경 부회장은 욕설을 퍼부었다.
“개 같은 새끼들!”
권재홍 비서실장이 이번에는 다급하게 반박했다.
“지금 KM 건설에서는 안양과 대전에 사둔 부동산과 땅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그룹 계열사 사정이 안 좋습니다.”
“설마 정부에서 우리 작년 한 해만 천억이 넘는 순이익을 올린 KM 산업을 비롯한 KM 그룹을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부회장님, 진정 좀 하시죠. 지금 그런 극단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최훈열 전무 구속 때문에 일어난 일로 자존심이 상한 사람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분들이 열 받은 것뿐입니다.”
“그놈의 최훈열, 최훈열, 이제 지겨워. 도대체 훈열이 그 새끼는 무슨 짓을 한 거라고 그래? 아 맞아, 그 X맨, 그놈의 정체는 파악했어?”
“......그 이후에는 아예 나타나지 않아서 추적에 실패했습니다.”
“나참.”
울화를 참을 수가 없던 최문경 부회장은 버럭 소리쳤다.
“뭐해, 당장 강 시장에게 연락해서 약속 잡아. 그리고 그 X놈을 어떻게 해서라도 잡아. 그놈의 배후가 누가 있는지 반드시 밝혀!”
“알겠습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몇 가지 보고할 것이 더 있었지만 괜한 말을 했다가 재떨이로 맞을까 싶어서 차마 하지 못했다.
그의 상식으로 이제 대학교 1학년생인 최민혁 실장이 검찰과 언론을 동원해서 최훈열 전무를 매장했다고는 상상 조차할 수가 없었다.
이 소문도 최훈열 전무 구속 때문에 가장 이익을 본 사람을 꼽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소문이라는 것 정도는 파악했던 것이다.
***
최훈열 전무 구속 이후에 일단락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 사건은 언론을 통해서 최소 일주일 두 번 정도는 언급되었다.
법원을 상대로 몰려든 시민이 일치단결해서 제대로 된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 여파는 KM 그룹 전체로 퍼졌다.
KM 건설이 부동산 자산을 전격 단행하면서 구조 조정을 진행한 것이었다.
탄탄한 KM 산업 역시 이 쓰나미에 선제대응하기 위해서 서울 빌딩과 부동산을 대거 내놓았다.
한국의 다른 대기업은 갑작스러운 KM 그룹 구조 조정을 주목했다.
한국 언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KM 그룹은 차라리 이 기회를 이용했다.
[우리 KM 그룹은 이번 기회를 계기 삼아서 환골탈태하겠습니다. 앞으로 건실한 국민 기업으로 거듭나겠습니다.]
불행히도 KM 전자만큼은 이미 중앙지검에 의한 강제적인 구조 조정이 진행된 터라 이 여파에서 살짝 비켜났다.
차입금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한 최민혁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안 좋은데. 차입금에 욕심내도록 손을 써야 할까?’
KM 그룹이 지금부터 차입금을 포기하고, 구조 조정을 통해서 기업 부채를 낮추며, 선제 대응을 한다면 IMF 한파를 견디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혹독한 한파를 이용해서 도약할 수도 있고, 그것은 최문경 부회장의 힘이 지금보다 더 강력해진다는 의미였다.
다른 계열사와는 달리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없는 KM 산업에 대해서는 최민혁도 뾰쪽한 수가 없었다. 유일한 답은 자기 힘을 키워서 체급을 더 키우는 방법뿐이다.
보고하던 김명준 과장은 창백한 최민혁 안색을 보자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에요.”
“제가 보기에는 KM 그룹 차원에서는 바람직합니다.”
결국 최민혁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지만 저에게는 악재입니다.”
“이미 최훈열 전무는 구속된 후라서 급한 일은 끝났습니다.”
“첫째 큰아버지가 남아 있죠. 뭐, 셋째 큰아버지도 있고요.”
“설마 부회장님도 실장님을 공격할 거로 생각합니까?”
“당연하죠. 잘 생각을 해보세요. 왜 최훈열 전무랑 저를 같은 울타리에 넣어둔 건지. 애초에 최훈열 전무를 이용해서 저를 정리하려고 꾸민 사람이 바로 첫째 큰아버지입니다.”
“으음.”
< #04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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