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3화 (43/1,021)

< #043 >

우영민 과장은 먼저 오성 전자 주식 60만주를 다 처분하기가 무섭게 Y 리포트를 은밀하게 한영일보에게 넘기면서 주의사항을 당부했다.

한영일보의 최경진 편집장도 X 보고서와는 달리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오성 전자를 씹는 Y 보고서 때문에 고민했다.

X 맨과의 기존 거래 때문에 이 제보를 포기할 수는 없어서 결국 기사화하기로 결정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오성 전자를 찔러보기로 한 것이다.

의심이 많은 범용구 기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완전히 KM 전자를 저격하는 기사인데, 이제는 최 실장이 정말 관여한 것인지도 의심스럽습니다.”

“하긴 이 정도 기사만으로 KM 전자에 타격주기 쉽지 않을 텐데, 이보다는 오히려 오성 전자를 저격하는 것 같아.”

“설마 최 실장이 광인이 아닌 다음에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거야 모르지.”

최경진 편집장도 한영일보 내에 경제 파트 담당을 불러 자문을 구해봤지만, 영문을 몰랐다.

‘최 실장과 X맨은 정말 다른 놈일까? 이제는 종잡을 수가 없어. 일단 정부 발표안을 지켜보면 답을 알 수 있겠지.’

***

정부 예정대로 55건의 증시 규제 완전 조치가 발표되었다.

발표 시각에는 종합주가지수가 소폭 오르면서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소문만 돌던 신용한도 확대, 위탁증거금의 대용증권과 같은 핵심적인 내용은 이 규제 완화 조치에 다 빠졌다.

그나마 투자신탁회사의 종목 투자 한도가 확대된 내용이 들어가 있었지만 이미 관행적으로 묶여 있던 것이라서 큰 의미는 없었다.

결국 실망한 증권사 중심으로 차익 매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영민 과장은 딱 이 시기에 오성 전자 매수세가 갑자기 사라진 틈을 이용해서 8만 주를 동시에 던졌다.

여러 개의 증권사 통해서 한 번에 쏟아진 이 융단 폭격은 평소라면 오성 전자 주가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은 달랐다.

최민혁이 예상한 대로 한때 오성 전자 주가가 무려 7.4%나 폭락했다.

오성 전자 저가 매수세가 이어지면서 -2.7%까지 반등했지만, 기회만 노리던 여러 증권사에서 너도나도 차익 매물을 정부 엿 먹으라고 막 패대기쳤다.

오성 전자 주가는 단숨에 -6.7%까지 다시 폭락했다가 또다시 개미 매수세로 낙폭을 줄여나갔다.

그리고 온종일 이런 주가 패턴이 반복했다.

그 와중에 KM 전자가 아니라 오성 전자의 시장 파괴 행위에 초점을 맞춘 Y 리포트가 한영일보를 통해서 경제란 메인을 장악했다.

이제 겨우 국내 내수 TV 시장 매출이 점진적으로 늘어나는 시점에 갑자기 오성 전자가 TV 시장 업계를 끼어들어 KM 전자같은 회사에 갑질한 것을 지적했다.

최훈열 전무 구속 악재 때문에 가까스로 버티던 KM 전자 주가는 코스피 폭락 시점에 나온 Y 리포트에 휘청했다.

탄탄한 틈새시장을 꽉 쥐고 있어서 우량한 기업인 KM 전자도 오성 전자와 본격적으로 경쟁한다면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외부 충격에도 3,000원을 굳건하게 지지하던 KM 전자 주가가 단숨에 2,600원으로 미끄러지듯이 흘러내렸다.

기획팀 내에서 유일한 재산 불리기에 관심이 많은 배종대 과장은 오후 장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KM 전자 주가에 경악했다.

그는 와이드 TV에 대한 대응책 미팅 중에 이 뉴스를 털어놓았다.

“우리 회사 주가가 완전히 줄초상 났습니다!”

주식에 관심이 없는 박광민 사원은 고개만 갸웃했다.

“그게 많이 떨어진 건가요?”

“900선이 무너진 것은 올해 들어와서 처음이잖아. 이제까지 잘 나가던 코스피가 갑자기 폭락하면서 우리 회사 주가도 박살 났어.”

그래도 시사 상식에 관심이 있는 정영일 사원이 의견을 내놓았다.

“지금 우리 회사 주가가 계속 최저점을 갱신 중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내려갔어요. 정말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세상 물정을 잘 아는 박상기 차장이 오히려 정영일 사원을 구박했다.

“영일씨는 매사 너무 예민한 게 탈이야. 주가는 오를 때가 있고, 내릴 때가 있는 법이야. 이번 사태도 오래가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배종대 과장 생각은 좀 달랐다.

“박 차장님, 이번 사태는 절대로 평범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코스피가 폭락한 적은 몇 년 안에 없었던 겁니다. 더욱이 우리 회사 주가는 6년 이래로 최저치입니다.”

“우리 주식 대부분은 회장님을 비롯한 대주주가 다 들고 있어. 유통되는 주식 물량도 얼마 안 돼. 지금 주가가 폭락한 것은 그 몇 안 되는 주식이 쏟아진 것 때문이야.”

그랬다.

KM 전자 주식 대부분은 큰 손이 들고 있고, 개인 물량은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처럼 코스피 수급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에서 개인 투매가 나와서 바닥을 기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영일 사원이 반발했다.

“하지만 LC 전자를 비롯한 대형주 대부분은 반등에 성공했지만, 중형주는 바닥을 모르고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아, 그 정말 괜찮대도 그러네.”

그는 팀 분위기가 어수선하자 이정원 과장, 이영란 대리 순으로 질문했는데, 실망스러운 대답만 듣자 그나마 이성을 잃지 않은 정성근 대리를 발견했다.

“오, 정 대리가 있었구나. 정 대리는 이번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정성근 대리는 회의 준비 자료를 확인하면서 잠깐 멈칫했다. 그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야, 정 대리, 뭘 또 그렇게 심각해.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해!”

결국 눈치만 보던 정 대리는 불쑥 자신의 의견을 말해버렸다.

“저가 매수 기회입니다.”

“?”

예상 밖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한 박상기 차장을 대신한 배종대 과장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정 대리, 자세히 말 좀 하자. 뜬금없는 저가 매수 기회는 또 뭐야?”

“이번 3분기 흑자 전환이 확실히 되는 상황에서 주가 반등은 필연입니다. 결국, 지금 일어나는 우리 회사 주가 모습은 외부 충격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주가는 실적을 따라간다?”

“네!”

“하지만 주가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실적도 중요하지만, 미래가치도 무시하기 어려워. 지금 오성 전자에 와이드 TV 때문에 우리 회사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난리인 것도 있어.”

“제 생각으로 와이드 TV 시장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올해는 고작 2만 대에 불과하고, 내년에 40만대라고 예측하지만 그건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단순히 가벼운 농담으로 생각한 팀원도 눈빛을 반짝였다.

“전문가들이 다 하는 이야기인데도?”

“제 생각은 다릅니다. 핵심은 16:9 비율 컨텐츠가 전혀 없고, 심지어 모든 방송이 4:3 비율인 상황입니다. 볼거리가 없는데, 누가 고가의 와이드 TV에 관심 두겠습니까?”

“흠.”

배종대 과장은 또 예상치 못한 반격에 움찔했고, 다른 팀원 역시 다들 감탄했다. 오성 전자 때문에 기획팀도 난리가 났지만, 막상 정말 중요한 것을 간과한 것이었다.

바로 컨텐츠였다.

아무리 기존 4:3 TV와 비교하면 좋아 보여도 장식용으로 200-300만원이라는 거금을 사용할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턱을 쓰다듬으면서 깊이 고민하는 박상기 차장도 탄식했다.

“하, 이거 정 대리 말이 틀린 것도 아냐. 지금도 보면, 정부가 괜히 주가 부양한다고 쓸데없는 쇼 때문에 오늘 코스피가 대폭락했잖아. 이번 와이드 TV도 정부가 과장 광고한 것이 크다고 봐야 해.”

“설마 주가 부양 쇼처럼 와이드 스크린 방송이 시행되는 것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뻥은 아니겠지. 와이드 방송국에 이런저런 일을 하겠지만, 공무원이 컨텐츠를 그냥 막 찍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정성근 대리가 보다 못해서 일축했다.

“오늘 코스피 폭락도 증권이 뭔지도 모르는 행정 관료가 자기 임의대로 칼을 휘두르다가 사고를 친 겁니다. 하물며 와이드 TV 같은 분야를 그들이 알 리가 없고, 컨텐츠의 중요성 자체를 모릅니다.”

“오성은?”

“오성 전자같은 가전 3사는 정부 입김에 자유롭지 못해서 무리하게 진행한 일입니다.”

막힘이 없는 대답에 배종대 과장도 결국 두 손을 들었다.

“결국 와이드 TV 관련된 Y 리포트는 단순 과장에 불과하다?”

“아뇨. 기존 대형 TV 시장에 늘어난 투자는 문제가 될 겁니다. 다만 아직 국내 대형 TV 매출이 이제 막 늘어나는 시점이라서 손실이 더 클 겁니다. 그러니 최소한 올해만큼은 KM 전자는 투자하기 나쁘지 않습니다.”

조성돈 팀장이 뒤늦게 들어왔다가 팀 토의를 듣고 나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확실히 정 대리 말이 일리가 있어.’

덕분에 오성 전자에 대한 대응책을 찾을 수가 없어서 심각하던 회의 분위기는 오히려 밝게 바뀌고 말았다.

***

다음 날에도 KM 전자 주가는 계속 내려가서 2,500원까지 하락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한영일보에게 당한 다른 언론사도 줄지어서 오성 전자를 공격하는 기사인 양 흉내 내면서 정작 만만한 KM 전자를 돌려 쳤다.

결국 2,500원을 유지하던 주가는 2,300원까지 흘러내렸고, 공포에 질린 이들 개인 투매 때문에 2,000원 이하로 떨어졌다.

다행이라면 1,910원을 한 번 찍은 후에 저가 매수세가 들어오면서 2,000원을 다시 회복했다.

하지만 매수세, 매도세가 동시에 실종되면서 KM 전자 주가는 가까스로 2,000원을 지킬 뿐이었다.

배종대 과장도 KM 전자 주가 폭락에 걱정을 드러냈다.

“정 대리, 네 의견에 공감은 하는데, 주가 동호회 가면 온통 KM 전자 주식 욕설로 난리야. 여기 투자한 사람들은 다들 이를 갈아.”

하지만 정성근 대리는 말보다는 무려 3,000만원 가량의 KM 전자 주식 매입서를 보여 주었다. 매입 평단가는 놀랍게도 2,100원가량 되었다.

“정 대리, 너도 주식해?”

“아뇨. 이 경우는 뻔히 수익이 보이는 상황이라서 주식을 샀습니다. 누가 옳은지는 제가 직접 보여 주겠습니다.”

“정말 우리 회사 주식이 오른다고 장담하는구나!”

배종대 과장 목소리를 들은 기획팀원은 우르르 몰려와서 정성근 대리 주식 매입서를 확인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박광민 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이 좀 다른 것 같은데요?”

“아, 자사 주식이라서 혹시 문제가 될까 외가할아버지 명의로 사들였어. 저가 매수를 내부자 거래로 취급받고 싶지 않았어.”

치밀한 대답에 다들 주식 매입서를 돌려보면서 수근 거렸다.

“이거 문제가 되지 않아요?”

“뭐 회사 내부 미공개 정보를 알고 하는 거라면 문제가 되지만 아직 알려진 것은 없잖아. 최훈열 전무 사태는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고.”

다른 직원보다 더 치밀한 정성근 대리 성정을 잘 아는 배종대 과장 표정이 심각해졌다. 정성근 대리는 주식에 투자하지 않는 것으로 알기 때문이다.

옆을 지나가면서 모른 척하던 박상기 차장 안색도 변했다.

뒤늦게 박상기 차장에게 이야기를 들은 조성돈 팀장도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히 주가가 많이 내려가서 저가 매수하기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 문제의 소지가 없을까?’

***

최민혁은 일상적인 월간보고 때문에 실장실을 찾아온 굳은 안색을 한 조성돈 팀장 모습에 또 큰일이 생겼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KM 본사에 무슨 일이라도 터진 겁니까?”

“최훈열 전무 스캔들 때문에 사장단 회의가 일주일에 한 번꼴로 열렸습니다. 그런데 회장님도 그 자리에 나왔다고 합니다.”

건강이 좋지 않다는 정밀 진단을 받고 나서 대부분의 일은 장승일 실장과 최문경 부회장에게 넘긴 후에 두문불출하던 최용욱 회장이 이례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할아버지가요?”

“아무래도 최훈열 전무가 구속되었으니, 그 일 때문일 겁니다.”

최훈열 전무가 구속되면서 KM 전자 내부 분위기는 혼란스러웠다. 일단 최훈열 전무 라인에 해당하는 사람은 비상이 걸렸다. 특히 다른 계열사 쪽에 있던 이들은 계속 모임을 했다.

결국 최훈열 전무가 받기로 했던 주식 지분은 공중에 붕 떠 버렸다.

“시간이 다 해결할 겁니다. 다른 문제가 또 있습니까?”

“오늘 갑자기 사장단 회의가 열린 것은 회사 주가 폭락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 회사 이곳저곳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아, 주가 폭락, 그렇죠. 난리죠. 큰일입니다.”

거의 예상한 주가 폭락이라서 최민혁은 딱히 큰 감흥이 없었다. 그나마 있다고 한다면 KM 전자가 목표한 2,000원에 도달해서 신이 났다. 그렇다고 조성돈 팀장 앞에서 자사 주식 폭락 기념 춤을 출 수는 없었다.

근엄한 표정 관리는 필수였다.

“......”

전혀 흔들림이 보이지 않는 최민혁 모습에 조성근 팀장은 놀라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이렇게 큰 난리 속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은 고승 같은 모습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 사태를 뒤에서 꾸민 음모론자인 최민혁은 무안해서 재빨리 주제를 돌렸다.

“흠흠. 다른 일은 없죠?”

“그게 말입니다. 으음, 허튼소리는 안 하는 정 대리 이야기로 이번 기회가 우리 회사 주식 저가 매수 기회란 소리를 해서요.”

최민혁은 갑자기 내부자거래라는 것을 떠올렸고,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칫하면 신제품을 이용한 지분 매입도 문제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직원의 자사주 매입을 막을 단호한 방법이 필요했고, 단순하게 몇 마디로 하기보다는 좀 더 충격적인 방법을 고민하다가 뒤늦게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내부자 거래라, 으음, 이 시기에, 아, 맞아, 로인트 전기의 친족 내부자 거래 사건이 있구나.’

< #04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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