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8 >
“아, 그리고 이 사실을 부회장님에게도 따로 보고를 드렸습니다.”
아직 이성을 완전히 잃지 않아서 최문경 부회장 이야기가 나오자 화들짝 놀랐다.
“혀, 형이 안다고?”
“도움을 받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도 그룹 승계를 노리는 후계자답게 법무팀의 에이스 한 사람을 떠올렸다.
“가만 그러면 혹시 그룹 안현수 법무팀장을 부른 거야?”
“이번 사안은 안 팀장님으로도 부족합니다. 최악도 대비를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다른 한 분을 초빙했습니다.”
그는 차마 최민혁 실장이 자신의 충고에 따를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굳이 그 사실을 말해서 최훈열 전무를 자극하지 않았다.
‘사실 정말 걱정은 걱정이야.’
“누군데?”
마침 비서가 두 사람을 데리고 나타났다. 한 사람은 날카로운 눈매의 안현수 법무팀장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눈에 익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전무실 안에서 갑자기 들리는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입구에 서 있었기에 전무실 안에서 일어난 일을 어느 정도 들었다.
나이가 든 이는 놀라운 시선으로 초췌한 최훈열 전무와 무덤덤한 장승일 실장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미 지난 만남에서 소송 사기 증거까지 가져와서 중재해달라고 할 때부터 수완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네. 생각보다 더 무서운 친구야.’
새치가 가득하지만 실상 오십 대 중반에 불과한 한 사람이 최훈열 전무에게 먼저 다가갔다.
“최 전무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혹시 남수현 동부지검장님?”
“기부 모임에서 간단하게 인사만 했는데, 기억하시는군요.”
“그럼요. 제가 남 지검장님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의원님은 잘 지내시죠?”
“물론입니다. 아, 그리고 작년에 지검장을 그만두고 지금은 변호사로 있습니다.”
“오!”
이제까지 스트레스로 다 죽어가던 최훈열 전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남수현 변호사 양손을 잡은 채 인사했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진 동아줄.
이제 검찰 소환 따위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전 동부지검장 출신 변호사라면 아무리 중앙지검이라도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새삼 놀라운 눈으로 장승일 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설사 돈이 있어도 다른 의뢰 예약이 잔뜩 밀려 있는 남수현 변호사에게 의뢰를 주기가 쉽지가 않았다.
뒤늦게야 이 일이 안현수 법무팀장이 힘을 써 준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의 손을 잡았다.
“안 팀장, 정말 고맙네. 내가 이 일은 절대로 잊지 않겠네.”
“회사 법무팀장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장 실장님이 다 처리했습니다.”
겉으로는 편하게 대답하지만, 안현수 팀장 눈빛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는 다시 장승민 실장에게 후다닥 다가가서 검찰 수사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들자 그를 껴안았다.
“맙소사 역시 장 실장이었어. 정말 고마워. 내 이 은혜는 절대로 있지 않겠어!”
어정쩡한 장승일 실장만이 보기와는 달리 뜻밖에 고지식한 면이 있는 안현수 법무팀장 모습에 최용욱 회장에게 어떻게 보고를 해야 할 지 고민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임권수 기조실 팀장도 사직서를 냈는데, 안 팀장마저 그만두면 정말 걱정이다.’
***
“흠, 전관이라.”
최민혁은 김명준 과장이 전해온 정보를 들으면서 딱히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대응을 이미 예상했기 때문이다.
‘비자금과 방만한 그룹 경영으로 KM 그룹을 날려 먹고도 나빼고 당시에 실형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지. 그것 역시 장승일 실장의 작품이겠지.’
오히려 김명준 과장이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봤다.
“어떻게 할까요?”
“생각 좀 해보고요. 가만 그런데 누구라고요?”
“안현수 그룹 법무팀장이 자기 선배로 데려온 사람인데, 전 동부지검장 출신 남수현 변호사입니다. 변호사로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아, 남수현 변호사. 모를 수가 없죠. 그 작자가 날 유혹해서 책임을 모두 지라고 했는데, 혓바닥을 정말 뱀같이 굴리는 사람이니까.’
“몸값이 가장 뜨거울 때네요. 변호사 선임 비용도 제법 들었겠습니다.”
“워낙에 의뢰 요청이 많다는 것을 고려하면 돈이 문제가 아닐 겁니다.”
“그렇겠죠. 우리 박 부장검사가 아무래도 좀 밀리겠는데요?”
“박두영 부장검사 직속상관인 김종도 차장검사보다 세 기수가 높다고 합니다. 물론 김종도 차장검사 성격상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어이가 없었겠지만, 최민혁 말이라서 이제는 혹시나 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혹시 짐작 가는 바라도 있습니까?”
“일단 장 실장이 둘 사이에 딜을 봤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야 그 바쁜 남수현 변호사가 이 사건을 맡을 리가 없죠.”
“......장 실장님이 전관을 따로 보조할 정도로 그렇게 대단합니까?”
“이 사건을 잘못 해결하면, 검찰과 KM 그룹이 척을 질 수가 있어요. 그것까지 다 고려해서 일 처리할 겁니다. 둘이 웃으면서 깔끔하게 사건을 정리하는 거죠.”
무력이라면 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김명준 과장도 그런 일을 만들 수는 없었다.
“아니 어떻게 말입니까?”
“저야 모르죠. 그리고 장 실장의 수완이 오죽 좋으면 할아버지가 모든 전권을 다 주겠습니까. 그건 다 그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게 사실이었습니까?”
“한 번 알아보세요. 아마 장 실장 뒤를 파헤쳐보면 깜짝 놀랄 겁니다. 제가 오죽하면 이 사건에 시간을 들여서 차분하게 밀겠습니까. 그거 둘째 큰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다 장 실장 때문인 겁니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한국 법치 체계가 돌아가는 거 보면 딱 답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일에 적극 끼어들지 않으려고 했던 거죠.”
최민혁은 둘째 큰아버지가 재판에 집중하다 보면, 결국 KM 전자 일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 기회를 이용해서 지분을 다 정리해서 기반을 다지려고 했었다.
그런데 TV 연구소에서 신제품이 나오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수천억 차익을 볼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코스피는 곧 상승장이 멈추고, 하락장으로 바뀔 시기라서 국내 주식으로 돈 벌기도 어려워. 거기에 수백억 이상의 돈을 굴리는 것도 간단하지 않고.’
“그러면 이대로 포기하시는 겁니까?”
“아뇨. 남자가 칼을 뽑았는데, 이대로 칼집에 넣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장 실장에게 이미 약속을 했지 않습니까?”
“전 제가 직접 관여 안 하다고 약속 했습니다. 하지만 김 과장님이 저 몰래 작업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일테면 지금은 밑에 직원에게 작업 지시를 내리는 거죠.”
“그러면 제가 어떤 작업 지시를 내리면 됩니까?”
“최훈열 전무 검찰 소환 날짜와 시간을 언론사에 알리는 겁니다.”
“아.”
“지금은 연구소장이 여러 가지 혐의로 구속된 상황이니, ‘배임, 횡령, 분식 회계, 최훈열 전무 공모.’란 메모만 더 추가하면 좋겠죠.”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하시는 겁니까. 그냥 사전에 미리 처리했다면 큰 문제가 없었을 것 같은데......”
“그 당시에는 이 정도인지 몰랐습니다. 거기에 만약 최 전무가 혼자 검찰에 출두하면 그게 뉴스거리가 될까요? 절대로 안 됩니다. 지금처럼 여론이 최악이 된 경우라면 특종이 되고, 여론에도 큰 영향을 주죠.”
‘그리고 제가 경험해봐서 아는 데, 시간은 최훈열 전무에게도 독이 되어서 서서히 그를 갉아먹을 겁니다.’란 말까지 굳이 하지 않았다.
김명준 과장도 이제 최민혁을 많이 겪어 봐서인지 넌지시 질문했다.
“실장님이 여기서 끝내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게 부족하면 더할 수도 있습니다. 언론사를 믿을 수가 없으니, 저희도 다른 대안을 연구하죠.”
“어떤 대안 말입니까?”
“그게 말이죠. 이렇게 한번 해보죠.”
김명준 과장은 묵묵히 듣기만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감탄과 놀람을 금치 못했다.
“......알겠습니다. 자꾸 질문해서 죄송합니다만 그 사실은 도대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중앙지검을 비롯한 검찰 권력 기관에 관한 심층 기사에서 봤습니다. 건물 사진을 보고, 저 위치가 딱 전체 건물 조망할 수 있었으니까요.”
“......신문에 참 많은 것이 나옵니다.”
최민혁은 히죽 웃으면서 앞으로도 신문 타령하면 충분하겠다고 생각했다.
“참 앞으로 뉴욕타임지, 뉴스위크지 비롯한 다른 해외 신문도 모두 구해주세요. 오 비서에게 이야기하면 될 겁니다.”
“원문 그대로 말입니까?”
“그럼요.”
그는 또 질문하면 신문 보고 다른 나라 언어를 익혔다는 소리 들을까 질문하지 않았다.
“......네.”
최민혁은 문득 이 사태가 막바지에 왔다는 것을 떠올리면서 다시 고민했다.
‘최훈열 전무 구속 이후를 생각해야겠군. KM 전자 주가가 최소한 2,300원, 아니 2,500원대까지는 무너지면 좋을 텐데, 그러면 경영권 프리미엄까지 포함해도 900억이 넘는 사채업자 지분은 300억 안팎이면 다 사들일 수 있어. 안 내놓으면 내놓게 해야겠지만.’
그랬다.
최민혁은 지금 최훈열 전무 구속에는 관심 없었다. 이보다는 이 기회를 최대한 이용해서 사채업자 KM 전자 지분을 헐값에 매입하고, 김현우 상무를 비롯해서 회사에 도움이 안 되는 임원을 다 처리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신제품을 이용해서 TV 사업부를 다시 부각하고, TV 사업부를 다시 몇 배로 펑 튀겨서 팔면 로또 대박이라는 사실에 입맛을 다시면서 한 회사를 떠올렸다.
‘날 귀찮게 하는 놈에게 가장 비싸게 TV 사업부를 팔아 치워야지.’
***
오후 3시라도 서울중앙지검 맞은편 건물 옥상은 바람이 꽤 불었다.
두 사람은 캐논 카메라에 600mm 망원 렌즈를 결합해서 강력부 박두영 부장검사실 창문을 향한 채 초점을 맞추었다.
“그거 빌려온 비싼 방송용 카메라입니다!”
“알았다니까!”
건물 중간에서 약간 왼편에 있는 1,200호 창문 사이로 박두영 부장검사와 다른 검사, 수사관이 모여서 회의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보는 듯한 화질에 문영식은 꽤 만족했고, 옆에서 같은 카메라로 회의실을 지켜보는 우영민을 보면서 혀를 찼다.
“꼭 여기까지 오셔야 했습니까?”
“재미있잖아.”
“정말 증권 브로커하던 분이 맞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자네는 특임대 출신이 맞아?”
“저 무시하는 겁니까?”
“설마 우리 경호원님을 어떻게 함부로 보겠어. 쓴소리 말고, 여기 일에나 집중해.”
망원 카메라 렌즈를 이리저리 옮기던 문영식은 힐끗 중앙지검 입구 근처 한구석에 숨어 있는 기자들을 쳐다보았다.
벌써 소식 듣고 나타나서 중무장하고 있었다.
“신기합니다.”
강력부 소속 검사의 회의 모습이 너무 선명하게 나와서 분위기를 열심히 살피면서 집중하던 우영민이 툴툴거렸다.
“뭐가?”
“도대체 최민혁 실장님은 이런 장소를 어떻게 안 것일까요?”
그도 흠칫했다. 확실히 지시받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는데, 막상 이곳에 와보니 카메라 위치가 너무도 공교로웠다.
“여기 오지 않았다면 절대로 알 수가 없는 위치입니다.”
하지만 이미 X 보고서 원안을 떠올린 우영민은 비밀은 많은 최민혁 실장이라고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그냥 그런가 해.”
“그렇습니까?”
“그래, 왔다!”
***
최훈열 전무는 중앙지검 앞에서 내려서 남수현 변호사, 이재상 비서를 앞세우고 느긋한 걸음으로 중앙지검 안으로 걸어갔다.
그 와중에 갑자기 나타난 기자 무리에 화들짝 놀랐지만, 경호원 도움을 얻어서 가까스로 빠져나오면서 버럭 소리쳤다.
“아니 기자들이 어떻게 안 거야?!”
“죄송합니다.”
최근 혼란스러운 일 때문에 당혹감을 느낀 이재상 비서는 고개를 숙이기만 했다. 다행히 중앙지검 안에서 수사관이 미리 나와서 기다렸다.
최훈열 전무는 여전히 한 사람을 찾았다.
“자기 일은 이제 다 했으니, 이 자리에는 필요 없다는 소리는 또 뭐야. 아니 나 혼자 달랑 이렇게 중앙지검에 보내면 어떻게 해. 이 비서, 장 실장은 아직도 전화 안 받아?”
“아직 안 됩니다.”
“하, 장 실장이 옆에 있어야 불안하지 않은 데......”
이재상 비서는 질투 때문에 화가 났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미 정신 한쪽이 무너진 최훈열 전무는 뜻밖에도 장승일 실장을 계속 찾았다.
남수현 변호사도 전무실 안에서 들었던 광경을 상상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그가 아는 최훈열 전무는 결코 우울증 환자처럼 장승일 실장을 찾을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승일 실장 소문은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대단한 친구 같아. 설마 최 전무같은 사람을 이렇게 만들 수 있다니.’
“지금은 굳이 장 실장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저기 기자는 운 좋게 정보를 얻었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검찰 소환에 대한 답변입니다. 저만 믿고 묵비권을 행사하시면 됩니다. 제가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변호사님만 믿습니다.”
여전히 불안한 최훈열 전무는 눈동자만 도르르 굴리면서 핸드폰만 쳐다보았다. 딱 자신이 한 일만 끝내놓고, 물러난 장승일 실장은 여전히 전화하지 않았다.
***
강력부 내부 부장실 모습은 언론의 분위기와는 달리 그다지 험악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두영 부장검사만 그 분위기가 못마땅한 지 수사관과 검사를 질책했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 #038 > 끝
ⓒ SSDH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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