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5 >
“결국 회사 사정이 나아지면서 지금부터는 회사 흑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일단 회사 악재를 견제해서 이익이 늘어나기 때문에 주가는 곧바로 회복할 거야. 회사 차원에서는 이익이지. 다만 차입금이 늦어지는 만큼 최문경 부회장의 지난 경영 결과는 반대로 주목을 받게 될 거야.”
“정말 그렇게 될까요?”
“어.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은 자기 과실을 덮으려고 일을 벌일 거야. 아마 이것 때문에 한동안 정신이 없을 거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혹시라도 그룹에 해가 끼칠 수 있는 일을 감시하는 거야.”
“......네.”
도대체 X 리포트가 어떻게 최문경 부회장 문제로 이어지는지 신기한 구길모 과장은 목소리를 한없이 낮추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사태를 만든 자들은 왜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요? 그리고 누구일까요?”
“나도 모르지.”
하지만 그의 내심은 좀 달랐다. 이 독특한 X 리포트 문건 밑바닥에 흐름을 쓸 수 있는 사람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외부인은 아니고, 내부인 소행이야. 특히 KM 전자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고, 뛰어난 통찰력이 있어야 해. 그런 사람은 내가 알기로 세 명 정도로 우선 우영민 그 친구를 들 수 있겠지.’
우영민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같이 일했던 뛰어난 인재를 하나둘씩 기억했다.
‘최병문 상무님이 공을 들여서 스카우트한 인재들이었는데, 하필이면 부회장이 돈줄을 잘라서 다 쫓아버렸으니.’
최병문 상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장승일 실장은 가슴이 아팠다. KM 그룹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가 그였기 때문이다.
그다음으로 떠올린 사람은 우영민과는 달리 회사를 떠난 이다.
‘황광수 그 친구는 결국 오성 전자로 이직했으니, 잘 되었다고 봐야 하나. 지금은 그 친구가 이런 사태를 만들 이유는 없지.’
마지막은 현재 여전히 KM 전자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역시 지금 당장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조성돈 팀장 하나뿐이지. 조 팀장 성격에 이런 일을 벌일까? 거기에 X 리포트 다른 부분은 그가 썼다고 하기도 힘들어. 이 모든 일을 꾸밀 사람은 역시 최 실장님뿐이겠지? 그런데 정말 최 실장님이 이 문건을 만든 것일까?’
최민혁 실장이 도대체 무슨 재주로 이런 결과를 도출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증권가 찌라시로 평가절하했지만 그 본질은 달랐으니까.
그는 책상 한쪽에 놓아둔 최민혁 파일철을 꺼내서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읽었지만,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구길모 과장에게도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고민했다.
‘최민혁 실장님이 설마 이제까지 자기 능력을 숨기고 있었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어. TV 시장 전체 매출액이 작년보다 15% 가까이 증가하면서 작년과는 상황이 달라져서 이제는 오성 전자도 서서히 대형 TV 시장에 투자를 늘리려고 하니까. 최 전무의 실책이 너무 뼈아팠어. 어쩌면 너무 늦었는지도 모르지. 거기에 지금은 회장님도 TV 사업부 매각을 허용하지 않을 거야. ’
***
최민혁은 몽촌토성 산책로를 걸으면서 한선일보 일면을 보다가 한참 동안 웃기만 했다.
뒤를 따르던 김명준 과장이 어이가 없어서 최민혁에게 주의를 시켰다.
“저기 실장님, 사람들이 다 쳐다봅니다.”
“아, 미안해요.”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지금 웃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KM 전자 사장실도 난리가 났지만, KM 그룹 본사에는 계열사 사장이 몰려가서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대주주도 있겠죠?”
“물론입니다. 특히 김현우 상무가 오 사장님, 문 부사장님과 같이 직접 본사 기조실을 찾아갔습니다.”
‘후후후, 아무래도 우리 사채업자 씨(?)도 걱정이 많이 되나 보구나. 이제 쓸쓸 작업 들어가야 하겠어.’
최민혁에게 이번 일은 단순히 최훈열 전무를 구속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지금 사태를 최대한 이용해서 KM 전자 주가를 폭락시킬 생각이었다.
‘계획대로 되면 좋을 텐데, 최문경 부회장마저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는 할아버지 때문에 이 일이 쉽지는 않을 거야.’
“잘 되었네요.”
최민혁 내심을 모르는 김명준 과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네? 실장님, 도대체 회사 내에 무슨 일이 있는지 다들 걱정하는 소리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전 그 문건 하나가 이렇게 큰 사태를 만들지는 몰랐습니다.”
사실 헐값에 KM 전자 지분을 사들이고, 고가에 TV 사업부를 매각해서 지분 가치를 최대한 끌어올려서 수천억 차익을 볼 계획을 김명준 과장에게도 말할 수는 없었다.
“며칠 안 갈 겁니다.”
“네?”
“우리 회사 매출 특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크게 걱정 안 합니다. 다만 우리 첫째 큰아버지는 좀 타격이 클 겁니다. 차입금 끌어오기 위해서 여기저기 로비를 했는데, 그 사람들이 전부 다 뿔났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기름칠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데, 그게 어디 하루 이틀에 될 일입니까?”
“그게 또 그렇게 됩니까?”
“네. 특히 한부철강은 권력 실세와도 엮여 있는데, 설사 모르고 했다고 해도 칼침을 찔렀지 않습니까. 이번에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을 겁니다. 그거 수습하려면 우리 첫째 큰아버지는 매사 하는 일마다 정부 압력을 견뎌야 합니다. 그거 무마하려면 당분간 외부에 시선을 못 돌리겠지요. 적어도 1년은 아무것도 못 합니다.”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 그러면 수정된 보고서를 모르고 만든 겁니까?”
“그거야 우영민 그 친구가 알아서 작업했고, 제가 그쪽은 잘 몰라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틀려도 상관없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아, 그 최종 보고서를 작업한 우영민씨를 탓하는 게 아닙니다. 차라리 잘한 거죠.”
뒤늦게 우영민 통해서 한부철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김명준 과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우영민 그 친구는 과거 펀드 매니저 하면서 대기업과 마찰이 많았습니다. 특히 한부철강을 비롯해서 보고서에 언급된 기업을 상대로 X 리포트같은 글을 쓰기 위해서 몇 년 동안 대기업을 분석해서 내막을 잘 압니다. 그런데 실장님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아신 겁니까?”
“신문에 보면 다 나옵니다. 제가 직접 찾아서 보여줄까요?”
“또 신문입니까?”
“네. 김 과장님도 매일 신문을 읽으면서 상식을 좀 키우세요. 자꾸 생각하셔야지, 사건을 능동적으로 처리하는 겁니다. 앞으로 주먹만 휘두를 생각 말고, 공부해서 비서실장으로 전직하셔야죠.”
“......네.”
괜히 질문했다고 느낀 김명준 과장은 앞으로 쓸데없는 질문을 자제하기로 했다. 말만 하면 신문 타령하는데, 자기 무능을 내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수심이 가득한 김명준 과장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었다.
“이제 쓸쓸 수확 시즌입니다. 우리는 이 일의 마무리에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최 전무 구속 말씀이군요.”
“네!”
“지금까지 나온 형량만 해도 구속 요건이 성립되지 않습니까?”
“한 예를 들면 박경진 재무팀장을 희생양 삼아서 다 뒤집어씌울 거고, 거기에 전관도 투입할 것이며, 판사에게도 압력 넣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구속될 거라 자신하세요? 불구속 재판으로 끌고 가면, 박경진 재무팀장이 했던 모든 일을 전부 다 증거 자료로 채택해서 재판을 질질 끌고 갈 겁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요?”
“우리 장 실장님이라면 그렇게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분도 할아버지 뜻을 따라야 하므로 최선을 다할 겁니다.”
“으음.”
“끝날 때까지 끝나게 아닙니다.”
“그렇군요.”
김명준 과장도 새삼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것에 혀를 내둘렀다.
‘칼을 안 들어서 그렇지 피가 튀는 전장보다 더 무섭네.’
산책로 교차로에서 마침 약속한 사람이 보이자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
최민혁은 몽촌토성 산책로 주변을 느긋하게 걸으면서 보고서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교차로에서 묵묵히 걷기만 하던 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최민혁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바로 박두영 부장검사였다.
최민혁은 서로 남인 양 앞만 보면서 ‘충격 KM 전자의 6,000억 차입금의 비밀!’이 헤드라인으로 나온 신문을 들고 있는 박두영 부장검사를 힐끗 봤다.
‘받지도 않는 차입금을 마치 다 받은 것처럼 오두방정을 떠는 기사라니. 저 기사를 봤다면 굳이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겠군.’
잔디가 펼쳐져 있는 몽촌토성은 평일이라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전 영화에서 비밀리에 사람이 만날 때 왜 공원을 이용 하나 했는데, 주변 사람 동선이 훤히 보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 예민한 시기라는 점을 분명히 말했는데, 왜 갑자기 무리하게 만나자고 한 겁니까?”
최민혁은 잔뜩 굳어 있는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씩 웃었다.
“그래서 만나자고 한 겁니다.”
“최 전무 수사라면 잘 진행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망설이던 박두영 부장검사는 넌지시 한 가지를 질문했다.
“그 X 보고서 말입니다. 혹시 최 실장님이 관련된 겁니까?”
“설마 제가 그렇게 뛰어난 천재라고 생각합니까?”
“그게 좀 그렇죠. 우리 중앙지검 증권 담당 검사 이야기로는 대학교 1학년이 이 보고서를 쓰는 것을 믿을 바에는 차라리 초등학생이 고등 수학을 공부하는 것을 믿으라고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정말 관계가 없는 겁니까? 아, 뭐 다른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는 호기심 때문입니다.”
“제가 설사 천재라고 해도 경험치가 듬뿍 담긴 그런 보고서를 못 씁니다.”
“흠.”
사실 검사 직업답게 할 말은 많았지만 여기서 더 할 수는 없었다.
미래의 다른 사건을 떠올리면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주제를 바꾸었다.
“그보다는 검찰 소환 일정이 또 일주일 연기된 것으로 아는데, 이게 중앙지검에서 흔한 일입니까. 이런 사태가 일어나는데, 정말 확신합니까?”
사실 이번 최 전무의 검찰 소환 연기는 김종도 차장검사의 갑작스러운 부탁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서 당혹스러웠던 박두영 부장검사는 다급하게 둘러댔다.
“별일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리 최 전무라고 해도 범죄 행위가 명백하게 드러난 상황입니다. 심지어 증거 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커서 구속이 불가피합니다.”
자신이 넘치는 박두영 부장검사를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만약 영장전담 판사가 구속영장을 기각시키면 어떻게 할 겁니까?”
“네?”
박두영 부장검사도 처음에는 최민혁이 농담하나 싶었는데, 막상 압력받은 영장전담 판사가 눈 딱 감고 사고 쳤다고 가정했다.
‘더욱이 지금 사건은 언론에서도 단 한 줄도 나가지 않고 있어.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오성 전자라면 모르지만, KM 그룹이 과연 그 정도 힘이 있을까?’
“어렵지만 못할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차선책을 미리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부정적인 질문 하려다가 최민혁의 무서운 심계를 경험했기에 태도를 바꾸었다.
“만약 영장전담 부장판사에게 압력 넣을 정도의 힘이 있다면 저도 대안이 없습니다.”
“실망입니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최민혁을 째려봤다.
“도대체 한국 법원과 검찰을 뭐로 보는지 모르겠지만, 사태가 그 정도까지는 안 갈 겁니다!”
“그건 모르는 겁니다. 전관에게 의뢰해서 사전에 압력을 넣는 방법도 있습니다. 더욱이 비자금 관련된 인맥 동원해서 판사에게 압력 넣을 수도 있습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두고 보기로 했다.
“좋습니다. 그렇다고 하죠. 도대체 그 대안이 뭡니까?”
“일단 서울 은행 지점장을 시작으로 해서 KM 전자 안산 공장과 협력 업체에서 배임이나 횡령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차례대로 하나씩 단 하나의 예외 없이 모두 구속하는 겁니다. 그들이라면 구속 영장이 쉽게 발부될 거니, 문제가 없죠.”
아무리 검사라도 죄의 무게에 따라서 구속과 불구속을 나눈다. 죄가 있는 모든 피고인을 모조리 잡아넣지는 않았다.
“진짜 집요하십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네. 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언론을 통해서 사건을 좀 더 키우는 겁니다. 물론 최훈열 전무는 슬쩍 빼고, 다른 사람을 위주로 해서 말이죠. 그것까지 압력을 넣어서 방해하지는 않을 겁니다.”
처음에는 황당하게 생각한 이야기가 점점 그럴듯해 보이자 수긍했다.
“그렇게 여론몰이를 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최 전무 영장을 치자는 말이군요.”
“여론몰이도 제대로 해야겠죠. 그러면 여론을 크게 의식하는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설사 외부 압력받았다고 해도 자의적인 판결을 내리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랬다가 진짜 옷을 벗어야 하니까요.”
“으음.”
마치 미래에 일이 일어난 것처럼 단호하게 말하는 최민혁 말에 박두영 부장검사도 결국 농담으로 받아들인 태도를 바꾸어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나쁠 것은 없어. 쓸데없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손을 써 두는 것이니까. 좀 무리한 수사라고 비난받아도 최 전무를 구속한다면 큰 문제가 안 돼. 만약 최 전무 구속이 실패하면 내가 큰 타격을 입어.’
“......설마 법조계 경험이 있는 겁니까?”
“그냥 법에 관심이 있다고 해두죠. 제 의견이 어떻습니까?”
“으음, 가능할 겁니다. 판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여론이니까. 가만 이전에는 꼭 최 전무를 구속할 생각까지는 안 했지 않습니까?”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박두영 부장검사도 최민혁에게 끌려다니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칼을 뽑은 이상 최훈열 전무를 끝장낼 수밖에 없었다.
“으음, 좋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 #035 > 끝
ⓒ SSDHD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