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4 >
힘찬 박수 소리에 상기된 최경진 편집장은 이번에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지만 말이야. 이번 기사를 내리라고 한 이유가 몇몇 기업이지, KM 그룹 기사는 아냐. 즉 KM 그룹, 아니 KM 전자에 관한 후속 기사를 찾으면 되는 거야.”
눈치 빠른 범용구 기자가 슬쩍 손을 들었다.
“서울 은행, KM 전자 본사, KM 전자 안산 공장, 심지어 대림 전자를 비롯한 협력 업체에 관한 압수수색 기사는 어떨까요?”
“엠바고 때문에 힘들 거야.”
“제 말은 굳이 엠바고가 걸리지 않는 부분을 노리자는 겁니다. 핵심은 서울 은행과 KM 전자 사이에 오고 간 사건만 빼고 나머지 최훈열 전무 기사만 해도 특종입니다.”
다른 이들 때문에 말을 빙빙 돌렸지만, 정확히는 비자금 때문에 엠바고가 걸렸다. 따라서 비자금 관여 부분만 빼면 된다.
‘아마 이번에 물 타기 해서 다른 이슈로 비자금 이슈를 덮어버리면 완벽하게 비자금 문제를 지울 수가 있어서 그들이 더 좋아할 거야.’
“......그거 괜찮은데?”
한창 한우를 뜯어먹던 한영일보 직원은 다들 흥분에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이번 사건 통해서 주목을 받아서 욕망이 끊어 오르는 범용구 기자가 한 가지를 더 지적했다.
“그리고 굳이 서울 은행과 KM 전자 간의 불법 대출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건 배열만 잘만 해도 사람은 이번 차입금과 연결해서 생각할 겁니다.”
이번 X 리포트 사태 때문에 한영일보 내에서도 일약 주목을 받은 최경진 편집장은 짜릿한 자극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카아, 좋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다들 들었지? 그게 바로 진실을 위해서 싸우는 진정한 언론이 가야 할 길이야!”
정확히는 광고비를 더 뜯어낼 수 있는 수단이고, 기자 각자에게는 인센티브 동기였다. 그것을 싫어할 기자가 소수 있기는 했지만 거의 대다수는 열광했다.
“네!”
“좋아, 오늘은 죽을 때 까지 마시자. 다만 내일부터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거야. 이번에도 제대로 한 번 작품 만들어 보자!!”
“와아아!”
***
갑작스러운 X 보고서 때문에 여러 곳에서 전화를 받은 장승일 실장은 안현수 팀장 소개로 그의 고향 선배이자 동부지검장 출신인 남수현 변호사를 만나서 최훈열 전무 의뢰에 관한 이야기를 한창 나누다가 KM 그룹 본사 자기 사무실로 다급하게 돌아왔다.
만약을 위해서 최민혁 마약 사건에 대한 보험으로 이미 작업해놓은 김종도 차장검사 처남 정보로 상대를 어느 정도 설득해놓았다.
남수현 변호사도 굳이 장승일 실장이 중앙지검과 갈등하기보다는 타협하겠다는 의지를 높이 보아서 이번 의뢰를 맡기로 했다.
일단 한 가지 일을 마무리한 터라 안도하기는 했지만, 실장실에서 X 보고서, 또는 X 리포트라고 불리는 기사를 꼼꼼하게 읽었다.
술주정뱅이처럼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최문경 부회장이 비서의 제지를 무릎 쓴 채 안으로 들어와서 소리쳤다.
“장 실장, 도대체 당신은 기조실 실장이란 사람이 하는 게 뭐야?!!”
당황한 비서를 손짓으로 물러나게 한 후에 장승일 실장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보고서를 내려놓으면서 깍지를 꼈다.
“일단 최 부회장님이 관심이 있는 최민혁 실장님에 대해서 조사하고......”
“아, 그건 됐어.”
“하지만 부회장님이 이미 몇 번이나 강조했던 부분이라서......”
“내가 지금 지시 내릴 테니, 민혁 그놈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 지금 조카 뒤치다꺼리할 시간이 없잖아!”
‘그럴 것 같더라. 심증만 놓고 보면 딱 최 실장님이 이 사태를 만든 것처럼 보이는데, 정말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쓴 것일까?’
“알겠습니다. 지금 남수현 변호사를 만나서 최훈열 전무에 대한 의뢰를 맡겼습니다. 소환 날짜는 다시 뒤로 연기했고, 남수현 변호사 통해서 김종도 차장검사에게 직접 압력을 넣었습니다. 권명수 영장전담 부장판사에 대해서 알아보는 중입니다.”
“그래서? 결과가 뭔데?!”
“자세한 말을 이 자리에서 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만 말하자면 김종도 차장검사 처남이 7년 전에 소송 사기에 가담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공문서 조작인데, 김종도 차장검사 부인도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최문경 부회장도 눈빛 하나 깜짝하지 않는 장승일 실장 기백에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 그게 훈열 녀석 검찰 소환에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야?”
“이미 저희 제보 덕분에 검찰에서도 내사 중인데, 그들도 당시 관련 서류가 다 파기되어서 증거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희는 그 증거를 찾고 있습니다.”
굳이 당시 허위 조작한 공문서 서류를 이미 구했다는 이야기를 최문경 부회장에게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공문서위조를 통한 소송 사기는 법원을 등 처먹는 일이라서 그 처벌이 가볍지 않습니다. 아무리 김종도 차장검사가 깨끗하다고 스스로 우겨도 이 일로 잡음이 생기면 부담을 느낄 겁니다. 뭐 증거가 발견되면, 아마 불명예스럽게 옷을 벗어야 할지도 모르죠.”
“흠흠.”
섬뜩한 기운을 느낀 최문경 부회장도 흥분했던 감정을 가까스로 가라앉히면서 그제야 기조실 소파에 앉은 채 입을 다물었다.
아니 언제 그런 사실까지 다 조사했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가만 민혁이 마약 사건이 문제가 되면 손을 쓰려고 사전에 준비를 해왔구나. 장 실장, 이 새끼는 진짜 조심해야 하겠어.’
장승일 실장은 다시 X 리포트를 확인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 수준 높은 증권 찌라시 아닙니까. 지금 부회장님처럼 너무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이들 의도입니다.”
그는 다시 흥분해서 버럭 소리쳤다.
“오늘 주가가 얼마나 내려갔는지 알면서도 그런 소리가 나와?!”
묵묵히 듣기만 하던 장승일 실장은 잠깐 말을 주춤하는 틈에 끼어들면서 불쑥 말했다.
“부회장님은 우리 그룹에 대해서 그렇게 자신 없습니까?”
“무슨 소리야. 당신 정말 답답한 소리 하네. 아니 우리 계열사 주가를 확인해 봐. 그러면 분위기가 어떤 지 알 것 아냐?!”
“우리 그룹 수익 구조는 일반적인 대기업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충성도 높은 소비자를 바탕으로 매출이 탄탄합니다. 어지간해서는 매출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는 대신에 시장 규모는 협소하죠. 그래서 오성 전자와 같은 다른 대기업이 쉽게 치고 들어오지 못하는 거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무리 회사가 망한다고 헛소리해도 지금 우리 그룹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즉 큰 외부 충격이 아니고서는 주가가 곧 다시 제자리를 찾아갈 겁니다.”
‘차입금만 받지 않는다면.’이란 말까지 해서 굳이 상대를 자극하지 않았다.
“으음.”
분노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던 최문경 부회장은 냉정한 장승일 실장 설명에 움찔하다가 힐끗 뒤에 서 있는 권재홍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차가운 성정만 놓고 보면 장승일 실장보다 더한 권재홍 비서실장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장승일 실장과 의견이 다르지 않았다.
‘젠장맞을.’
뒤늦게 이성을 차리자 KM 그룹 매출 현황을 떠올리고 나서야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깨달은 최문경 부회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장승일 실장이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이 여유 돈이 있다면 KM 그룹 주식을 저가로 사들여서 자기 지분을 늘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사실 한영일보를 비롯한 이번 기사로 재미를 본 언론사에게 소송을 걸 것이 아니라,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다고 인제 와서 ‘알았어!’같은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당신은 그룹을 관리하는 컨트롤 타워를 책임진 사람이잖아. 마땅히 이 일이 생기는 것을 알지는 못해도 대비를 해야 할 것 아냐!”
때마침 구길모 과장이 안으로 들어와서 서류를 장승일 실장에게 내밀었다.
장승일 실장은 그 보고서를 느긋하게 확인하면서 최문경 부회장 억지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서류에 인상을 찡그렸다.
“계속하십시오.”
“좋아. 장 실장이 바쁜 것은 알겠어. 그래도 이번 일을 저지른 놈을 찾아서 처리를 해야 할 것 아냐. 정 안되면 한영일보 상대로 법적인 조처를 하던지, 뭔가 액션을 취해야......”
서류를 슬그머니 덮는 것을 보자 다시 말을 바꾸었다.
“그게 뭐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장 실장 너 설마 이번 일의 주동자를 찾을 거야?!”
“그게 확인 끝나면 보고 올리겠습니다.”
“야, 장 실장, 너 정말 이럴 거야?!!”
장승일 실장은 잠깐 고민하는 척하더니 결국 파일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그 서류 안에는 용의자로 보이는 인물의 스케치가 있었다. 그런데 검은색으로 온통 다 가리고 있었고, 심지어 옷 때문에 체격조차 알 수가 없었다.
드러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게 무슨......”
“이자를 만난 한영일보 범영구 기자가 내놓은 스케치입니다. 사전에 흥신소 직원을 고용해서 추적을 시켰는데, 결국 실패했다고 합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하는데, 다 의도한 거라고 봐야 할 겁니다. 아마 다음부터는 이런 식으로 나오지도 않겠죠.”
한영일보에서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란 최민혁 기사를 내보냈을 때 이미 만나서 그쪽을 주시한 것까지 알 수 없는 최문경 부회장은 기가 막힐 정도로 빠른 일 처리에 질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니 도대체 언제 이런 조사까지 한 거야?’
“......그게 무슨 뜻인가?”
“과시이자 경고일 겁니다.”
“경고라니?”
“이번 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이 그 대상일 겁니다.”
“설마 나를 노린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을까요?”
“도대체 내게 어떤 놈이 원한이 있다고, 이런 짓을 하는 거......”
잔뜩 눈살을 찌푸린 최문경 부회장은 당장 십여 명의 인물을 떠올렸다. 허들을 좀 더 낮추면 그 숫자가 삼십 명을 훌쩍 넘어갔다.
“빌어먹을!”
대충 감을 잡은 최문경 부회장은 결국 장승일 실장을 잠깐 쳐다보다가 사과하고 말았다.
“장 실장, 미안해. 내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자네에게 함부로 한 것 같아.”
“아닙니다.”
태연하다 못해서 일상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지 않은 장승일 실장이었다. 사람이라면 저럴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절로 떠오른다.
차라리 화를 내던지.
소름 끼친 장승일 실장 행동에 잠깐 쳐다보던 최문경 부회장은 결국 사무실을 나섰다.
‘정말 재수 없는 새끼야.’
***
최문경 부회장이 나간 후에도 각 계열사 사장뿐만 아니라 그룹 본사의 임원이 하나씩 나타나서 지금 상황을 확인했다.
심한 경우에는 몇 명이 한 번에 몰려와서 화재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압권이라면 KM 전자의 김현우 상무가 오 사장, 문 부사장과 같이 나타나서 큰소리쳤다.
“장 실장님,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장승일 실장은 최문경 부회장에게 했던 것처럼 간단명료하게 그들을 설득했다. 마치 일상적인 일처럼 논리정연하게 설명했다.
“아, KM 전자 압수수색 대응 때문에 기조실에서 곧 KM 전자 본사로 사람을 파견할 겁니다.”
“......네.”
찔린 것이 많은 김현우 상무는 이후에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찾아온 대주주를 상대로 지금 회사에서 일어나는 알기 쉽게 설명해서 그들을 안심시켰다.
“장 실장, 미안해. 증권가 찌라시가 도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데, 우리가 너무 호들갑을 떨었어.”
이 일이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오후 4시간 넘어갈 무렵에는 더 찾아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겨우 숨을 돌린 구길모 과장은 잠깐 망설이다가 장승일 실장에게 질문했다.
“실장님,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지금 본사 사무실은 난리입니다. 다들 주가 폭락만 보고 일에 집중 못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호들갑을 떨어야 한다는 소리야?”
“그런 말이 아닙니다. 실장님은 이 일이 마치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입니다. 솔직히 이 일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됩니다.”
장승일을 잠깐 침묵한 채 힐끗 구길모 과장을 쳐다보았다.
“구 과장, 자 한 번 생각해보자. 이번 일이 과연 회사를 위기로 만들까?”
“그것은 아니지만, 회사 평판에는 악영향을 줍니다. 그러면 회사 매출도 영향받습니다.”
“평판부터 먼저 따져 보자. 우리 회사는 지금 이대로라면 10대 대기업으로 성장도 불가능하지만 독특한 고객 충성도 때문에 절대로 안 망해. 그러니 매출에 영향을 받고 말고가 없어.”
“그거야......”
구길모 과장은 기조실 과장답게 각 계열사에 올라온 수익 현황을 떠올리면서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차입금, 특히 대규모 차입금에 따른 이자 부담은 지속해서 우리 회사 수익성을 악화시키는 악재야. 그런데 X 리포트는 바로 우리 회사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려서 차입금을 받을 수 없도록 이미지를 대중에 심어 뒀어. 그렇다면 우리 회사 미래는 어떻게 될까?”
“......설마 X 리포트가 우리 회사에 호재라는 말씀입니까?”
“논리적으로 그렇잖아. 한영일보를 비롯한 언론사가 선동질해서 지금은 한때 혼란을 경험한 것뿐이야. 그리고 이런 일은 많은 기업도 다 경험하는 일이기도 해. 다른 의견 있어?”
“하지만......”
“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X 리포트는 결국 최문경 부회장 경영에 제동을 걸었어.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이 된 후에 우리 그룹 경영 실적은 어때? 매년 계속 까먹기만 했지. 여기에 당장 재정경제원 관료가 전화로 이 사태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했어. 명분을 얻었으니, 이제부터는 작년처럼 하지 못해.”
< #03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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