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1 >
최문경 부회장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떠올린 사실은 조성돈 팀장이 뜻밖에 최훈열 사장 체제하에서도 악착같이 버텼다는 점이다.
꿈에서 최민수가 한 말 중에는 꼰대라고 조성돈 팀장을 비하했던 부분이 많았다. 즉 조성돈 팀장은 순순히 최훈열 사장 체계를 따르지 않았다.
‘사실 그 정보가 다인 것 같지만, 신제품처럼 밑바닥에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정보가 있어. 조성돈 팀장이 직장인으로 불법을 저지르지 않았을 테니, 최훈열 전무와 심하게 대립했을 거야. 다만 워낙에 처신을 잘하니, 잘라버리기도 쉽지 않았겠지.’
그런데 이 일이 가능해지려면 조성돈 팀장은 차입금을 결사반대해야 하고, 심지어 배임이 될 죄를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 회사가 대규모 차입금을 받게 되면, 그 돈을 부회장이 마음대로 끌어 쓸 겁니다. 그러면 회사 적자와 차입금 이자 부담이 가속화되어서 큰 타격을 입게 되겠죠. 그 정도는 예상하시죠?”
기업이 부채로 자금을 끌어올 때 상황부담이 존재하는데, 현금 흐름 상태가 좋지 못하면 재무 상태가 크게 악화한다.
“그게 좀......”
“일반적인 방법이라면 자산 매각, 부채 재조정과 같은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건 맞습니다.”
그런데 저 차입금 문제는 최용욱 회장의 지시 하에 이루어진 일이다. 계열사 기획팀장이 나설 자리가 아니었다.
그는 사실 어떻게 해서라도 버티다가 정 안 되면 감옥 갈 바에는 차라리 회사를 그만둘 생각마저 했다.
‘아니면 이직하든지.’
“제가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금융기관으로 대규모 차입은 생각보다 장점이 많습니다. 다수의 소규모 투자자를 배제해서 더 빠르게 회사 사정을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했는데, 오히려 원금 상환부담이 더 비중이 큰 경우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꼼꼼하게 따지고 들어오는 최민혁의 기백에 숨이 막혀서 조성돈 팀장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저기 실장님 말씀은 잘 알겠지만 이미 그룹 차원에서 결정 난 일입니다. 제가 지금 나서서 제 의견을 말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대화가 좀 이어지자 최민혁은 밝은 눈빛으로 쳐다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게손가락을 일자로 세운 채 흔들면서 시선을 끌었다.
“만약 결정난 기획안을 바꿀 수 있다면요?”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그제야 은근한 목소리로 그를 설득했다.
“아뇨. 팀장님만 도와준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지금 하는 일이 진짜 회사를 위하는 길이고, 조 팀장님도 무난하게 이 회사에서 정년퇴직하는 길입니다.”
최민혁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자 신제품 개발과 관련해서 스스로 느낀 한계를 토로했다.
“압니다. 제가 조 팀장님을 무리하게 밀어붙일 생각은 없습니다.”
‘협박당하는 것 같습니다.’란 말이 혀 밑까지 올라왔지만, 꿀꺽 삼켰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솔직히 KM 전자에 대해서 구석구석 잘 몰라서 차입금으로 말미암은 후폭풍에 대한 예측 보고서를 만들 수 없습니다.”
“설마 저보고 차입금 이후에 상황을 예측하는 새로운 보고서를 만들어달라는 말씀입니까?”
최민혁은 잔뜩 긴장한 조성돈 팀장을 안심시켜 주었다.
“비슷하지만 좀 다릅니다. 잘 아시겠지만, 최종상 교수도 대학교수이기에 KM 그룹에 대해서 속속들이 파헤치지는 못했습니다.”
“그 한계 때문에 기조실에서도 결국 참고만 했죠.”
“그런데 그 보고서를 기반으로 조 팀장님이 새롭게 만든 보고서라면 KM 그룹에게는 큰 타격을 줄 겁니다.”
“안 됩니다!”
최민혁은 식은땀마저 흘리는 조성돈 팀장 일축에 자신의 추론이 맞았다고 확신했다.
“아, 물론 우리 할아버지가 보고 기절할만한 그런 보고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최종상 교수 보고서보다는 좀 더 구체적이면서 틈을 많이 만듭니다. 신뢰성이 떨어지고, 낮은 정확성의 요약 보고서면 됩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는 그제야 슬그머니 한 가지를 더 부언했다.
“무리한 차입금에 대한 의심과 더불어서 정관계 로비가 아니라면 힘든 점을 지적하는 겁니다. 다른 때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만약 이번 사건과 같이 터트리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두 가지 사실은 실제 관계가 없어서 크게 비화할 소지는 없다. 그런데 지금처럼 KM 전자가 압수 수색당하는 시점에는 수습하기 쉽지 않다.
“설마 이 보고서와 은행 대출커미션 사건, 재무팀과 안산 공장 횡령 사건을 같이 엮어 버릴 생각입니까?”
“빙고.”
최민혁은 지금쯤이면 압수 수색 결과 때문에 외부에서 걸려온 압력을 즐기며 구속 영장 발부를 고민하고 있는 박두영 부장검사를 떠올리면서 피식 웃었다.
‘실장님, 지금도 심각한 그 사건을 여기서 더 키워서 어쩌려고 그럴 생각입니까?’란 말을 차마 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그 사건만 집중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아마 기조실에서 전관까지 이용해서 최훈열 전무 재판을 불구속 요건으로 만들고, 질질 끌어서 결국 흐지부지 만들 겁니다.”
실제로 KM 전자 파산에 대한 처벌 문제 때문에 최훈열 전무는 검찰에서 수사를 받았지만 집행 유예로 끝났다.
‘이번에는 나 대신 다른 대리인을 희생양으로 삼겠지. 일테면 박경진 재무팀장이 딱 좋지.’
최민혁이 굳이 결과를 알기 때문에 굳이 스스로 나서서 가짜 보고서 작업을 병행한 것이다.
“......”
조성돈 팀장도 최민혁이 꾸미는 계획의 의미를 알아듣자 이제는 처음처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최민혁 입에서 대답을 듣고 싶었다.
“도대체 그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차입금이 어렵게 만드는 거고, 두 번째는 우리 부회장님도 이 문제를 처리한다고 똥오줌 못 가리게 하는 겁니다. 아마 계약 문제를 비롯한 뒷수습한다고 지금 하는 업무조차 제대로 못 하게 될 겁니다.”
“그건 KM 그룹을 공격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이런 아직도 이해를 못 하시는 군요. 지금 저희 KM 그룹이 몰락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텐데요. 차라리 엔진을 고장 내서 멈추게 하는 것이 KM 그룹이 살 길입니다.”
극단적인 주장에도 조성돈 팀장은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자칫 잘못되면, 저나 실장님도 다칠 겁니다.”
“네. 저도 압니다. 제대로 된 보고서를 터트리면 오히려 팀장님도 다치고, 문제가 생각보다 복잡해진다는 거요. 지금 제힘으로도 감당이 안 됩니다. 그러니 모 대학 교수가 만든 보고서 흉내를 내는 거죠. 재정이 어려운 언론사를 이용하면 우리가 그 보고서를 만들었다는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면 한 1년은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우물쭈물하던 조성돈 팀장도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지만, 차라리 최민혁 계획이 오히려 무대책인 자신보다 났다고 생각했다.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지금 봐서는 1년 동안 힘을 키워서 부회장님도 그룹에서 밀어낼 생각이신 것 같은데, 차라리 타협하는 것은 어떨까요?”
“아무것도 안 해도 경영 승계에 광기마저 보이는 첫째 큰아버지는 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가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그분을 끌어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강력한 최민혁의 압박에 조성돈 팀장은 큰 충격을 받고 나서는 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고, 최민혁 제안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최 실장님이 이렇게까지 각오했었다니.’
최민혁은 가까스로 설득한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조 팀장도 보고서 작성 후에 TV 사업부는 매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을 거야. 그러면 조 팀장이 사업부 구조 조정을 진행할 테니까.’
***
정성근 대리 때문에 팀 분위기가 꼬이자 팀 회식이 갑작스럽게 결정되었다.
박상기 차장은 자기 자리 정리를 끝내면서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는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팀장님, 안 가십니까?”
조성돈 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은 좀 힘들 것 같습니다.”
박상기 차장은 슬그머니 모니터 화면을 쳐다보면서 툴툴거렸다.
“요즘 와서 너무 비밀이 많은 것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뭐 민감한 문제 같아서 더 이상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본사도 압수수색 들어오고, 안산 공장은 벌집처럼 시끄럽습니다. 회사는 정말 괜찮겠습니까?”
그는 최민혁이 지시한 보고서 개요의 여파를 떠올리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별일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옆에서 보는 저는 걱정이 많이 됩니다. 문 부사장님도 돌아가는 상황을 몰라서 헤매는 중인데, 실장님은 침묵만 하십니다. 그리고 팀장님은 갑자기 일한다고 회식까지 빠지고요.”
“이해를 해주세요.”
회사 생활에 잔뼈가 굵은 박상기 차장이 뭔가 있다는 것을 모르지 깨달았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나중에 다 말해주실 거죠?”
“그럼요.”
“알겠습니다. 회식은 제가 알아서 다 처리할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도 충격적인 최민혁 지시를 받고서야 정성근 대리도 뭔가 말 못한 복잡한 일에 엮여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 그리고 정 대리는 그만 괴롭히세요. 본인도 아마 실장님 지시를 받고 그러는 것일 테니까.”
“알고 있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하나씩 인사하면서 회식 장소로 떠나는 팀원을 보다가 다시 모니터 화면을 향했다. 그는 다른 사람과 달리 KM 전자에도 빠삭하고, 최종상 교수 보고서의 허점에 대해서 잘 알았다.
따라서 최민혁이 요구한 그럴듯한 보고서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다지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다만 워낙에 다급한 일정이라서 아내의 잔소리를 떠올리면서 한숨이 나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이번 주말을 꼬박 새워야겠네.’
***
기업 재무 상태를 분석하기 위한 수단으로 널리 이용되는 수단은 재무비율이다. 여기에는 자기자본비율을 비롯한 유동비율, 고정비율, 부채비율 등과 같은 종류가 있다.
기존 데이터를 가지고 기업을 새롭게 분석하는 일이라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다행히 이 비율이 수치가 틀려도 상관이 없고, 적당히 합리적이기만 하면 된다면 굳이 꼼꼼하게 확인할 필요는 없다.
조성돈 팀장은 기존 보고서와 작년에 분석한 데이터를 활용해서 짜깁기하면서 생각보다는 간단하게 작업이 진행되는 것에 안도했다.
금요일, 토요일 바짝 쪼고, 일요일에 오후가 되자 마무리했다.
보고서는 대충 만들어졌지만, 그의 25년 직장 경험이 녹아 있어서 최종상 교수 보고서보다 수준이 훨씬 높았다.
‘괜찮은데, 아니 아주 좋아. 그런데 이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그는 재무비율 수치를 확인하면서 안색을 굳히고 말았다. 대충 좋게좋게 만들었는데, 부채비율이 최악에 1,200%가 넘었다.
자신이 정리한 지표대로라면 3년 안에 KM 전자가 도산할 확률이 70%를 넘었고, 4년이 지나면 80%, 그리고 5년에는 95% 이상이다.
즉 5년 안에 KM 전자는 파산한다. 참고 자료로 넣어 놓은 다른 계열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건설과 같은 분야는 산업 특성상 똑같이 적용할 수 없다고 해도 역시 나빴다.
‘이건 아닌데......’
하지만 그가 가장 크게 걱정한 것은 바로 TV 사업부의 몰락이다. 디지털 TV 시대는 3년 후를 시작으로 4년 차에 자리 잡는다고 봤다.
차입금을 통한 수익 창출이 되지 않으면 과도한 이자 비용이 회사 숨통을 조인다.
즉 이때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디지털 TV에는 아예 손도 되지 못하고, 1년 후에는 오성 전자나 LC 전자에 잡아먹힌다.
차입금 비용과 미래 먹거리를 따라잡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오면 KM 전자는 200% 도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넉넉한 여유를 줘서 신뢰성을 떨어트린 보고서가 이 정도였으니, 아마 제대로 된 보고서라면 더 최악의 수치가 나올 것이다.
‘설마 최 실장님이 의도적으로 이런 회사 미래를 보라고 이 보고서를 만들라고 한 건가?’
그의 머릿속은 온갖 복잡한 상념으로 가득 차서 잠깐 쉬었다가 다시 수정 작업을 진행해서 디지털 TV 부분을 도려냈다.
‘......그래. 이게 딱 좋아. 솔직히 디지털 TV 세상이 언제 올지 모르잖아.’
***
KM 전자는 압수수색이 있었지만 의외로 그룹 기조부가 나서서 해결한다는 입소문만 있을 뿐이고,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조용했다. 재무팀을 제외한 다른 KM 전자 본사 임직원은 월요일 출근하면서 지난 압수수색을 안주 삼아서 떠들었다.
하지만 마치 좀비 같은 조성돈 팀장은 넋을 잃은 채 자기 자리에 앉아서 꺼진 모니터만 쳐다보았다.
박상기 차장이 조 팀장 모닝커피 서비스까지 해주면서 툴툴거렸다.
“괜찮으세요?”
대답이 없었다.
“조 팀장님?”
역시 조성돈 팀장은 마치 모니터 유령이라도 보는 것처럼 넋을 잃고 있었다.
결국 조성돈 팀장 어깨를 흔들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조 팀장님,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정확히는 조성돈 팀장이 보고서를 만들고 난 후에 걱정 때문에 일요일 내내 제대로 쉬지 못한 것 때문이다.
그 역시 가짜 보고서라고 내심 위안으로 삼았다. 막상 보고서를 끝내고 난 후에 보고서 방향성이 가리키는 회사의 미래 때문에 충격에 빠졌다.
그 어떤 변화를 주더라도 KM 전자 파산은 정해진 운명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최민혁 실장의 주장은 다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우리 KM 전자만 이런 것도 아니잖아. 더 심각한 회사도 많아. 그런데 최 실장님은 이런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예측한 것일까?’
< #031 > 끝
ⓒ SSDH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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