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0 >
“이 새끼는 처자식까지 있는 놈이 그러고 싶을까. 더욱이 괄괄한 제수가 알면 살아남기도 어려울 텐데, 가만 설마 차입금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겠지?”
“......연관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안 그래도 찜찜해서 알아볼까 하다가 혹시 최훈열을 자극할까 싶어 모른 척하려고 한 최문경 부회장은 펄쩍 뛰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그게 지금 중앙지검에서 불법 은행 대출 때문에 최 전무님을 수사 중입니다.”
“그것과 차입금이 무슨 관계......아, 설마 언론에서 안 거야?”
“아직은 아닙니다. 다행히 우리 쪽뿐만 아니라 다른 쪽에서 사전에 손을 써 놔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문제는 이번 사건 담당 박두영 부장검사 직속상관이 김종도 차장검사라서 일이 좀 복잡합니다.”
“김종도라면......중앙지검의 그 꼴통 새끼 말하는 거야?”
“네.”
“하. 더럽게 꼬였네.”
그는 딱 듣는 순간에 상황이 어떻게 엮였는지 금방 깨달았다.
‘가만 그러면 더 이상하잖아. 비자금에 엮인 자들이 보통이 아니잖아. 중앙지검이라도 해도 손쓰기 어려울 거고, 그러면 둘째 그놈을 엮을 방법이 없을 텐데?’
마치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듯이 장 실장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 불법 은행 대출이 KM 전자 자금과 엮여 있는데, 이게 좀 문제가 있습니다.”
그도 뒤늦게 욕심 많은 둘째가 그 돈 중에 일부를 KM 전자 해외 무역 통해서 먹었다는 것을 깨닫고, 혀를 찼다.
“배임과 횡령이군.”
배임은 어떻게 보면 고용주에게 손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지만 횡령은 남의 공금을 가로채서 이익을 얻는 것을 말한다.
오너가 KM 전자 자산을 마음대로 관리해서 손해를 입히면 곧 배임이고, 그 돈으로 불법으로 이익을 얻으면 횡령이다.
하물며 그 돈이 불법 대출받은 자금이라면 더 논할 것도 없다.
“수출입 관련 외환 범죄도 해당하겠어. 가만 둘째의 욕심이라면 그게 다가 아닐 텐데?”
“그것 외에 분식 회계도 일부 포함됩니다. 이것까지 검찰에서 직접 들여다보고 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시골 아저씨 같은 자세를 취한 최문경 부회장은 자기 이마를 쳤다.
“비자금 부분만 배제하더라도 둘째 상황이 골치가 아프겠어.”
“네.”
이야기하면서 장 실장도 머리가 아팠다. 최훈열 전무 일을 본격적으로 처리하기 전에 KM 그룹 이곳저곳에 사전에 문제가 없도록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현수 그룹 법무팀장이 필요해서 왔군.”
“네. 그리고 필요하다면 안 팀장님 인맥을 통해서 다른 분에게도 도움을 청할 생각입니다.”
“일이 안 풀릴까 봐 그런 거야?”
“네.”
“그런데 좀 이상하네. 둘째가 무능하기는 해도 그렇게 문제를 만들지 않을 텐데, 설마 이 일에 민혁 그놈이 관련된 거야?”
“그게 좀......”
“설마 둘째 그놈이 민혁에게 당한 거야?”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도 못 한 대답에 최문경 부회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아버지 압력을 피할 수단으로 최민혁을 실장에 앉힌 것은 최훈열 전무의 상대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갈등을 부추기다 보면, 젊은 최민혁이 크게 사고를 쳤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면 손도 안 대고, 둘째를 정리할 수 있어. 민혁 그놈은 적당히 한직에 처박아 두면 딱 맞잖아. 클럽 마약 혐의가 딱 좋았는데, 운 좋게 빠져나갔어. 그런데 설마 조카에게 당한 것은 아니겠지?’
“솔직히 말 해봐.”
“그게 사실은......”
장승일 실장도 개인적으로 최민혁 실장이 잘한다고 생각했다. 굳이 최민혁에 대해서 말하기가 곤란해서 슬쩍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데 갑자기 구길모 과장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와서 한 가지 소식을 듣자 깜짝 놀랐다.
“저, 정말 중앙지검에서 지금 본사와 안산 공장을 동시에 압수 수색을 하고 있어?”
“네. 심지어 대규모 인원을 동해서 협력......”
하지만 아무리 다혈질이라도 위에 눈치를 잘 보는 구길모 과장은 최문경 부회장의 차가운 시선을 보자 입을 다물었다.
장승일 실장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무래도 먼저 가봐야겠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이 부회장실을 나서는 장승일 실장을 불렀다.
“이봐, 장 실장, 협력이라는 소리는 도대체 무슨 소리야?”
“......그게 중앙지검에서 KM 전자와 안산 공장을 압수 수색을 하는 중이고, 동시에 KM 전자 협력 업체도 지금 대규모 압수 수색이 진행 중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 이 봐, 자, 장 실장, 저 새끼가......”
최문경 부회장은 허겁지겁 도망치는 장승일 실장 행동에 이를 갈았지만 뒤늦게 상황을 떠올리면서 머리를 움켜잡았다.
“둘째 이놈이 제대로 사고 쳤구나.”
권재홍 비서실장이 눈치를 봤다.
“제가 한 번 알아볼까요?”
“그래야지. 민혁이 그놈도 마음에 걸려. 이번에 같이 확인해봐. 에휴, 아버지가 알면 한동안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겠어.”
나이가 들어가면서 요즘 말도 없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화를 내는 최용욱 회장은 특히 둘째 최훈열 일에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런데 최용욱 회장이 저런 상황을 알게 되면 그 자신 역시 유탄을 맞을 수도 있었다.
“젠장맞을, Advanced MOS에 연락해서 다시 약속 잡아.”
“알겠습니다.”
***
박상기 차장은 아침부터 부사장실에 불려 가서 질책받을 것을 떠올리면서 툴툴거렸다.
“아, 젠장, 부사장님은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날 볶아!”
이미 정성근 대리를 최민혁 실장 옆에 붙여서 보낸 조성돈 팀장은 모른 척 모니터 화면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칸막이 너머로 따가운 시선을 느끼자 오히려 고개를 더 숙였다.
“조 팀장님, 정말 그럴 겁니까?!”
“네?”
모른 척 키보드에 손에 얹은 체 열심히 작업하는 흉내를 내던 조성돈 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박상기 차장은 오히려 더 화가 났다.
“아니 사전에 무슨 일이 있으면 저에게라도 넌지시 말해줘야 할 것 아닙니까. 본사와 안산 공장이 압수 수색당하고, 뉴스에는 단 한 줄의 기사도 없는 사안을 제가 부사장님 통해서 들어야 합니까?!”
“아, 그게......”
“그러지 마십시다. 실장님이 갑자기 안산 공장에 내려갔는데, 팀장님이 모른다고 하면 말이 됩니까. 아니면 부사장님에게라도 말해줘야죠. 문 부사장님도 사장님에게 그 말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조성돈 팀장은 슬쩍 시선을 피한 채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따가운 다른 팀원의 시선도 신경 쓰이기는 매 한 가지다.
그는 출장 보고서를 열심히 만들면서 아예 두 사람 대화를 모른 척하는 정성근 대리 행동에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이봐, 정 대리.”
“네?”
정성근 대리는 아침부터 이상해진 기획팀 분위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 이리로 와서 안산 공장 출장에 관해서 이야기 좀 해봐.”
박상기 차장은 그제야 이 사태가 정성근 대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성근 대리는 미적거리면서 오기는 왔지만, 여전히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출장 보고서를 통해서 보고하겠습니다.”
“아니, 안산 공장 분위기가 어떤지 알고 싶은 거야.”
“그거야 본사와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옆에서 귀를 기울이던 박상기 차장이 버럭 소리쳤다.
“야, 정 대리, 달랑 수사팀 몇 명이 온 본사와 검사와 수사팀 포함해서 수십 명이 들이닥친 안산 공장이 어떻게 같아?!”
조성돈 팀장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팀원 역시 비슷했다. 그들 역시 본사 재무팀 압수 수색 때문에 회사 분위기가 온통 시끄럽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정성근 대리는 무감각했다.
“큰일은 아닙니다. 협력 업체에서 부품 부풀리기 한 것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 뿐입니다.”
박상기 차장은 허탈하게 웃었다.
“정 대리야, 너 정말 사람을 바보로 아냐.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해?”
“네.”
여전히 태도가 변하지 않는 정성근 대리였다.
아침에 모닝커피로 시간 보내다가 뒤늦게 나타난 이정원 과장이 정성근 대리 옆구리를 쿡 쥐어박았다.
“정 대리, 그러지 좀 말자. 최 실장님이 뭐라고 했는지는 이해가 되니까. 기획실에서 조금 먼저 알자는 것뿐이잖아.”
“그 부분은 최 실장님이 직접 말할 겁니다.”
“아니, 그러니까. 대충이라도 말할 수가 있잖아.”
정성근 대리는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은 체 무덤덤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정 대리 너 정말 그럴 거야?”
살짝 삐친 이정원 과장은 은근히 압력을 넣었다.
화장실을 들려다가 뒤늦게 이 사태를 발견한 배종대 과장이 이정원 과장을 말렸다.
“이 과장, 정 대리에게 그렇게 말해봐야 다 소용없어. 그냥 포기해. 괜히 맘 상한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도 정성근 대리는 전혀 자신과 무관한 일인 양 대꾸했다.
“전 이만 출장 보고서를 써야 합니다.”
박상기 차장도 한마디 할까 하다가 배종대 과장이 말리는 손짓을 보고서야 포기하고 말았다.
조성돈 팀장도 이놈의 정성근 대리 고집을 생각보다 많이 경험했다. 그래서 중요한 일에는 적임자라서 최민혁 실장과 같이 보낸 것이었다.
“이봐 정 대리,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도 이해를 하겠는데, 최소한 우리도 돌아가는 사정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
“지금 작성 중인 보고서를 완료해서 바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허.”
정성근 대리에게 다행이라면 때마침 최민혁이 기획팀에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뒤늦게 최민혁을 발견한 이들은 우르르 일어나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없었다. 조성돈 팀장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는 시간 동안에 최민혁 위치가 자리를 잡았다는 의미였다.
조성돈 팀장은 더욱이 열기로 가득한 시선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박 차장 이야기 들어보면 공장에서 일이 있었지만 조용한 것을 봐서는 잘 처리하신 것 같은데, 갑자기 무슨 일일까?’
아마 몇 개월 전에 최민혁이 안산 공장에 내려갔다면 공장 근로자 텃새에 제대로 대응도 못 했을 것이다.
최민혁은 묘한 분위기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조 팀장님, 잠깐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벌떡 일어난 조성돈 팀장은 조금 전 일을 잊은 양 최민혁 뒤를 따랐다.
박상기 차장이 슬그머니 뒤를 따랐다가 최민혁 손짓에 아쉬운 듯 물러나고 말았다.
그는 괜히 자존심이 상해서 그 칼날을 정성근 대리에게 돌렸다.
“야, 정 대리, 너 정말 그럴 거야?!”
하지만 정성근 대리는 눈빛 하나 끔쩍하지 않았다.
“제가 출장 보고서를 올릴 거고, 주말 회의에서 팀 보고를 할 겁니다. 그때 가서 이야기하면 안 되겠습니까?”
철벽을 느낀 박상기 차장은 결국 설득으로 노선을 갈아탔다.
“내가 지금 다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잖아. 그냥 힌트라도 주면 안 될까?”
“실장님의 엠바고가 있었습니다.”
참다못한 박상기 차장은 버럭 소리쳤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던지 해야 했을 것 아냐!”
“그런 질문을 받지 않았습니다.”
“내가 졌다, 졌어. 우리 대리부장님을 몰라보고, 미안해.”
그는 결국 두 손을 들었고, 다른 팀원은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정성근 대리를 쳐다보았다.
정성근 대리는 자기 자리에 앉자 부지런히 출장 보고서 작업에만 집중했다.
“......”
결국, 정성근 대리에게서 단 한마디도 듣지 못한 팀원은 다들 혀를 내두르면서 그의 뒤통수를 뚫어지라 쳐다보기만 했다.
‘진짜 물건은 물건이다.’
***
사실 최민혁은 안산 공장이 몽땅 불타도 크게 아쉬운 것이 없었다. 따라서 압수수색 후에 어수선한 안산 공장에서 몇몇 책임자를 만났고, 거기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는 차세대 제품에만 관심이 있었고, 그 일에 아무도 관심이 없기만을 바랐다.
결국 우려의 대상은 두 사람이다. 그중에 한 사람인 최훈열 전무는 이미 마무리 수순이고, 이제부터는 남은 한 사람인 최문경 부회장을 상대해야 했다.
‘아니 지금은 무리지.’
대안은 최문경 부회장이 KM 전자에 신경을 쓸 틈이 없을 정도로 흔드는 것이다.
선발 공격대로 고른 사람은 뜻밖에도 조성돈 기획팀장이었다.
다만 처음부터 심각한 주제로 시작하기 앞서서 오혜정 비서가 가져온 커피를 홀짝이면서 미모가 활짝 피어오른 그녀를 칭찬했다.
“오 비서는 요즘 좋은 일이 있나 봅니다. 커피 맛이 좀 다르네요.”
“아닙니다.”
“여자가 사랑하면 더 예뻐진다고 하던데, 따로 만나는 남자가 있나 봐요.”
안 그래도 서구적인 미인 오혜정은 뜻밖에 펄쩍 튀었다.
“전 지금 만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가요?”
“그저 회사 출근해서 일하는 것이 너무 행복할 뿐입니다.”
보조개를 살짝 보인 오혜정 비서는 청순함과 색기가 묘하게 섞여 있었다.
최민혁도 혀를 내둘렀고, 조성돈 팀장조차 슬쩍 시선을 피했다. 뒤돌아서 나가는 그녀의 애플 힙은 유독 시선을 더 끌었다.
딴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지금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눌 터임이라서 약간 흐트러진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전 조 팀장님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네?”
당혹한 조성돈 팀장은 안산 공장 문제를 상의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최민혁은 당분간 조성돈 팀장을 포함해서 본사 누구도 안산 공장의 신제품에 대해서 알기를 원치 않았다.
“안산 공장은 제가 차후 말하겠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앞으로 일입니다. 팀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KM 전자 대규모 차입금은 문제가 될 겁니다. 그건 잘 아시죠?”
“......네.”
< #03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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