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4화 (24/1,021)

< #024 >

“아닙니다. 쉬쉬하지만 서로 다 아는 처지에 누굴 탓을 하겠습니다. 다만 늦게라도 이렇게 알려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저기 그러면 실장님에게도 잘 좀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직접 이야기하시면 되.....”

하지만 기획실장실과 가까이 있는 조성돈 팀장은 요즘 사내에 도는 재무팀장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를 떠올리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직접 찾아가서 사과만 한 것일까. 실장님 성격에 그럴 리가 없을 테지. 실장님에게 얼마나 정신적인 부담을 느꼈으면, 이렇게까지 할까?’

“제가 실장님에게 따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칸막이 건너편에서 퉁명스러운 박상기 차장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 실장님이 호환이나 마마보다 더 무서운 가 봅니다.”

“......”

그는 박상기 차장 역시 똑같지 않냐고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회의나 잠깐 합시다.”

***

KM 전자 옥상 쉼터에 옹기종기 몰려 온 기획팀원은 다들 조금 전에 회의실에 나온 이야기를 가지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은 키, 검은 뿔테 안경으로 팀에서 눈에 잘 뜨이지 않는 정영일 사원은 툴툴거렸다.

“정말 사실일까요?”

박광민이 입사 동기라고 그 말을 받아주었다.

“박경진 재무팀장이 실장님에게 직접 사과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봐.”

“오혜정 비서는 왜 그렇게 애매한 이야기만 해서 사람 궁금하게 하는지 모르겠어. 사과한 사실이 아니라 정확히 실장실에서 있었던 상황에 대해서 말해줘야 하지 않나.”

늘 웃기만 하는 이정원 과장이 담배를 입에 문 채 타박했다.

“안 그래도 쉬쉬하는 이야기지만 최훈열 전무와 관련해서 박경진 팀장 이야기가 많잖아. 그런데 만약 박경진 재무팀장이 실장님에게 빌었다고 가정해봐. 그 일이 알려지면 회사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될 거야. 그런 악명은 실장님에게도 마이너스야. 그런데 단순히 사과했다는 소식은 오히려 실장님에게도 도움이 되잖아. 실장님 사내 영향력도 더 키울 수 있으니까. 지혜로운 오 비서가 잘 처신한 거야.”

늘 순수한 박광민 사원이 소리쳤다.

“전 이 과장님 의견에 찬성합니다.”

매사에 냉소적인 정영일 사원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툴툴거렸다.

“그래도 결국 실장님 때문에 회사 분위기가 어수선한 것은 사실 아닙니까? 이러다가 우리 회사가 망할 수도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견을 제시한 이는 없었다.

최민혁은 실장으로 출근 이전에 말이 있었고, 출근 이후에도 말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KM 전자가 대규모 구조 조정으로 희망퇴직을 받을지 모른다는 유언비어까지 나돌았다.

그런데 평소에도 말이 없던 정성근 대리가 조용히 나섰다.

“난 영일씨 생각과 달라.”

위성 사업 일에 틈틈이 도움을 주는 이정원 과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 대리,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확실치는 않는데......”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리는 정성근 대리. 막 쉼터에 도착해서 몰려 있는 팀원을 발견하자 후다닥 달려온 배종대 과장이 나섰다.

“뭐야?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는 거야? 나도 좀 끼자!”

배종대 과장은 푼수처럼 요약해서 간단하게 말한 정영일 사원의 말을 듣자 버벅거리는 정성근 대리를 채근했다.

“정 대리, 아는 것이 있으면 혼자만 알지 좀 마. 아주 내가 답답해서 미치겠다!”

원래는 출장 보고서를 정리한 후에나 언급하려고 했는데, 주변 성화가 너무 극성이라서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작년 대비 이번 분기 실적이 더 좋습니다. 흑자 전환까지는 아니어도 작년 기준으로 보면 대략 30% 가까이 이익이 더 날 겁니다. 아니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

예상치 못한 폭탄선언에 기획팀원은 다들 충격을 받아서 입을 딱 벌렸다.

“그, 그게 어떻게 가능해?”

“간단히 말해서 비용을 절감했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정성근 대리가 실없는 소리를 한 사람이 아니라는 신뢰 때문인지 헛소리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배종대 과장이 호들갑을 떨었다.

“야아, 정 대리, 너 임마, 그런 사실을 너 혼자만 알고 있으면 어떻게 해? 자세히 설명 좀 해 봐!”

“그게 사업부 현황을 확인할 겸 출장 가서 사업부를 일일이 다 확인하다가 알게 된 겁니다.”

“정 대리 또 공장 가서 자재 창고를 일일이 다 뒤진 거야?”

“원칙대로 샘플 조사는 해야 하니까요.”

정성근 대리는 기획팀 내에서도 규정을 철저하게 준수해서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럼에도 싸워봐야 이길 수 없는 정성근 대리를 비난하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이젠 정성근 대리가 맡은 일은 그냥 그대로 두고, 활용하는 것이 팀 분위기였다.

입담이 만만치 않은 배종대 과장조차 정성근 대리에게 양손을 다 들었으니, 공장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대충 예상했다.

“하, 이 답답이 정 대리, 안 봐도 뻔하다. 안산 공장 이번에 난리 났겠다. 그래서 규정대로 조사하다 보면 이상한 것이 나와서 조사하다가 작년과 대비해서 부품 매입 단가가 달랐다는 거야?”

“일부 부품에서 그 현상이 나타나서 확인하다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뒤늦게 자재 실무 담당자에게서 설명을 들었습니다.”

간단하게 하는 말이지만 지금 안산 공장 자재 팀은 정성근 대리에 대해서 치를 떨었다. 사소한 나사 하나 가지고 시작한 일을 계속 키우고, 키워서 자재 팀을 뒤집어 놨기 때문이다.

배종대 과장 역시 정성근 대리 성정을 알기에 굳이 안산 공장에서 일어났을 일을 묻지 않았다.

‘안산 공장에서 문제가 없었다면 전화를 했겠지.’

다만 그는 돌아가는 정황을 알고 싶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막 쉼터에 도착한 조성돈 팀장과 박상기 차장조차 멍하니 정성근 대리를 쳐다보았다.

따가운 시선에 부담을 느낀 정성근 대리도 당황해서 또 버벅거렸다.

‘아, 애는 정말 순진한 거야? 아니면 잔머리를 잘 굴리는 거야?’

배종대 과장이 나서서 정성근 대리를 다독거리자 상황이 나아졌다.

“그게 최 실장님 때문이라는 소리가 있어요. 최 실장님이 출근하기 전부터 최훈열 전무님과 대립했잖아요. 그 과정에서 최 전무님은 최 실장님을 신경 쓴다고 사업부 쪽에 직접 간섭하지 못했거든요.”

급한 성격의 배종대 과장이 계속 질문했다.

“설마 최 전무 간섭이 사라지면서 사업부에서 자발적으로 움직였는데, 그게 성과로 나타났다는 소리를 하는 거야?”

“네. 아, 이상하게 들릴 겁니다.”

기획팀이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에 머쓱한 정성근 대리는 구체적으로 한 예를 들었다.

“단적인 예로 공급받는 TV용 고압 변성기를 한 예로 들겠습니다. 재계약 과정에서 작년에 입고된 불량 부품에 대해서 검토 요청을 했는데, 그쪽에서 실장님과 대판 싸우는 최 전무 핑계만 댄 채 대응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설계팀에서 계약 기간이 끝나자 기존 업체 대신에 단가로 저렴하고, 품질도 월등한 부품을 납품하는 다른 업체를 선택했죠.”

배종대 과장은 마른 침을 삼켰다.

“부품 가격이 얼마나 줄어드는데?”

“적어도 20%, 부품에 따라서 많게 35%까지 비용이 절감됩니다.”

“와아, 씨발, 그러면 그 새끼들이 이제까지 불량품을 고가에 공급했다는 소리잖아. 그 이익은 설마 최 전무가 다 먹은 거야?”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 좀 답답하게 하지 말고, 끝까지 말 좀 해!”

정성근 대리는 자기 입만 뚫어지게 보는 팀원에게 결국 말했다.

“중형TV 설계팀의 안선종 부장님 말에 따르면, 자신은 본사 내에 일어나는 일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삼두육비로 소문난 최 실장님에 관해서도 관심 없고요. 다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만 같았으면 한다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러니 여러분이 아는 회사 위기설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겁니다. 여기 본사만 떠들썩하지 정작 사업부 분위기는 다릅니다. 특히 오디오 사업부는 올해 사상 최고의 실적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배종대 과장은 철저한 정성근 대리 말을 100% 완전히 믿었다.

“와아, 결국 최 실장님이 회사를 망치고 있는 최 전무를 때려잡는 중이고, 똥오줌 못 가리는 우리 최 전무는 회사 일에 손 놓아서 회사가 지금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리잖아. 아니 세상에 이 무슨 홍두깨 같은 소리야!”

“......”

하지만 역시 다른 기획팀원 역시 누구보다 답답한 정성근 대리가 얼마나 통찰력이 대단한 사람이 잘 아는 터라 대꾸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맙소사 그러면 차라리 최 전무가 이번 기회에 검찰 수사받아서 감옥에 가면, 회사가 정상화될 거라는 소리잖아.’

조성돈 팀장은 말없이 듣다가 정성근 대리에게 말했다.

“언제까지 보고서 가능해?”

“이번 주말까지 올릴 예정입니다.”

“아니 수요일까지 정리해서 보고해. 정 사람이 필요하면 정영일이나 박광민 두 사람과같이 해서 빨리 처리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정 대리에게 자료 받아서 확인을 해봐.”

“네.”

그들은 다들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각도 못 한 곳에서 꼬인 실타래를 풀 실마리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

기획팀에서 다시 안산 공장을 시작으로 다른 공장에 관해서 재조사를 진행하면서 이 일은 알게 모르게 다른 팀에도 알려졌다.

지난 팀장 회의도 그렇지만 회사 내에 알음알음 도는 최민혁 실장에 대한 소문이 점점 그들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들 역시 가끔 최 전무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 때문에 뒤늦게 탄식했다.

최훈열 전무를 바라보는 시선은 시간이 갈수록 차갑기만 했다.

회사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최훈열 전무는 요즘 검찰 소환 처리 상황을 알아본다고 반쯤 정신이 나갔지만, 오늘 출근하면서도 유독 따가운 시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뭐지?’

한두 사람이 아니라 보는 임직원 과반수가 동물원 원숭이 보듯이 쳐다보았다.

최훈열 전무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차를 먼저 주차장에 주차하고 막 일층에 올라온 이재상 비서를 보면서 툴툴거렸다.

“회사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별일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날 바라보는 시선이 저렇게 이상해? 설마 소문이 돈 것은 아니겠지?”

“제가 얼마나 철저하게 관리를 했는데,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박경진 재무팀장 얼굴을 시작으로 해서 비서팀 여직원을 떠올리면서 입술을 살짝 깨물고 말았다.

비서실 직원이 업무 협조 때문에 자기 담당자 일정을 서로 교환하고, 심지어 정보를 교환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묵인된 일이었다.

‘젠장.’

최훈열 전무도 뒤늦게 눈치를 채서 성격대로 한바탕 하려다가 이제 화를 낼 힘조차 나지 않아서 관두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가능하면 빨리 끝내면 될 거야.”

“네. 아, 그리고 고압변성기를 공급하는 대림전자같은 협력 업체 몇 곳에서 계속 연락이 오는데, 어떻게 할까요?”

“가만 설마 TV 사업부에 부품을 공급하는 업체를 말하는 거야?”

“네. 그게 TV 사업부 설계팀에서 기존에 생긴 불량률에 대해서 명확한 해결책이 없다면 계약을 갱신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설마 안선종 부장 그 새끼 짓은 아니겠지?”

“그게 꼭 안선종 부장 탓만 할 수 없는 게 작년에 나타난 고객 불량을 근거 자료와 샘플을 바탕으로 업체에 요구한 겁니다. 대림전자 말로는 신뢰성 해결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서......”

“그래서 설마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부품을 교체했다는 말이야? 아니 조 소장은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거야. 왜 말리지 않았어?”

“하지만 QA팀에서 기획팀에 문제를 제기해서 이슈를 만든 상황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만약 이대로 대책 없이 밀어붙이면 최민혁 실장에게 직접 따지겠다고 해서......”

품질 관리팀에서 일어난, 아니 심지어 TV 사업부에서 일어난 일을 최민혁 실장에게 보고하겠다는 말에 최훈열 전무는 몸서리를 쳤다.

“거기에 최 실장이 왜 나와!”

“......기획팀에서 알아야 하는 일이라고.”

“야아, 이 비서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TV 사업부에서 품질 관리하는 일을 하잖아. 그걸 왜 회사 전체 기획을 담당하는 기획팀에 요청하는 거야?!”

“저도 그렇게 항의했지만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업무 영역마저 최민혁이 치고 들어온 것을 느낀 최훈열 전무는 분노로 폭발한 것 같았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이 개새끼들이......”

예상 못한 일에 이를 부드득 갈아붙인 최훈열 전무는 차마 그들만을 탓할 수는 없었다.

본사내에서도 요즘 최민혁 실장이라면 기피의 대상이었다. 오죽하면 요즘 기획팀이 자료를 요청하면 하루를 넘기는 일이 없이 즉각 이루어지겠는가.

“최민혁 이 새끼 두고 보자. 이번 소환 문제만 끝내면 끝장을 내주마!”

하지만 그는 아차 싶었다.

“아, 혹시 그 업체 사장을 만나서 괜한 문제를 만들지 말라고 주의나 줘.”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최훈열 전무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발 빠르게 움직이는 이재상 비서를 보면서 안색을 굳히고 말았다.

‘설마 협력 업체까지 조사한 것은 아니겠지?’

< #02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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