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3 >
아직은 투자자 보호제도나 투자 업무 겸영 허용과 같은 자본시장법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횡령 범죄에 대한 형량이 상대적으로 크다 할 수는 없지만, 횡령 금액 자체가 커지면 형량 자체가 많이 달라진다.
특히 횡령, 탈세, 분식 회계가 같이 엮여 있다면 형량 총량 자체가 커져서 설사 초범이라도 실형을 받을 확률이 아주 높다.
최훈열 전무는 더욱이 희생양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박경진 재무팀장을 감옥에 보낼 것이 분명했다.
“시, 실장님, 저,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최 전무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회사를 그만둬야 했습니다.”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벌벌 떠는 박경진 재무팀장 모습에서 회의 때 자신만만하던 그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최민혁 옆에서 무릎까지 꿇은 채 애걸복걸했다.
“시, 실장님, 제, 제발 이,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전 정말 잘못 없습니다.”
칼자루를 쥔 최민혁은 굳이 서두르지 않은 채 차분하게 요리했다.
“제가 그래서 너무 나대지 말라고 경고했지 않습니까? 도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앞으로 절대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저 좀 살려주십시오.”
“누가 보면 제가 악당이라도 되는 줄 알겠습니다.”
“아닙니다. 잘못은 제가 했습니다.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기회를 더 주십시오.”
최민혁은 상대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묵묵히 듣기만 했다.
“......”
외부에서 이 일을 알아봐야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김명준 과장은 슬쩍 기획실장실 문 입구 앞에까지 가서 가로막았고, 오혜정 비서가 문을 열고 눈만 살짝 비췄다가 심각한 기획실 분위기에 그냥 사무실 문을 닫아버렸다.
최민혁은 넌지시 말했다.
“저랑 최 전무님이랑 사이가 안 좋아서 돕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저도 괜한 일로 구설에 오를 수가 있어서 반드시 증거가 필요합니다.”
“즈, 증거 있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 증거까지 나오자 쾌재를 불렀다.
‘빙고!’
그는 이미 사전에 준비한 CD 케이스를 꺼내서 최민혁에 내밀었다.
최민혁은 냉큼 받아서 그 파일 내용을 확인하면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특히 연구소 예산을 횡령하는 전형적인 수법은 고가의 장비 구매를 허위 서류로 만들어서 고장이 난 것으로 처리했다. 연구 프로젝트에 배정한 예산은 프로젝트 실패로 처리해서 다 빼먹었다.
‘하, 정말 수법도 여러 가지구나.’
하지만 그는 다시 CD를 꺼내서 떨고 있는 박경진 재무팀장에게 넌지시 말했다.
“제가 아는 검사님이 있어서 모든 사실을 다 자백하고, 증언까지 한다면, 집행 유예로 끝낼 수 있을 겁니다. 한 번 그분을 소개해 드릴까요?”
“하, 하겠습니다!”
“그러면 돌아가서 평소처럼 지내세요. 혹시 최 전무가 호출하면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특이한 일이 있으면 저에게 통보해주세요. 여기 왔던 일도 팀장 회의의 일 때문에 사과했다고 넌지시 말씀하시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더 협박할까 하다가 몸을 벌벌 떨면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박경진 재무팀장 모습을 보자 거기서 멈추고 말았다.
굳이 박경진 재무팀장 증언이 없어도 아마 이를 갈고 있는 전 연구소장(?)을 이용해도 추가 증거를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둘째 큰아버지에게 참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감방(?)에 갔다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역시 신중할 필요가 있어. 내가 이 일을 주도했다는 것을 큰아버지가 알면, 중간에 끼어들려고 할 테니까.’
***
박경진 재무팀장은 뜻밖에 조용하게 지냈고, 별다른 불협화음도 만들지 않았다.
최민혁은 느긋하게 최훈열 전무의 검찰 조사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장승일 기조실 실장이 구길모 과장과 같이 실장실을 찾아왔는데, 제품 인하 결정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번 KM 전자 전 제품 인하는 정부 쪽 인사 압력 때문에 그룹 차원에서 진행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KM 전자에서도 별문제가 없도록 조처를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서 최민혁은 별 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게 또 장승일 실장을 자극했다.
“......저도 KM 전자 쪽에서 들은 사실이지만 이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뭘 말인가요?”
“오성 전자를 비롯한 10대 대기업 전체가 정부 압력을 받아서 가격 인하를 결정한 사실은 불과 며칠 전에 몇몇 핵심 실무자만 아는 사실입니다. 저희도 며칠 전에 통보를 받았습니다.”
“아, 저도 본사에 아는 라인이 있다면 답변이 될까요?”
하지만 장승일 실장은 이전과는 다르게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때는 아직 그룹 본사에서 협의 중인 사안이었습니다. 결정도 나지 않은 사실을 실장님이 어떻게 아셨는지 알고 싶은 겁니다.”
“다른 대기업 쪽에서 다 승복한 사실인데, 설마 KM 그룹 혼자 이번 정부 결정 안에 반기를 들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습니까.”
잠깐 입을 다문 장승일 실장은 뚫어지게 최민혁을 살폈다. 그는 최민혁 말을 애초에 믿지 않았기에 머리를 굴렸다.
‘정말 정부 쪽과 다른 대기업 쪽에 아는 라인이 있다는 말인가?’
그로서도 한국 대기업에 부정적인 재정경제원에 고작 대학교 1학년생에 불과한 최민혁이 자기 사람을 어떻게 심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의심스럽게 쳐다보지 마세요. 뭐 혹시나 해서 하는 질문인데, 설마 공짜로 해준 것은 아니겠죠?”
“정말 못 속이겠습니다. 두 가지 특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는 증권감독원이 부채비율이 높은 문제 때문에 감사인 지정 작업에 도움을 주기로 했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3년간 세무 조사는 유예해주기로 했습니다.”
“부채가 많은 우리 회사로서 괜찮은 제안이군요.”
“그리고 세금 감면과 같은 혜택 역시 추가가 될 예정입니다.”
“그건 더 좋네요. 그런데 서면으로 처리해도 될 일 때문에 여기 온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용건이 뭡니까?”
“......눈치가 빠르십니다.”
“최 전무 검찰 소환 문제 때문입니까?”
어지간해서 자기감정을 쉽게 표현하지 않는 장승일 실장이 이번에는 태도를 완전히 달리했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그러면 더 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당분간은 최 전무님과 싸움을 자제해주셨으면 합니다.”
최민혁은 억울한 사람처럼 툴툴거렸다.
“성추행범으로 의심받는 최 전무가 문제인데, 말하는 것을 봐서는 제가 문제아처럼 보입니다만?”
“하아,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비꼬는 말투도 좀 자제를 해주십시오. 이쪽저쪽에서 말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항, 김현우 상무 뒤에 있는 사채업자 대주주 같은 이들 말하는 겁니까?”
“......정말 귀신같습니다. 제가 아는 그 도련님이 맞는지 의심이 듭니다.”
“알았습니다. 이것 저곳에서 말들이 많다고 하는데, 저도 자중해야죠. 아, 그러면 최 전무 일은 잘 해결이 되고 있는 겁니까?”
그는 반사적으로 말하다가 의미심장한 최민혁 눈빛을 보자 슬쩍 말을 바꾸었다.
“소환을 일주일 더 연기하기는 했는데.....,흠, 죄송합니다. 이것 역시 실장님이 꼭 아실 내용이 아니라서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와아, 재주도 좋습니다. 그러면 검찰 소환 일정을 이주일이나 더 연기시킨 겁니까?”
“......네.”
심술이 가득한 최민혁 모습을 보자 장승일 실장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제발 이번 일만큼이라도 끼어들지 말아 주십시오. 만약 회장님 귀에 들어간다면 실장님에게도 좋을 것이 없습니다.”
“어지간하면 알았다고 하려고 했는데, 그 말이 좀 심하시네요. 아니 그러면 우리 최 전무님이 혐의도 없는 절 마약 사범으로 몰아간 것은 봐줄 일이고, 최 전무님이 수사받는 건 안 된다는 말입니까?”
“그, 그걸 어떻게 아신......”
내막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장승일 실장은 심장이 멎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가 뒤늦게 유도 신문에 걸렸다는 것을 알자 당황했다.
히죽 웃는 최민혁은 장승일 실장을 그만 자극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장 실장님 지시를 충실히 따르겠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대답은 명쾌했다.
최민혁은 이미 수레바퀴가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아서 자신도 이제는 최훈열 전무 구속을 막을 수가 없었다. 다만 굳이 그런 내심까지 말하지 않았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은데, 굳이 견제받을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
칼 같은 대답에 장승일 실장은 그 자리에서 5분 동안 갈등했고, 사무실을 나서려고 하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적지 않은 임직원이 이미 실장님을 지켜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가요?”
장승일 실장은 잠깐 다시 갈등하다가 결국 한 마디하고 말았다.
“......이번 일은 정말 훌륭하셨습니다.”
“네?”
그도 뜬금없는 대답만 남기고 실장실을 나서는 장승일 실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뭐가 훌륭하다는 소리지?”
입이 무거운 장승일 실장이 누군가를 칭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지만, 내막을 알 수가 없어서 곤혹스럽기만 했다.
옆에서 듣기만 하던 김명준 과장은 슬그머니 말해주었다.
“회사 일에 잘 적응한 것을 말할 겁니다. 누구도 실장님이 이렇게 잘 풀어갈지 예상을 못 했을 테니까요.”
“꼭 그런 의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자제하라고 주의를 환기한 것은 뭐고, 훌륭하다는 소리는 뭔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
최민혁은 적지 않은 사람의 예상과는 달리 최 전무에 대해서 더 문제를 만들지 않았다. 기조실에서 받은 제품 가격 인하 결정 사안을 기획팀에 통보했다.
이미 뉴스 보도를 통해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조성돈 팀장은 세금 감면이라는 점에 주목해서 그 부분에 집중했다.
최대한 세금 감면 혜택을 받도록 업무 조정만 한다면 손실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고 봤다.
일테면 연구 개발이나 세금 감면이 쉬운 제품 일정에 조정을 주는 것이다.
덕분에 기획팀은 이 조정안 수정을 위해서 다른 팀과 발 빠르게 움직였다.
흥미로운 점은 작년과는 달리 다른 팀에서 의외로 순순히 기획팀의 지시에 따라서 발 빠르게 움직였다. 심지어 TV 사업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최근 몇 가지 외부 사건에 대한 대응책이 전혀 없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길이 열린 것이었다.
그리고 제품 인하도 홍보팀을 통해서 외부에 알리기는 했지만, 암묵적으로 3개월 정도 지난 후에 반영하기로 했다.
꼼수이기는 하지만 KM 전자가 적자임을 내세워서 부담을 덜었다.
대충 큰 그림이 나오자 기획팀에서 세세하게 사업부 비용 절감 부분을 파고 들어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늘 소극적인 조정욱 인사팀장이 직접 기획팀을 찾아왔다.
“이번 채용과 관련되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작년과 경영 여건이 달라서 이번 채용 인원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그래도 뻔히 필요한 인원 충원은 해야 합니다.”
조정욱 인사팀장은 눈치를 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제가 직접 각 사업부에 확인해본 바로는 당장 인원이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상관없다고 하는 곳이 많습니다. 물론 영업은 빼고요.”
“그건 팀장 회의 때 이야기와는 다르지 않습니까?”
“저도 사업부 인사 담당자랑 직접 통화하고서 알게 된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매년 계속 매출도 줄었고, 적자는 더 늘어났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장은 급하게 인원을 충원할 필요가 없는 거죠.”
어이가 없지만, 매출이 대폭 줄면서 일거리 총량 자체가 계속 줄어들면서 생긴 현상이다.
“......그게 또 그렇게 됩니까?”
“네.”
기가 막힌 사실이지만 KM 전자 누적 적자 과정에서 제품이 팔리지 않았다. 재고가 쌓여 있는 상황에서 생산 물량을 늘릴 수도 없었다.
특히 영업 실적이 대폭 줄어들면서 김부영 영업팀장 이야기와는 달리 굳이 사람을 급하게 충원할 이유가 없었다.
조성돈 팀장 칸막이 맞은편에 있는 자리이기에 들리는 대화를 어쩔 수 없이 듣던 박상기 차장이 눈만 빼꼼 내밀면서 툴툴거렸다.
“조 팀장님, 어이가 없는 말씀 하시는 것은 아십니까?”
“......그게 최 전무 때문입니다.”
“그 일에 최 전무가 왜 또 나옵니까?”
“쉽게 말해서 충원을 해야 기본적인 인건비를 배당할 수 있습니다. 만약 차입금이 들어오면, 차입금 일부를 더 당겨 쓸 수 있게 됩니다.”
인건비라는 것이 꼭 당장에 사용되는 금액만은 아니다. 그 사람이 회사에 있으면서 사용하는 모든 비용을 한 해 단위로 책정된 것이니까.
일단 사람이 있다면 그 기준으로 인건비 기준으로 잡을 수가 있는데, 없다면 그게 또 어렵다.
결국 최훈열 전무는 차입금을 더 많이 당겨오기 위해서 꼼수를 부린 것이다.
박상기 차장은 허탈한 표정을 한 채 사무실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탄식했다.
늘 무덤덤한 조성돈 팀장은 조정욱 인사팀장을 배려해서 별 다른 감정을 내세우지 않았다.
“설마 조 팀장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사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몰랐습니다. 핑계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각 사업부 인사팀에서 올라온 자료를 취합했으니까요. 이상한 점이 있어서 몇 번 확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마다 최 전무가 간섭해서 독단적으로 하는 것으로 결정 내렸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 #02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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