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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2화 (22/1,021)

< #022 >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꿈속에서 최민수가 감옥에 있던 그에게 찾아와서 KM 전자가 겪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나열한 것을 떠올렸다.

“소프트웨어를 통한 자동화 설계기술, 브라운관 전자총 부품의 레이저 용접 기술, 브라운관 퍼널 글래스의 전기 저항을 줄여주는 신소재 특허와 같은 것을 말하는 겁니까. 물론 경쟁력이 있는 다양한 원천 기술을 가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성 전자 역시 회피 특허 기술을 다 가지고 있어요.”

엄밀히 말하면 오성 전자가 가진 TV 원천 기술이 더 광범위하고, 방어 특허까지 떡칠해놔서 경쟁 업체가 파고들기 쉽지 않았다.

오성 전자의 특허 공격에 KM 전자 역시 나름 사력을 다해서 싸우고는 있지만, 한계는 존재했다. 대운 전자와 굳이 몇몇 특허와 관련해서 손을 잡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결국 오성 전자가 앞으로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KM 전자 TV 사업부의 원천 특허만 쏙 빼먹지. 중국 업체가 결국 손 떼는 이유고.’

“정말 오성 전자가 KM 전자의 TV 사업부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합니까?”

TV 사업부가 가진 원천 특허에 대한 나열에 기가 팍 죽은 박경진 재무팀장은 크게 당황했다.

“그, 그게......”

“재무 팀장님.”

“네?”

“좀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하세요. 그러면 최소한 다른 분처럼 중간은 갈 것 아닙니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식으로 나대다가는 그 자리조차 지키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 하지만......”

압박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판단하자 슬쩍 마른 침을 삼키고 있는 회의 참석자를 힐끗 쳐다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서 회의실을 빙 둘러봤다.

“반도체 수출 호황 덕분에 현금이 넘쳐나는 오성 전자가 7% 가격 인하한 다른 원인으로 꼽는다면 재고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TV 가격을 대폭 낮추어서 경쟁사를 엿 먹인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이번 경우는 아닙니다!”

이번에는 적지 않은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경진 재무팀장이 이번에는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최민혁은 양손으로 회의실 테이블을 쾅 내려치면서 박경진 재무팀장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소리쳤다.

“제 말도 못 알아들으면서 찌라시만 믿고, 난리를 치는 겁니까?!”

그 기세에 기가 팍 죽은 박경진 재무팀장은 움찔했다.

“무슨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오성 전자는 지금 반도체 때문에 돈을 주체할 수가 없는데, 굳이 다른 기업과 싸워서 문제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즉 가격을 차라리 인상했으면 했지, 인하할 이유가 없습니다. 있다면 딱 한 가지. 바로 외부 강압으로 가격을 내린 겁니다.”

그제야 눈치를 챈 팀장이 나직하게 탄식했다.

“아!”

특히 최주호 마케팅 팀장은 얼마 전에 재정경제원에서 발표한 외국과의 생활필수품 가격 차이에 대한 자료를 떠올렸다.

“서, 설마 재정경제부가 선거 때문에 압력을 넣었다는 말입니까?”

“그게 합리적인 답변일 겁니다. 그건 곧 있을 LC 전자를 비롯한 다른 업체 반응 보면 알 수 있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최민혁은 마치 확신하듯 단언했다.

“그건 우리 KM 전자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지금 당면한 일본 업체의 공격 외에 정부 압력 요인이 맞으면 제품 가격 인하 변수를 넣어야 합니다. 원자재와 인건비 상승은 덤입니다. 그러면 수익성이 극도로 악화할 겁니다. 이 일이 드러나면, 어차피 회의를 새로 해야 할 테니까. 다음 추가회의에서는 대응책을 팀별로 따로 보강해서 다시 회의하겠습니다.”

정확히는 대응책이 별로 없다.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작년 그룹 경영 기획안을 전면 재조정해서 회사 내의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는 형태의 구조 조정이 따라야 한다. 지금처럼 한국 경제 호황기에 KM 그룹이 과감한 행동을 할 리가 없다.

천문학적인 차입금 계획도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서 최문경 부회장이 구조 조정을 용납할 리도 없고, 최용욱 회장은 반도체에 대한 꿈 때문에 무조건 반대를 외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민혁은 기존 계획을 바꿔서 최훈열 전무의 검찰 소환 사건을 좀 더 키워서 사태를 악화시킬 생각이었다.

‘첫째 큰아버지나 할아버지 반발이 만만치 않겠지만, 차라리 이번 위기를 이용하는 것이 좋겠어. 특히 박경진 재무팀장을 압박하면 스스로 무너질 테니까.’

섬뜩한 한기를 느낀 박경진 재무팀장은 최민혁 시선을 피했고, 다른 회의 참석자는 괜히 마녀사냥 당할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정말 최민혁 실장 예측이 맞을까?’

***

박경진 재무팀장을 비롯한 회의 참석자는 회의 나올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지만 LC 전자와 대운 전자가 전자 제품 가격을 대폭 인하하겠다는 저녁 뉴스를 보고서야 최민혁 예측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들은 평균적으로 무려 10% 가까이 가격을 낮춘 것이었다.

그리고 KM 그룹 기조실에서도 그제야 정부 압력 이야기가 비공개적으로 흘러나왔다.

‘맙소사 정말 최민혁 실장 말대로잖아. 아니 도대체 이 사실을 어떻게 안 거야? 설마 오성 전자 쪽에 인맥이라도 있는 건가?’

오성 전자 내부에서도 보안이 유지될 일인데, 그것을 사전에 알았다면 꽤 높은 고위직이어야 한다. 설사 이게 사실이라면 더 놀라운 일이었다.

회사에 나가서 만난 다른 팀장은 하나같이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최민혁 실장 정보통이 뭘까요?”

“설마 재정경제부에도 아는 인맥이 있는 걸까요?”

“그런데 진짜 큰일입니다. 이 일은 이제 우리 선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회사 차원에서 결단이 필요합니다.”

“최 실장님은 설마 이런 상황까지 예측한 것일까요?”

쉬쉬한 이들 대부분은 최민혁 실장을 들이박은 박경진 재무팀장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회사를 오가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최민혁이 아예 숨김없이 그대로 박경진 재무팀장에 대해서 씹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 팀장은 내가 절대로 그냥 안 둔다.”

큰 충격을 받아서 위기감을 느낀 박경진 재무팀장은 다급하게 최훈열 전무 사무실을 찾았다. 검찰 소환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른 이재상 비서가 아예 사무실 입구에서 막았다.

“박 팀장님, 지금 전무님이 급한 일 때문에 시간이 없습니다.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 그때 다시 와주셨으면 합니다.”

일방적인 축객령이었는데,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이보게, 이 비서, 나랑 전무님과의 관계를 잘 아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나올 건가? 최 실장과 관련해서 한 말도 있어. 그러니 전무님에게 말해주게.”

최 실장 이야기를 듣자 이재상 비서 표정이 차갑게 바뀌었다.

“안 됩니다!”

“그러면 검찰 소환에 대한 것만이라도 말해줄 수 없는가?”

아는 지인 통해서 급한 불을 꺼서 며칠을 번 이재상 비서는 지금 검찰 소환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을 준비 중인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 대상이 최훈열 전무 지시를 받아서 움직인 박경진 재무팀장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죄송합니다.”

몇 번이나 부탁한 박경진 재무팀장은 직장 생활에서 생존을 위한 선택을 할 때 느낀 위기감으로 가슴 한구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 알겠네. 꼭 좀 바로 연락 주게.”

***

평소와는 전혀 다른 이재상 비서 반응에서 심각한 공포마저 느낀 박경진 재무팀장은 온종일 회사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는 뒤늦게야 최악의 경우를 떠올렸다.

‘설마 나에게 다 뒤집어씌울 생각은 아니겠지?’

불안한 상념은 서서히 떠올랐지만, 점점 그 덩치를 키워나가서 박경진 재무팀장의 이성을 서서히 잠식하기 시작했다.

겉보기와는 달리 여성처럼 감정이 여린 박경진 재무팀장은 집에 와서도 회사 일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여보, 당신 무슨 일 있어?”

“별일 아냐.”

“또 회사일 때문에 그래?”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당신 또 그런다. 다음 주에 내 동생 결혼식 날 인 것은 잊지 않았겠지?”

“어, 그래.”

“여보!”

아내 목소리가 심상치 않자 박경진 재무팀장은 다급하게 아내를 다독였다.

하지만 아내는 이미 이와 유사한 일을 경험해봤기에 평소처럼 바가지를 긁지 않았다.

“미안해. 당신 사회생활 힘든 것도 생각을 못하고, 내 입장만 생각해서.”

“지금은 좀 시간을 둬.”

“정말 무슨 일 있구나?”

“하아.”

깊은 한숨을 내 쉰 박경진 재무팀장은 결국 참지 못하고 담배를 꺼내서 집 밖으로 나가서 한동안 밝은 달을 올려다보았다.

‘하긴 나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이제까지 지켜본 최 전무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야.’

순간 팀장 회의에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나대다가는 훅 갈 수도 있다고 경고한 최민혁 실장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설마 이 상황까지도 예측한 것일까?’

처음에는 그도 선각자 최민혁 실장 모습을 상상하면서 피식 웃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불안감이 그의 가슴을 좀 먹었다.

특히 회사 내에 서서히 돌기 시작한 검찰 수사 소문이 문제였다.

음주 운전 한 번 해보지 않았던 박경진 재무팀장이 감옥이라는 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검찰 수사 두려움에 우울증까지 느낀 박경진 재무팀장은 다시 한 번 최훈열 전무에 대한 과거를 떠올리면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대로는 안 돼. 차라리 다른 대안을 찾는 것이 훨씬 나아.’

결국 그 대안으로 떠오르는 사람은 요즘 최훈열 전무와 맞장떠서 싸우고 있는 최민혁 실장이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이 마주한 최민혁 실장은 나이로 척도를 잴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일단 가서 부딪쳐 보자.’

***

“박경진 재무팀장이 왔다고요?”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김명준 과장도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잠깐 뵙고 싶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감정이 섬세한 사람이라고 들었지만 이런 반응은 뜻밖이군요.”

“어떻게 할까요?”

“재무팀장과 기획실장이 만나는 게 뭐 이상한가요.”

“하지만 최 전무 입김이 있는 자라서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하지만 이미 꿈속에서 배신은 지겹게 당해본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는 누구보다 지금 자신이 번거롭게 임직원에게 신뢰를 얻는 것이 결국 타인의 배신에 대한 보험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사람 마음은 늘 변하게 마련입니다. 아, 김 과장님만 빼고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오혜정 비서의 안내를 받아서 들어온 박경진 재무팀장은 팀장 회의 때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창백한 안색만 봐서는 병색이 완연해 보였다.

턱을 쓰다듬으면서 오혜정 비서가 타온 커피를 홀짝이던 최민혁은 묘한 시선으로 자기 맞은 편에 앉은 박경진 재무팀장을 쳐다보았다.

위기 상황이 생기면 틈이 생기리라는 것을 예측했지만 벌써 나타날지는 예측하지 못했다.

‘하긴 검찰 수사 한 번 받아보지 못한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이지. 처벌보다는 검찰 수사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무서울 테니까.’

“지난 팀장 회의 일은 사과하러 왔습니다.”

“감정이 욱하다가 생긴 일이니,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작 그 일 때문에 오신 것은 아닐 텐데요?”

“그게 사실은......”

역시 아직도 심적 갈등을 겪고 있는 박경진 재무팀장은 망설였다.

최민혁은 굳이 그런 그를 굳이 소극적으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최 전무 검찰 소환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겁니까?”

“......네.”

“혹시라도 그 소환장에 팀장님도 연루되었을까 걱정한 겁니까?”

그는 대답보다는 약간 충격을 받아서 입만 뻥긋거렸다.

“혹시 검찰 소환장이 어떤......”

“맞아요. 불법 은행 대출 때문입니다.”

“아.”

최민혁은 다행히 은행 일이라서 자신과는 관련이 없다고 확신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뒤늦게 커피를 홀짝이는 박경진 재무팀장에게 일축했다.

“그 불법 대출 자금 출처를 검찰에서 수사하게 되면, 아마 회사 재무나 회계 관련 부분도 들여다볼 확률이 높습니다.”

“코, 콜록, 커, 커컥.”

커피가 목구멍에 걸린 박경진 재무팀장은 계속 기침하면서 다급하게 오혜정이 내온 냉수를 마시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렸다.

하지만 더 창백해진 안색은 마치 시체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고, 얼굴은 온통 식은땀 범벅이었다.

최민혁은 피식 웃다가 스트레이스 한 방을 슬그머니 날렸다.

“그러게 왜 건실하게 회사 생활하시지, 엉뚱한 짓을 하셨습니까.”

미끼를 문 박경진 재무팀장은 반사적으로 말하다가 자기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저, 전 함부로 불법을 저지른 적은 절대로 없습니다. 최 전무님의 일방적인 협박이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

뜻밖의 사실을 안 김명준 과장 동공이 동그랗게 커졌다.

설마 박경진 재무팀장이 저렇게 쉽게 사실을 일부 시인할지는 상상도 못해서 이 사태를 만든 최민혁을 감탄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실제로 박경진 재무팀장을 더 압박하지 않았다. 차분한 어조로 앞으로 있을 검찰 수사 시나리오로 설득하기보다는 사실만 말해주었다.

“아마 최 전무는 불법 은행 대출과 연구소에서 전용한 예산을 빼돌린 모든 범죄 행위를 박경진 재무팀장님에게 뒤집어씌울 겁니다. 그게 사실 둘째 큰아버지가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죠. 제가 클럽 마약 수사를 받은 것도 비슷합니다.”

“......”

협박보다 더 무서운 진실이라는 날이 시퍼런 칼날에 박경진 재무팀장은 충격을 받아서 마치 망부석처럼 넋을 잃고 말았다.

< #02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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