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1 >
최민혁의 10년 삶은 감옥 인생이었지만 그 이후 삶은 아니었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 최민혁은 뜻밖에 할아버지의 비자금 일부를 얻었고, 몰려드는 채권자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국외로 떠났다.
그 비자금으로 미국, 유럽, 동유럽, 중동을 전전하면서 다양한 사업을 진행했지만 결국에 전부 다 말아먹고 말았다.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돈보다는 신뢰 부재였다. IMF 이후에 한국에서 망해버린 서자 출신의 재벌 3세를 신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최민혁은 비자금을 다 탕진하고 나서야 투자를 비롯한 사업 역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큰아버지 영향력 배제 과정에서 얻어야 할 결과고, 그렇게 보면 KM 전자 처리야말로 내 평가 척도야. 이게 잘 되면 앞으로 해외 투자도 쉽게 갈 수도 있어.’
KM 전자가 망한다고 해서 그에 대한 믿음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는 KM 전자가 파산하더라도 그의 노력이 어떠한가가 더 중요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KM 전자 내의 묵묵히 자기 맡은 자리에서 노력을 아끼지 않는 임직원에 대해서는 배려를 해주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하는 짓을 봐서는 전부 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확신했다.
지난주에 있었단 간단한 업무 브리핑에 각 팀장이 나서서 발표할 때도 묵묵히 그들의 이름과 분위기를 필기했다.
처음에는 최민혁 눈치를 보던 팀장도 회의가 초반을 넘어서자 결국 중요한 현황에 대해서 참지 못하고 나서는 이가 있었다.
보통 사람 같은 느낌을 주는 조정욱 인사팀장이었다.
“지금까지 올해 상반기 인사팀에 관한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그런데 보고 내용 중에 이미 언급했지만 올 상반기 충원 인원은 모두 58명입니다. 하지만 올 사업 계획서와는 달리 지금은 비상 시기입니다.”
KM 그룹 채용이 아니라 KM 전자 채용 인원 숫자가 58명이라는 말과 관련이 없는 부서 팀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미 보고 할 때부터 이 숫자를 확인한 팀장은 의아한 눈으로 조정욱 인사팀장을 쳐다보았다.
“너무 많아서 이상해 보이겠지만 TV 사업부를 비롯한 중요한 부서에서 적지 않은 인원이 그만뒀습니다. 특히 TV 사업부 연구원 중에 12명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최민혁은 이미 회사 분위기를 느꼈지만, 혹시나 해서 질문했다.
“퇴직 사유는 뭐라고 합니까?”
조정욱 인사팀장도 잠깐 멈칫했지만 사실을 털어놓았다.
“TV 사업부 대다수는 미래가 없거나 제대로 된 대우를 못 받은 것 때문입니다.”
이 외에 급여를 비롯한 현실적인 문제를 걸고넘어진 이도 있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이 문제를 단순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거야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회사가 적자 난다고 해서 그만둘 것 같으면, 아마 직장인 중에 1/3은 다 그만둘 겁니다.”
“그게......”
상대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자 최민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58명 인건비 부담이 어느 정도인지 누구보다 잘 아시는 팀장님이 그렇게 모호한 태도를 취하면 어떻게 합니까? 명확한 이유를 말해야 다른 팀에서도 공감할 겁니다.”
“......TV 사업부에서 대부분의 매출을 차지하는 대형 TV를 개발한 팀이 그 실적을 도둑맞은 것 때문에 도저히 회사에 다닐 수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최민수에게 들었던 내용 중에 일부를 떠올리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 조성도 연구소장이 TV 개발 실적을 인정받아서 승진한 것 아닙니까?”
조성도 연구소장은 팀장 시절에 중형 TV를 주로 담당했는데, 그 결과는 다른 기업에 밀려서 다 망해버리고 말았다. 그는 프로젝트가 중간에 중단되자 슬그머니 대형 TV 쪽에 합류했고, 연구소에 자기 사람을 심고 싶었던 최훈열 전무의 도움을 얻어서 연구 결과를 가로챈 것이다.
조정욱 인사팀장도 면담에서 들었지만, 팀장 회의에서 그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저도 자세한 것은 잘 모릅니다. 다만 면담 결과가 그렇다고......”
“흠.”
최민혁은 최훈열 전무 라인이 조성도 연구소장과 딜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휴, 남의 실적을 도둑질한 거였어?’
그러면 이야기가 또 다르다.
당장 올해 사업 예산 중에 꽤 큰 포지션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연구소다. 미래 먹거리를 위해서 보통 이쪽 분야는 오히려 회사가 어려울수록 더 투자하지만 그렇게 적용할 수가 없다.
최민혁은 생각 없이 질문한 한 가지 일에서 썩은 부위가 드러났지만 덮어들 수가 없었다.
“결국 사업부 내의 구조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일 수 있으니, 상반기 충원은 일단 모두 보류하세요.”
갑자기 상반기 채용을 멈추라는 지시에 놀란 조정욱 인사팀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역시 적지 않게 퇴직한 영업팀을 책임진 김부영 영업부장이 바로 소리쳤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저희 영업팀도 과장급 인력이 그만둬서 당장 영업에 차질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빨리 충원해야 합니다.”
최민혁은 TV 사업부 문제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서 해결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차라리 인력이 줄어든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해는 합니다만 왜 그분들이 그만뒀는지는 영업팀장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인력으로 힘들겠지만 꾸려가세요.”
그들 대부분이 그만둔 이유는 계속 줄어든 영업 실적 때문인데, 이것은 영업팀 문제가 아니라 회사 경영 문제였다.
그렇다고 여전히 꾸준한 매출이 유지되고 있는 TV 사업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지금 인력으로는 감당이 안 됩니다!”
“당장 하반기 들어가면 자금 회전에 여유가 없어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 하지만......”
최민혁도 웅성거리기 시작한 회의실 분위기에 한걸음 물러났다.
“좋습니다. 인사팀장님은 58명 퇴직 사유와 신규 인원에 대해서 다시 구체적으로 각 관련 부서와 협의해서 이야기해서 보고를 올리세요.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최소한 이틀은 주셔야 합니다.”
“하루로 하죠. 내일 이 시간에 다시 회의하겠습니다.”
곧 최민혁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조성돈 팀장과 박상기 차장은 슬그머니 최민혁 뒤를 따라서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그들은 이번 연구소 문제와 관련해서 최민혁 옆에 바짝 붙어서 설명했다.
“......”
회의실에 남은 이들은 다들 만만하게 본 최민혁이 첫 팀장 회의를 간단하게 끝내지 않아서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특히 재수 없이 그 대상자가 된 조정욱 인사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 실장님이 정말 대학교 1학년 맞습니까?”
“그걸 인사팀장님이 물어보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습니까.”
그는 회의 시작부터 괜히 최민혁에 대해서 말이 많았던 박경진 재무팀장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박경진 재무팀장 역시 당황하기는 매 한 가지였다.
***
최민혁이 굳이 팀장 회의를 중간에 자른 것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 오히려 반발이 심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최훈열 전무 라인에 선 이들을 정리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많은 임직원마저 배척할 수는 없었다.
이 구분이 애매했다.
그런데 인사팀장이 뜻밖에도 시작할 수 있는 소스를 제공했다.
최민혁은 김명준 과장에게 지시해서 연구소 내에 있었던 일을 파악했고, 58명의 퇴직자 조사 결과를 인사팀에서 받아서 재확인했다.
이 모든 사태의 발단 역시 최훈열 전무가 제공하고 있었다.
‘불법 비자금만 봐도 결국 연구비 예산을 착복하기 위해서 연구소장까지 자기 입맛대로 임명하고, 반대 임직원을 차별한 것이 분명해. 그러니 참다 못해서 회사를 때려치우지.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으면, 박두영 부장검사는 좋아하겠어.’
대충 분위기를 파악하자 어제와는 사뭇 어수선한 팀장 회의 분위기부터 살폈다.
적지 않은 팀장은 이미 최훈열 전무의 중앙지검 소환에 대해서 아는 눈치였는데, 반응이 예상한 것과는 좀 달랐다.
어떤 이는 회사 미래에 대해서 걱정했고, 다른 이들은 최훈열 전무에 대해서 우려했으며, 마지막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팡질팡하는 이들이다.
어제 일 때문에 감정이 쌓인 김부영 영업팀장은 이미 회사 내에 악명(?)이 자자한 최민혁 실장 소식도 들어서인지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솔직히 최훈열 전무가 비록 문제는 많지만 그래도 최민혁보다는 났지 않을까 생각해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지난 미팅과는 다른 문제를 걸고 넘어갔다.
“오성 전자가 현재 판매되고 있는 TV 전 모델에 대해서 7% 가격 인하를 단행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래요?”
최민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인사 충원 때문에 뒤늦게 추가 조사를 해서 머릿속이 복잡한 조정욱 인사팀장은 자기 분야가 아니지만,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일본 업체의 압박도 있는 상황에서 오성 전자의 공격적인 마케팅은 심각한 문제라고 봅니다.”
지난 팀장 회의 주제를 비켜난 측면 공격에 심드렁한 최민혁 역시 예민한 인원 충원 문제에 대해서 어차피 다른 임원 동의를 구해야 했는데, 굳이 태클 거는 팀장이 없어서 언급하지 않았다.
‘오영근 사장이나 문형섭 부사장도 인원 동결을 순순히 허락할 것 같지 않아. 그런데 TV 사업부는 이 시기라면 가장 비싼 가격에 팔아 치울 수 있어. 결국, 사전 정지 작업으로 인원 충원은 질질 끌 수 밖에 없다는 건데.....’
“심각하죠.”
타인을 대할 때 워낙 부드러운 말투를 사용해서 평사원 같은 느낌을 주는 최주호 마케팅팀장이 인사 문제만큼은 그대로 진행하고 싶어서 이 묘한 분위기를 깨지 않았다.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우리 회사 제품이 오성 전자에 비해서 비교 우위에 있는 것이 가격인데, 그것마저 낮추면 답이 없습니다.”
최민혁은 오성 전자의 갑작스러운 가격 인하를 듣자 다른 요인 때문이라는 것을 이미 연상했다. 오히려 김부영 영업 팀장이 그 사실을 모르고 하는 말인지 궁금해서 지켜본 것이다.
적당한 선에서 거리를 두려고 했다.
“물론 경쟁사에서 가격을 내려서 우리 회사 매출에 영향을 주니,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어쩔 수가 없어요.”
최민혁도 별로 뾰족한 대안이 없어 보이자 눈치만 보던 박경진 팀장이 맞받아쳤다.
“아니 회사의 중단기 정책을 수립하는 실장님이 그렇게 소극적으로 말씀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최민혁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침까지 튀겨가면서 자신을 공격하는 박경진 팀장을 쳐다보았다.
총 맞을 각오를 한 채 나서기는 했지만, 총부리 코앞에까지 다가섰다가 것을 깨달은 박경진 팀장은 그제야 눈치껏 뒤로 물러났다.
팀장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최훈열 전무 직속 라인인 박경진 팀장이 숨김없이 그대로 나대는 것이 후계 갈등이 첨예한 대립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저 눈동자만 굴렸다.
물론 지금 이 자리에서 최민혁 실장을 처음 만난 팀장은 다들 머리를 굴린다고 정신이 없었다. 대충 돌아가는 사정을 듣기는 했지만 아직은 최훈열 전무가 여전히 최민혁 실장보다는 위였다.
최민혁을 압박해서 최훈열 전무에게 점수를 따야 할지, 아니면 20살 핏덩이 실장에게 라인을 갈아타야 할지 고심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외부 변수가 생겼으니,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심지어 최민혁 실장은 본인이 지적한 인사 문제를 언급하지 않아서 어리둥절했다.
‘인사 충원 문제가 더 급하지 않았나?’
최민혁은 적군, 아군, 그리고 중도로 나누어진 세 부류를 확인하자 골치가 아팠다. 그들이 딱히 무능해서도 아니라 너무 타성에 젖은 것 때문이다.
그도 어지간하면 최훈열 전무 외에는 손을 대지 않으려고 한 마음을 바꾸어서 우선 박경진 재무팀장을 쳐다보았다.
그 차가운 시선에 움찔 놀란 것도 있지만 최훈열 전무의 중앙지검 소환 소식에 충격받은 박경진 재무팀장은 시선을 피했다.
“박 팀장님.”
“네?”
“왜 오성 전자 같은 기업에서 갑자기 가격 인하를 전격 단행했다고 생각합니까?”
그는 괜히 최민혁 시선에 오히려 반감을 느껴서 일축했다.
“그거야 우리 KM 전자를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팀장은 다들 두 사람의 싸움을 불구경하듯이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잠깐 간섭했던 조정욱 인사팀장은 슬그머니 물러났고, 갈팡질팡하던 다른 팀장 역시 분위기를 지켜보기로 했다.
이번 팀장 회의에 참석한 차장급 실무진 역시 다들 악명이 자자한 최민혁 실장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들은 늘 사람 좋은 얼굴을 해서 겉으로는 이리저리 호구 취급당하지만 만만한 사람이 아닌 조성돈 기획팀장이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을 기억했다.
그 당사자인 조성돈 기획팀장과 박상기 차장은 심상치 않은 최민혁 행동에 아예 완전히 물러난 채 구경만 했다.
‘쯧쯧, 하긴 겉으로만 보면 저 외모에 속아서 얕잡아 볼 수도 있지. 당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
이미 무대가 조성되었다고 판단하자 최민혁은 노골적으로 한 숨을 내쉬었다.
“오성 전자가 무슨 구멍가게입니까. 3%만 가격을 내려도 그들이 얻은 이익은 수백억 가까이 줄어듭니다. 7%면 얼마나 큰 손실을 보게 될지 예상이 갑니까? 그런데 그들이 무슨 국민 호구도 아닌데, 천문학적인 손해를 보고 TV를 팔겠습니까?”
아주 상식적인 공격에 아차 싶은 박경진 재무팀장은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것은 그만큼 우리 KM 전자의 TV 사업부 원천기술을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상하게 불안한 박경진 재무팀장 표정에서 한 가지 사실을 뒤늦게 눈치채자 목소리를 좀 더 올려서 압박했다.
‘켕기겠지. 가만 불법 은행 대출 자금은 정치 자금하고 관련이 있지만, 연구소 예산 횡령은 이야기가 좀 다르잖아. 이건 검찰에서도 봐주고, 말고가 아니잖아.’
“그게 최선을 다한 생각입니까?”
“그게......”
박경진 재무팀장은 당황해서 식은땀마저 흘리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격적인 최민혁의 차가운 시선에서 불안을 느꼈기 때문이다.
< #02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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