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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0화 (20/1,021)

< #020 >

최민혁은 슬쩍 대화하기 시작하면 흥분해서 쌍욕 폭탄을 터트릴까 싶어서 김명준 과장 뒤를 돌아서 슬그머니 물러났다.

겁먹었다고 판단한 최훈열 전무는 마치 낮술이라도 한 사람처럼 툴툴거렸다.

“어이, 최민혁, 네가 지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나 본데,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네.”

그가 딱히 최훈열 전무가 부담스럽거나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괜히 할아버지 귀에 앞으로 터질 일에 자신이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이 들어간 것을 염려했다.

최훈열 전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몰래 사건을 만든 배후로 의심받을 소지가 다분했다.

더욱이 지금쯤이면 입질(?)이 올 때가 되었는데, 괜히 남의 집에 폭탄이 터질 때 옆에 있다가 굳이 유폭에 피해를 볼 이유는 없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말처럼 이재상 비서가 허겁지겁 나타났다.

“저, 전무님, 크, 큰일 났습니다.”

“최민혁, 저 자식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어!”

혼비백산한 이재상 비서는 최민혁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것까지 간과했다.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중앙지검에서 출석통보를 해왔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모르겠습니다.”

다급한 이재상 비서 때문에 혼란한 최훈열 전무는 따가운 시선을 뒤늦게 알아채자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툴툴거렸다.

“시간을 확보해야 하니까. 지금 우리 회사 사정 때문에 일본으로 출장을 가야 한다고 날짜를 늦추거나 변경해봐.”

“담당 검사가 출석하지 않으면, 수사보고서를 작성해서 체포영장을 신청하겠다고 엄포를 놨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도주의 우려가 있으면 하는 검찰의 행동이었다. 즉 구속 영장이 발부될 확률이 높다는 의미다.

최훈열 전무의 사회적인 직위를 고려해서 출석 요구서를 발부한 것이었다.

그도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모르겠습니다.”

“일단 전화를 한 번 해봐. 아니 가서 다시 이야기하자.”

그는 다급하게 움직이려다가 묘한 두 쌍의 시선을 보자 뒤를 돌아보았다.

최민혁 얼굴이 마치 억지로 웃음을 참는다고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차마 최훈열 전무의 출석 요구 소동에 웃지 못한 것이었다.

“이 새끼가, 두고 보자!”

최민혁은 그가 사라지자 결국 배꼽을 잡고 웃고 말았다.

김명준 과장 역시 웃기는 했지만 지나친 최민혁 행동에 질책했다.

“어찌 보면 회사 차원에서도 심각한 일인데, 그러셔야 하겠습니까.”

“아뇨. 일단 최훈열 전무가 중앙지검에서 수사를 받기 시작하면, 회사 내에도 곧 알려질 겁니다. 결국 최훈열 전무는 경영에 손 떼야 할 테니, 오히려 회사 입장에서 이익입니다.”

그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결국 최 전무가 없어서 당면한 문제를 풀기 좋다는 말이군요.”

“그런 셈입니다. 아마 문형섭 부사장이나 오영근 사장님도 부담을 덜 겁니다.”

***

검찰에서 소환장을 받은 일은 KM 전자 내에 바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이 사실을 잘 모르는 문형섭 부사장은 김현우 상무의 압박에 이를 갈았고, 다시 사장실을 찾아갔다.

오영근 사장도 한숨을 내쉬었다.

“......최 전무에게 TV 사업부 적자에 관한 책임으로 사퇴를 받기 위해서는 김현우 상무는 물론이고, 그 배후에 있는 최두진 사장을 견제해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명동 사채업으로 유명한 최두진 사장은 최용욱 회장의 고향 친구로 KM 그룹 시작할 때부터 투자 명목으로 막대한 지분을 사들였다.

그가 미는 사람이 바로 김현우 상무였다.

“김현우 상무도 회사 내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설사 김현우 상무가 문제 많아도 경영권을 간섭할 수 있는 최두진 사장 마음이에요. 회장님도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회사 내부에 암적인 존재가 될 일을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허 참, 아실만한 분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늘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오영근 사장은 잠깐 시간을 둬서 문형섭 부사장이 흥분을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허허, 문 부사장님 사업부가 잘 나가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이 사업이란 게 잘 될 때가 있으면, 안 될 때도 있는 법입니다.”

하지만 이미 달리는 말에 올라탄 문형섭 부사장 생각은 달랐다.

“지금은 그런 부침이 아니라 배에 구멍이 나서 침몰하는 점을 지적한 겁니다.”

“부사장님!”

“비록 오너 일가라고 해도 최민혁 이사는 이제 스물 남짓한 젊은 친구입니다. 그런 이가 우리 KM 전자의 몰락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회사의 한 축을 담당한 저 같은 사람이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최민혁’ 이름 석 자를 듣자 머리가 지끈한 통증에 오영근은 이마를 짚었다. 그 역시 감사실을 비롯한 다른 라인으로 이미 돌아가는 회사 이야기를 다 듣고 있기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은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어린아이입니다. 왜 지금 자리에 앉았는지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친구가 알아봐야 얼마나 안다고......”

“제가 기조실 친구에게 듣기로 40억 투자해서 한 달 만에 70억을 벌었다고 하더군요. 최소한 사업을 보는 안목은 있습니다.”

“네?”

“역시 사장님도 감을 참 많이 잃었습니다. 전 최훈열 전무의 여자 문제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는 점을 지적한 겁니다. 회장님은 자신의 둘째 아들이라서 감싸려는 점을 이해하지만, 그 때문에 KM 전자가 침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목이 찢어지라 소리치는 문형섭 부사장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늘 화 안 번 내지 않아서 보살이라는 별명까지 있는 오영근 사장 역시 미소를 지우고 말았다.

“문 부사장님, 인제 와서 무슨 말씀을 하는지 아십니까?”

“압니다. 제가 비겁했습니다. 손동권 전 기획실장이 그렇게 나설 때 뒤에서 밀어줘야 했습니다. 그 친구가 그렇게 부탁할 때 손을 잡아줘야 했습니다.”

지난 일을 자책한 문형섭 부사장은 냉수를 벌컥 들이킨 후에 계속 말했다.

“지금도 많이 늦었다는 것을 알지만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너 일가가 아니라서 안 된다. 좋습니다. 그러면 차라리 저는 최민혁 실장을 밀어주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KM 전자 내부 문제를 이미 알고 있는 회장님도 수긍할 겁니다!”

“......이거야 원.”

“적군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능한 아군입니다.”

“끙.”

“전 사장님만 믿겠습니다.”

문형섭 부사장은 마지막 선고만 남기고 떠났지만 저기서 멈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는 회사 내부에 자기 측근을 더 키워서 대항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 회사 갈등이 심해질 것이 뻔하다는 것을 예측한 오영근 사장은 착잡한 표정을 한 채 고민했다.

이 사태 갈등 유발자인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문득 최민혁 실장이 자리에 앉은 이후로 한 번도 보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정신이 나갔군.’

결국 한선화 비서를 호출해서 일단 최민혁 실장 근황부터 물었다.

“요즘 최 실장은 뭐 하고 있어?”

비서실 직원끼리 사전에 일정을 교환하는 덕분에 한선화 비서는 제법 많은 것을 알았다.

“오늘은 일본 업체 압박에 대한 긴급 팀장 회의를 하고 있을 겁니다.”

“아, 그런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회사 기획을 담당하는 기획실장이니, 위기 상황에 대해서 사전에 대처해야 하니까.

오영근 사장은 이상하게 껄끄러운 최민혁 실장을 부를까 고민했다. 최민혁 실장은 애초에 실권이 없기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은 따로 자신에게 최민혁에 대해서는 신신당부했다. 그의 기획실장 업무를 돕는 것이 아니라 회사 경영이 얼마나 살벌한 것인지 경험 쌓도록 도와주라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실장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 대리 직급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했는데......’

상황이 꼬이고 꼬여서 이제 그 자신조차 최민혁 실장이 만만치 않다고 느꼈다. 솔직히 후계 갈등은 고사하고 뒤통수 맞아서 절망할까 걱정했는데, 웬걸 최훈열 전무와 아예 대놓고 싸웠다.

그 결과는 황당하게 최민혁 실장의 판정승이었다.

한선화 비서가 깊은 상념에 잠긴 오영근 사장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장님, 최 전무님에게 검찰 소환장이 왔다고 합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한선화 비서도 이미 오영근 사장이 얼마나 최훈열 전무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것을 알기에 다른 비서 통해서 얻은 이야기를 넌지시 말했다.

“저도 자세한 것은 잘 모르는데, 소환장 때문에 지금 최 전무님 사무실이 이 일 때문에 발칵 뒤집혔습니다.”

오영근 사장도 눈치 빠르게 비서끼리 채널 통해서 비공식적으로 정보를 얻었다고 느끼자 그 출처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엔화절상으로 말미암은 대응책 때문에 회사 분위기는 벌집을 쑤신 듯이 난리였다. 이미 대책을 찾기 위해서 전사적으로 움직이는 중이다.

이번 사업부 회의에서도 그 안건이 다루어질 것이고, 최민혁 실장은 당연히 그 자리에 나올 것이다. 즉 원칙대로라면 최민혁이 정신없이 바쁠 시기였다.

오영근 사장은 영 불편한 최민혁 실장 면담을 다음으로 미루기로 마음먹었다.

“허허, 내가 정신이 하나도 없어. 최 전무 일이나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

기획팀은 회사 비상 시기라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면서 대안을 연구했다. 그들은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팀장 회의도 소집했다.

조성돈 팀장은 박상기 차장과 같이 자신이 주도한 미팅 분위기를 볼 겸 20분 일찍 회의장에 나갔다.

벌써 나타난 팀장은 어수선한 회사 분위기 때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에 특히 최훈열 전무 라인이라 알려진 박경진 재무팀장은 비웃듯이 말했다.

“여, 조 팀장 아닌가.”

주로 회사 회계, 세무, 자금 업무를 담당하는 재무팀장 박경진은 회사 내부 돈줄을 쥐고 있는 터라 회사 내에서도 파워가 만만치 않다.

그걸 잘 아는 조성돈 팀장은 굳이 공격적인 반응에도 상대하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회의실 맞은 편에 앉은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는 박경진 재무팀장은 피식 웃었다.

“그게 이 사단을 만든 기획팀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최 실장이 출근한 날부터 계속 시끄럽습니다. 회사 분위기가 난장판입니다. 이 모든 사태가 기획팀에서 애송이 실장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 때문 아닙니까.”

매섭게 쏘아붙이는 상대 행동에도 조성돈 팀장은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박경진 재무팀장을 자극했다.

“도대체 실권도 없는 애송이가 감히 회사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최훈열 전무님에게 하는 행동이 그게 뭡니까. 부모가 없이 커서 그런 겁니까?!”

“......”

조성돈 팀장도 그렇지만 박상기 차장도 그저 침을 튀기면서 최민혁 실장을 마구잡이로 씹어대는 박경진 재무팀장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그게 또 이상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오늘 팀장 회의에 뒤늦게 나타나기 시작한 실무진도 박경진 재무팀장이 자기 보스를 공격한 최민혁 실장에게 분노해서 저렇게 설친다는 것을 다는 알기에 서로 눈치만 보았다.

실제로 고개를 암묵적으로 끄덕이면서 공감하는 이도 꽤 있었다.

회사 내부에서 도는 소문에 의하면 너무 어린 나이의 최민혁 실장 행동에 부정적인 사람이 많았다.

팀장 회의에 참석할 사람이 대부분 참석해도 여전히 분위기는 뜨거웠다.

물론 박경진 재무팀장 나 홀로 설쳤다.

하도 혼자 떠들다가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을 안 박경진 재무팀장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조성돈 팀장은 마치 전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한마디 했다.

“실장님이 곧 도착하실 겁니다.”

바로 회의실 문이 열리면서 최민혁이 조용히 나타났다.

다들 눈치만 봤지만, 조성돈 팀장과 박상기 차장이 먼저 일어나자 다들 우르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자신을 따른 사병 집단을 접한 듯한 감정을 느낀 최민혁은 회의실 상석에 앉으면서 손짓했다. 그는 마치 왕좌에 앉은 왕과 같은 대리만족이 그다지 싫지만은 않았다.

‘이래서 돈보다는 경영권에 집착하는 걸까?’

“앉으세요.”

묘한 분위기에 다들 힐끗 말 없는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들도 무성한 소문만 들었는데, 정작 대면한 최민혁 실장에 대한 첫인상은 어리다였다.

아니 어려도 너무 어렸다.

이제 대학교 1학년이었으니, 이들 중에 일찍 결혼한 아이 나이가 최민혁보다 많은 예도 있었다.

아무리 오너 일가라고 하지만 자기 아들 또래를 실장으로 모셔야 한다는 자괴감에 만감이 교차했다.

‘오성 전자는커녕 아무리 막장 중소기업이라도 이 정도는 아닌데......’

그들은 뒤늦게야 박경진 재무팀장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

최민혁은 흥분해서 붉게 달아오른 박경진 재무팀장을 쳐다보면서 묘한 분위기를 읽었고, 이상야릇한 표정을 한 조성돈 팀장 모습에서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물론 덤으로 회의 분위기를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긴 최 전무를 따르는 사람이 많지. 그런데 아직 최 전무 소식을 못 들었나. 가능하면 조용히 회의만 하려고 했는데......’

“회의 시작합시다.”

***

< #02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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