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9 >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 증거 서류를 들고 사라지는 박두영 부장검사를 보던 김명준 과장은 최민혁 옆에 바짝 붙었다.
“실장님, 그 땅은 무슨 뜻입니까?”
“비밀입니다.”
“실장님.”
“박 검사 약점이라고만 아세요. 그래서 제가 저분을 좋아하는 겁니다. 약점이 너무 많아서 부려 먹기 딱 좋으니까요. 배신할 것 같으면 매장해버리면 후환도 없습니다.”
그는 박두영 부장검사가 이곳에 온 것도, 협박한 것에 대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데 과연 잘할 수 있을까요?”
“쉽지는 않을 겁니다.”
“회장님 말씀하시는군요.”
최민혁도 아들을 생각하는 최용욱 회장이 어떤 행동을 할지 몰랐다.
“꼭 할아버지만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까?”
미래 일이지만 국회 청문회 당시 박두영 부장검사에 대해서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돌았는데, 그중에 하나가 검찰청 내부에 있을 때 한 일이다.
중앙지검 내부 사정에 대해서는 최민혁도 공식적으로 알지 못했다. 사실 이게 그가 굳이 청렴한 검사를 믿지 못한 이유인데, 괜히 뒤통수에 칼 맞는 검사 옆에 있다가 2차 피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앙지검 내부도 나름 복잡하지 않을까요?”
“?”
그는 소문만 무성하던 이야기라서 확신하지 못한 최민혁이 입을 다물자 더 묻지 못했다.
***
박두영 부장검사는 우선 중앙지검으로 돌아가기가 무섭게 거액 대출 커미션 김규정 대리 제보를 토대로 뚜렷한 혐의점과 명확한 증거인멸 상황을 토대로 압수 수색 영장부터 받았다.
영장을 받은 강력부는 서울은행 여러 지점을 공습하듯이 쳐들어갔다.
갑자기 들이닥친 중앙지검 강력부 검사와 수사관 때문에 서울은행 직원은 공황에 빠져서 시키는 대로 한쪽으로 물러났다.
이번 수사의 특수성을 고려해서 이례적으로 박두영 부장검사도 직접 압수 수색 현장에 나갔는데, 권종현 서울은행 역삼 지점장이 반발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괜히 일을 만들지 말고, 물러나 계셨으면 합니다.”
“당신들 소속이 어디냐?”
“중앙지검 강력부에서 나왔습니다.”
“뭐? 강력부, 정말 세상 무서운 줄 모르나 본데, 내가 누군 줄 알아?”
“누구십니까?”
“권종현 지점장이다. 잠깐 기다려 봐. 이름이 뭐야?”
“박두영 부장검사입니다.”
그는 살벌한 권종현 지점장의 행패에 위축된 검사와 수사관을 다독거렸다.
권종현 지점장은 누군가에게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서 한동안 통화했다. 그런데 그의 안색은 시간이 갈수록 좋지가 않았다.
박두영 부장검사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지만, 문제는 그 위에 있는 김종도 차장검사다. 중앙지검 특수 1, 2, 3부장을 차례로 거친 후에 대검 중앙수사부 수사기획관, 대검 공안부장을 역임한 특수통이기 때문이다.
이미 요직을 두루 거친 만큼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중앙지검 차장검사라는 애매한 자리로 옮겼다.
뇌물이나 타협을 잘 모르는 꼴통으로 중앙지검 내에서도 말이 많았는데, 중앙지검장하고도 정면에서 받아친다는 소리가 무성했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물끄러미 안색이 새파랗게 굳어 있는 권종현 지점장을 쳐다보았다.
“그래, 연락은 잘 해보셨습니까?”
너무 부드러운 태도에 얕잡아보고 덤벼들었다가 뒤늦게 현실을 깨달은 권종현 지점장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보시오. 박두영 부장검사님은 대화가 좀 되는 것 같은데......”
“저는 언제라도 소통하고 싶습니다만 알다시피 김종도 차장검사님 눈치를 봐야 합니다.”
중앙지검 부장검사 정도 되면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인데, 이상할 정도로 저자세였다. 신사적인 태도도 이상했다.
더욱이 은행 압수 수색에 본인이 직접 나올만한 일이 아닌데도 나섰다. 이 불법 대출에 고위 인사가 얽힌 내막을 알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정말 이럴 겁니까?”
“자꾸 이러면 공무 집행 방해죄도 추가될 겁니다. 어떻게 하실래요?”
그는 다른 검사와 수사관 눈치를 보다가 박두영 부장검사를 데리고 은행 한구석으로 갔다.
“그 이러지 맙시다. 박 부장검사님도 대충 알겠지만, 이 일이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압니다.”
“내가 말이 통할 줄 알았습니다. 다른 분이 알면 난리가 날 겁니다. 그러니 압수 수색도 형식적으로만 해주십시오. 제가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겉으로는 다 들어줄 것처럼 보이던 박두영 부장검사 말은 달랐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번 일은 김종도 차장검사님에게 보고가 올라갑니다. 그러니 최종 결정은 김종도 차장검사님이 할 겁니다.”
“정말 방법이 없겠습니까?”
“뭐 김종도 차장검사님에게 직접 압력을 넣으면 되지 않을까요?”
한 걸음 물러난 박두영 부장검사는 굳이 더 언급하지 않았다. 그 역시 이번 일 처리를 위해서 머리를 많이 굴렸기 때문이다.
‘날 계륵으로 취급하는 김종도 차장검사가 타격을 받는다면, 차라리 나에게 기회일 수도 있어. 비자금 관련된 이들이 김종도 차장검사를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김종도 차장검사는 그들과 싸울까? 최민혁 실장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까?’
골치 아픈 문제였지만 그에게는 그저 남의 일이었다.
***
다른 검사처럼 박두영 부장검사도 외부 외압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이용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우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전 상급자(?)에게 배웠다.
그는 김종도 차장검사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이 문제를 많이 고민했다. 이전 마약 사건이나 주가 조작 사건 만해도 범죄자는 모두 잡아넣으려고 한 김종도 차장검사와 적지 않게 갈등했다.
결국 그 윗선에서 들어온 외압 때문에 마약 사건에서 최민수나 김기범은 수사망에서 잘 빠져나갔다. 물론 주가 조작 사건에서도 김기범은 미꾸라지처럼 잘 피해 갔다.
이번 불법 은행 대출 건은 잘만 활용한다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도 있는 카드였다.
다른 꿍꿍이를 염두에 둔 박두영 부장검사는 서울은행 역삼 지점을 시작으로 해서 다섯 지점을 더 압수 수색을 진행한 후에 이와 관련된 서울은행 지점장 6명을 모두 소환해서 밤샘 조사를 진행했다.
이 와중에 별의 별 전화가 다 걸려왔지만, 김종도 차장검사에게 모든 책임을 다 떠넘겼다.
[이번 수사는 김종도 차장검사님이 직접 다 철저하게 확인합니다.]
예측한 대로 신양금속 30억 대출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KM 전자 TV 사업부 쪽에서 대출해간 돈은 무려 200억이었다.
이 돈은 수출입거래 명분으로 KM 전자 베트남 지점으로 송금되었다.
수출대금과 같은 합법적인 거래를 가장해서 송금한 이 돈은 KM 전자 베트남뿐만 아니라 동남아 지점 확장을 위해서 소진되었다.
문제는 이 지점 중에 과반수가 접었고, 무려 200억이라는 돈이 사라졌다.
결국 이 손실은 KM 전자 베트남 지점에서 떠 앉는 것으로 처리되었고, KM 전자로서는 전부 다 손실로 처리되었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예상보다 더 큰 규모의 자금세탁에 혀를 내둘렀고, 반사적으로 이 사태를 만든 최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할까요?]
최민혁도 드러난 금액이 무려 ‘200억’이라는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
[금액이 좀 크네요. 우리 큰아버지가 어쩌려고 그 사단을 벌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걸 사건 담당 검사가 저에게 물어보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습니까?]
[아, 분명히 해두지만 전 이번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진담입니까?]
[그럼요. 누가 보면 제가 검사님을 통해서 기획수사를 진행한 배후자로 보겠습니다. 세상에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도대체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제 둘째 큰아버지가 당분간 제 눈에 안 뜨이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금액이 너무 커서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그거야 법대로 하면 됩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자, 우리 부장검사님, 파이팅 하세요!]
[......네.]
***
사건의 빌미를 제공한 최민혁이 그나마 내밀었던 한쪽 다리를 거둬들인 것에 내심 당황한 박두영 부장검사도 고심했다.
아무리 봐도 사건이 커질 것 같았다.
‘뭐 차라리 잘 된 것일 수도 있어.’
결국 어느 정도 앞으로 사건 진행 방향을 내심 결정하자 결국 김종도 차장검사를 찾아가서 보고했다.
평소 좋지 않은 눈으로 보는 박두영 부장검사 모습에 인상을 찡그린 김종도 차장검사는 냉랭하게 말했다.
“제보자는 별문제 없어?”
박두영 부장검사도 최민혁을 순간적으로 떠올렸다가 머릿속에서 지웠다. 굳이 여기에 최민혁 이름을 거론해서 문제를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참고인 조사해서 확인해보니, 딱히 문제 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은행원으로 있을 때 직속 상사에게 오히려 이 문제를 걸고넘어졌다고 퇴출당했을 뿐입니다.”
“그런가. 200억이라, 많이도 해먹었네.”
“문제는 그 200억이 해외 페이퍼 컴퍼니 통해서 다시 국내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설마 정치권 쪽으로 흘러들어 갔나?”
“네.”
“그래서 자네 생각은?”
문득 이 묘한 상황에도 최민혁 실장의 오리발 신공이 절로 떠올랐다.
“저야 뭐 차장님 지시에 따라야죠.”
“흠.”
차가운 박두영 부장검사보다 더 표정이 없는 김종도 차장검사는 은근히 비꼬는 그의 말투에 눈살을 찌푸렸다.
“박 부장은 다른 의견이라도 있어?”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금액이 금액인 만큼 이것을 파기 시작하면 말이 많이 나올 겁니다.”
“설마 200억 규모의 자금세탁을 덮자는 소리야?”
“글쎄요.”
모호한 태도에 김종도 차장검사는 손바닥으로 책상을 강하게 내려쳤다.
“이봐, 박 부장, 당신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그따위로 일하다가 언젠가는 된통 당할 거야. 검사라면 마땅히 검사로서 직분을 다해야 하는 거야!”
“당연한 말씀입니다.”
“이 새끼가.”
겉으로는 수긍하는 척 대답해도 쌓인 감정 때문에 욕설까지 하는 김종도 차장검사 행동에 박두영 부장검사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 좋은 보직인 중앙지검에 온 것은 좋았지만, 상급자가 이런 꼴통이기 때문이다.
딱히 이번 일이 의도한 대로 되면 좋겠지만 안 되어도 상관은 없었다.
‘상황이 만약 최악으로 흐르면, 최 전무가 받는 타격은 엄청날 거야. 최민혁 실장은 그런 상황을 좋아하려나?’
새삼 자신이 이렇게 무리한 것도 다 최민혁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자 한숨만 절로 나왔다.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고 싶었는데, 그게 또 그럴 팔자는 아니었다.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는 모습을 본 김종도 차장검사는 차갑게 소리쳤다.
“박 부장,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 거면, 당장에 때려치워. 굳이 돈을 벌려면 변호사 하면 되잖아. 왜 힘든 검사 일을 하려는 거야?!”
“죄송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 당신이 평소에 어떤 식으로 사건 처리하는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아. 지난 마약 사건만 해도 재벌 3세에게 어떤 특혜를......”
“전 원칙대로 처리했습니다. 정 문제 삼고 싶으면, 구체적으로 지시해주십시오.”
“야, 박 부장, 너 혹시 지검장님 믿고 날뛰는 것 같은데, 정신 차려. 내가 자네 직속 상급자야!”
“전 아무런 말도 안 했습니다. 중재안을 내려준 것도 위에서 온 오더에 따랐을 뿐입니다. 차장님도 결국 묵인했지 않습니까?”
“너 이 새끼, 지금 날 놀리려는 거야?!”
지난 일의 앙금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박두영 부장검사는 아차 싶어서 즉시 꼬리를 말았다.
“죄송합니다.”
“이 새끼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분명히 경고하는데, 이번 200억 불법 자금 세탁 사건 원칙대로 철저하게 조사해, 내가 하루 단위로 수사 결과를 확인할 거니까. 명심해!”
“알겠습니다.”
그는 문득 최훈열 전무를 불러 소환 조사해야 할 상황을 떠올리자 머릿속이 지끈했다.
‘아무래도 KM 그룹 쪽에는 알려야 하겠지?’
등 뒤에서 분노한 김종도 차장검사의 욕설을 뒤로 한 채 차장검사실을 나섰다.
‘생각보다 느낌이 안 좋지만 뭐 차라리 잘 된 것일 수도 있어.’
***
최민혁은 박두영 부장검사를 만나고 난 후에 당면한 회사 내부 문제를 고민했지만 그라고 해서 딱히 대안도 없었다.
그는 날이 갈수록 지쳐가는 KM 전자 본사 임직원 모습을 지켜보았다.
도저히 답을 찾지 못한 이들에게서 시대의 변화에 따르지 못하는 아픔을 느꼈다.
막상 이 일의 근원이 된 최훈열 전무에게 새삼 욕설이 나왔다.
아침 출근 시간에 최훈열 전무를 보자 대놓고 욕할까 싶어서 피했다.
그런데 최훈열 전무는 최민혁을 보기가 무섭게 다가왔다.
“야, 최민혁!”
“네, 최 전무님.”
“요즘 잘 지낸다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난 회사를 말아먹은 역적으로 욕먹고 있는데, 너 회사 내에서도 통찰력이 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라.”
“과장입니다.”
“나에게 할 말은 없냐?”
“네.”
최민혁은 평소와는 달리 가능하면 얌전하고, 예의바른 ‘조카’ 모습을 보였다. 정중하게 대답하면서 김명준 과장이 이상한 눈으로 볼 정도로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 #019 > 끝
ⓒ SSDH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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