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8 >
몇 번 크게 질렀지만, 분위기가 점점 악화하자 뒤늦게 슬쩍 결국 꼬리를 마는 김현우 상무는 더 나서지 않았다.
그라고 해서 최두진 사장이 일방적으로 미는 이는 아니었는데, 회사 내부에 분란을 일으켰다가 거꾸로 목이 날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옆에서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한 최훈열 전무는 내심 겁 많은 돼지라고 욕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래도 김현우 상무의 초반 공격에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는 두 사람 모습에 안도했다. 당분간은 두 사람도 자신에 대한 공격을 자제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일단 시간을 벌었어.’
하지만 최훈열 전무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참석한 네 사람은 모두 ‘최민혁’ 이름을 듣기만 해도 부담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세 사람은 특히 은근히 왜 조용히 있는 최민혁을 건드려서 이토록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 최훈열 전무를 원망하듯이 쳐다보았다.
그들 역시 최민혁이 최훈열 전무와 갈등 과정에서 폭로한 사실을 다른 경로를 통해서 다 들었고, 회사 내부에서 기밀로 관리되던 보고서 내용 중에 환율 문제를 새삼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
최훈열 전무는 오영근 사장과 만남에서 원하는 것을 모두 얻지는 못했지만 일단 경영진에게 성추행 문제와 일본 업체의 압력에 대해서 제동을 건 것으로 만족했다.
그는 다시 전무실로 돌아와서도 전자는 당분간 문제가 없겠지만, 후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을 억누를 것을 염려했다.
이재상 비서도 걱정이 많아서 눈치만 봤다.
참다못한 최훈열 전무가 소리쳤다.
“다른 것을 떠나서 TV 사업부 적자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가 없어.”
“맞습니다.”
그는 최훈열 전무 말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럼에도 최훈열 전무의 초조감을 없애지 못했다. 결국, 답답한 나머지 푸념을 털어놓았다.
“오성 전자나 LC 전자의 브랜드 파워에서 밀려서 생긴 일 아닙니까. 세상 누가 와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이것은 내 책임이 아냐.”
그랬다.
애초에 오성 전자를 어설픈 수단으로 이길 수는 없었다. 최훈열 전무의 집착과 아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진행한 일이 누적되어서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뿐이었다.
책임소재를 굳이 묻는다면 최훈열 전무가 그 대상이 된다. KM 전자에 큰 손실을 입힌 최훈열 전무는 최악의 상황에 원래 받기로 한 최용욱 회장의 KM 전자 지분을 못 받을 수도 있었다.
최훈열 전무는 새삼 최민혁의 치밀한 계략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방법이 필요해. 차라리 그놈이 재판을 받고 있었다면 모두 다 그놈에게 떠넘길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한 소리에 이재상 비서 역시 공감했다.
“마약 사건으로 최 실장만 없었어도 이 문제는 생기지 않았을 텐데, 그런 아쉬움이 남습니다. ”
“마약 사건이라......”
처음부터 클럽 마약 사건과 최민혁을 연결할 계획은 없었다. 뒤늦게 이 사건이 일어나자 마침 상황이 맞게 돌아갔다.
아직도 최민혁이 그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갔는지 몰랐다.
그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부장검사님, 저 최훈열입니다. 혹시 언제 시간이 가능하겠습니까?]
[......최 전무님이시군요. 으음, 혹시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습니까?]
[전화로는 좀 그렇고, 만나 긴히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으음, 제가 여유가 안 돼서 그런데, 나중으로 미루면 안 되겠습니까?]
갑자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박두영 부장검사 행동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참았다.
[정말 급한 일 때문입니다. 제가 꼭 보답을 해드리겠습니다.]
[후유, 알겠습니다.]
***
북한산 근처의 개인 요정은 오늘따라 사람이 거의 없었다.
최훈열 전무는 박두영 부장검사 행동 변화가 찜찜하기만 했다.
마침 이재상 비서가 박두영 부장검사를 안내해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4개월 만입니다.”
“네.”
이전 만남에서는 환대를 보이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은 채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박두영 부장검사는 최훈열 전무를 대면하고서야 가슴이 덜컥거리는 충격을 느꼈다. 왜 최민혁이 자신에게 그런 행동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설마 경고였던가?’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도 다급한 최훈열 전무는 술잔을 따라주면서 개의치 않았다.
“혹시 최민혁이 어떻게 무사히 풀려났는지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박두영 부장검사 안색은 몰라보게 굳었고, 말투도 차갑게 가라앉았다.
“최민혁 실장이 마약과 관련되지 않았다는 동영상 파일이 나왔습니다.”
따박따박 ‘최민혁 실장’이라고 말하는 것이 은근히 거슬렸지만 넘어갔다.
“제가 알기로 클럽 직원 통해서 그런 파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해드릴 수 없습니다. 설마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만나자고 한 겁니까?”
“아, 아닙니다.”
냉정한 반응 때문에 당황해서 여유가 없는 최훈열 전무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렇게 급하게 보자고 한 것은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 때문입니까?”
그는 초조해서 머뭇거렸지만 결국 입을 열었다.
“최민혁 그 녀석을 어떻게 엮어서 구치소에 보낼 방법이 없을까요? 아, 굳이 꼭 감옥에 보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재판을 통해서 시간만 끌면 됩니다.”
아마 이전의 박두영 부장검사는 생각하는 척이라도 했을 텐데,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일축했다.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는 사람을 구치소에 보낼 방법은 없습니다.”
“제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최민혁과 제 관계는 잘 알 것 아닙니까. 회사에서 잠깐 내보내면 됩니다. 우리 사이에 그 정도 부탁이라면 큰 문제가......”
“그 부탁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네?”
최훈열 전무는 그제야 박두영 부장검사 말과 행동이 이전과는 완벽히 달라졌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단호하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번 일도 최민혁 실장이 마약과 관련해서 혐의점이 보였기 때문에 조사한 것이지, 꼭 최 전무님 부탁 때문에 한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현직 검사라도 없는 죄를 만들어서 재판받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이런 문제로 연락을 자제해 주십시오.”
딱 이 한 마디만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나서 떠나버렸다.
최훈열 전무가 뒤늦게 박두영 부장검사를 잡으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도대체 저놈이 왜 저러는 거야?’
***
“이것 참 습관은 못 버립니다.”
김명준 과장은 전화를 받고 나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최민혁 실장에게 말했다.
“누구 전화이기에 그렇게 고민합니까?”
“박두영 부장검사 전화입니다.”
“네? 아니 무슨 일로 실장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가 전화한 겁니까?”
“최훈열 전무를 만났는데, 그쪽에서 절 다시 구치소로 보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하네요.”
김명준 과장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가만 박두영 부장검사가 왜 실장님에게 그 사실을 알립니까?”
“눈치가 있다면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정도는 알 겁니다. 특히 한영일보 기사가 꽤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한영일보보다 앞날을 내다보는 치밀한 최민혁의 공작에 질려서 전화한 것이었다.
최민혁도 그렇지만 김명준 과장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크게 감탄하고 말았다.
“진짜 대단하십니다. 설마 이런 상황까지 사전에 예측하고 행동한 것입니까?”
“전혀 아니라고 말은 못하겠네요.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라인을 연결해놓으면, 아무래도 둘째 큰아버지 영향이 줄어들 테니까요. 최소한 고민이라도 할 테니,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기도 좋고요.”
“그랬군요.”
“하지만 엔화절상으로 손실을 본 일본 업체 압력 때문에 회사 위기가 서서히 나타난 상황에서 저에게 다 뒤집어씌우려고 나올지는 몰랐습니다.”
‘역시 사람은 바뀌지 않는구나.’
김명준 과장도 최훈열 전무의 행동에 분노했다.
“이번에도 그냥 두고 보실 겁니까?”
“아뇨. 똑같이 보복해야죠.”
그는 즉시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박두영 부장검사는 거부했다.
[죄송합니다만 이번 일에는 더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글쎄요. 요즘 박 부장검사님도 한가한 것 같던데, 재벌 2세의 불법 대출 사건이라면 흥미를 가질만하지 않을까요?]
그냥 전화를 끊을까 갈등하던 박두영 부장검사는 깜짝 놀랐다.
[네?]
[정말 관심 없으세요? 그러면 다른 동부지검이나 이쪽에 한 번 알아보죠.]
[자, 잠깐만요. 실장님, 도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마 최 전무가 불법 대출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말입니까?]
[이제 관심이 생기죠? 모레 저녁 8시에 저번에 만났던 일식집에서 뵙죠.]
[아,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최민혁은 의문이 가득한 김명준 과장 시선에 피식 웃으면서 미리 준비해둔 작년 기사 하나를 보여주었다.
[서울은행 지점 김규정 대리가 신양금속 대표 양천권씨에게 공장이전과 관련해서 커미션을 받고 30억을 대출해준 혐의를 받아서 입건되었다.]
“이게 뭡니까?”
“작년 말 기사인데, 은행 대리가 30억을 대출해줄 수 있을까요?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입니다. 신양금속은 KM 전자 측에 TV 관련 부품을 공급하고 있죠. 전 최 전무가 이 일도 관여했다고 봅니다.”
“가만 그러면 혹시 최훈열 전무가 이 불법 로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말입니까?”
“빙고. 그러면 우리 과장님이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김규정 대리를 만나서 필요한 증거를 챙기는 겁니다. 아마 적당한 돈만 준다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는 경탄한 채 신문 기사를 몇 번이나 뚫어지게 쳐다보는 김명준 과장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알기 어려울 겁니다. 커미션 대출 사건은 원래 하반기에 보도되니까요. 해당 은행원은 다 구속되었지만 최훈열 전무는 여전히 잘 빠져나갔죠.’
***
김규정 대리는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로 억울하게 은행에서 팽 당한 후에 다른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그는 뒤늦게 불법 커미션 대출에 관련된 지점장을 찾아가서 항의했지만, 경비원에 두들겨 맞고 말았다.
결국 돈이 필요했던 그는 급한 대로 일용직 노동자로 전전하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런데 지점장이 손을 써버려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김명준 과장은 원한이 머리 꼭대기까지 오른 김규정 대리에게서 3천만 원으로 불법 커미션과 관련된 은행 문건 자료를 쉽게 얻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득템도 있었다.
최훈열 전무도 이 불법 커미션을 이용해서 대출받은 거액의 자금을 이용해서 KM 전자 TV 수출입 거래에 이용했다.
최민혁도 대출 커미션 외에 이런 수출입 금액에 대한 것을 몰랐던 터라 이 자료를 받아서 그냥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토스했다.
“저는 불법 대출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아닌가요?”
하지만 그의 눈은 이미 동그랗게 변해버렸다.
“이, 이건 자세히 조사해봐야겠지만 전형적인 수출입 거래를 이용해서 무역 자금을 가로챈 범죄 행위입니다.”
그는 미래 기사에도 나오지 않았지만 최훈열 전무가 다른 채널 통해서 압력 넣었다면 그 진실이 덮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가요? 하지만 그 비자금 일부는 제가 알기로 정치권에 흘러들어 간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 그런 부분을 조심해야 할 겁니다.”
“맙소사!”
박두영 부장검사는 경악했다. 이 정도라면 수사 외압도 고려해야 했다.
하지만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타협안을 내놓았다.
“아마 수사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자나 깨나 그룹 미래를 걱정하는 우리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사건 연루자 때문에 비자금 부분은 적당히 타협을 봐야 할 겁니다. 대신에 우리 둘째 큰아버지는 불법 대출 알선, 비자금 조성, 횡령, 탈세, 외국으로 재산을 빼돌린 금융범죄 혐의로 타협 볼 수 있습니다. 성추행은 디저트(?)로 하고요.”
그 과정에서 챙길 것은 챙기라는 최민혁 말은 권력을 탐하는 박두영 부장검사는 결코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성추행 이야기는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알기로 두 분은 사이가 안 좋은 걸로 아는데, 이러는 이유가 있습니까?”
“정치 비자금과 엮이면 문제가 복잡해져서 처벌하기 어려울 겁니다. 적당한 선에서 엮는다면 그나마 처벌하기 쉽죠. 감방에 가는 것은 필연이고요. 뭐 재판 들어가서 질질 끌면, 집행유예로 풀려나오겠지만,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감방에서 나올 때면 KM 전자뿐만 아니라 KM 그룹에서 빈자리는 없을 테니까.’
“하, 하지만......”
“땅.”
딱 한마디 말에 얼굴이 창백해진 박두영 부장검사는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더 자세한 것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저도 풍문으로만 알 뿐, 증거는 없습니다. 이번 일만 잘 처리해주면 그 문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치밀한 최민혁 실장에 이미 질린 박두영 부장검사는 불안해서 더 묻지 않았다.
“진심입니까?”
청문회 과정에서 나온 이 땅 특혜는 박두영 부장검사가 초임 검사 시절에 당시 상급자와 한 몇 안 되는 실수였고, 한동안 논란거리가 되었다. 아마 지금이라면 증거가 꽤 남아 있을 것이다.
“남아일언 중천금.”
“......알겠습니다.”
< #018 > 끝
ⓒ SSDH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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