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7화 (17/1,021)

< #017 >

그로서는 최민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이 가장 원하는 것은 후환이 될 큰아버지를 KM 그룹에서 축출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KM 그룹 미래도 그들이 사라진다면 밝아진다.

굳이 먼저 따로 회사를 차리지 못한 것은 큰아버지가 자신이 창업할 기업도 호시탐탐 노려서 딴짓을 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최악의 상황에 검찰, 정치인, 공무원을 이용해 아이디어만 도둑질당해서 팽 당한 수많은 중소기업처럼 될 수도 있어. 실제로 꿈속에서 그런 일을 당했으니까.’

“최훈열 전무 쪽이나 한번 잘 지켜보세요.”

“알겠습니다.”

***

최민혁에 대해서 의문을 토했던 이들이 KM 전자에 적지 않았지만, 기사가 나간 후에는 대놓고 불만을 토하는 이는 많이 줄었다.

최훈열 전무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한영 쪽과는 단 한 통화의 전화도 할 수가 없었다.

“최경진 편집장은 왜 전화를 안 받아?”

난감하기는 이재상 비서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 쪽 전화를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전화해도 안 받습니다.”

“아니면 직접 찾아가서 만나 봐야 할 것 아냐!”

“어제 한영일보를 다녀왔는데, 입구에서부터 막아서 못 들어갔습니다.”

“도대체 이놈이 왜 이러는 거야? 우리 KM 그룹이 그렇게 만만하게 보여?!”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설마 나만 그러는 거야? 아니 왜?”

불행히도 한영일보 내부도 지금 발칵 뒤집혔다. 최민혁이 협박한 내용이 최경진 편집장 통해서 윗선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10억을 공금 횡령한 것이 검찰에 폭로되면 문제가 될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대응책을 연구해야 했다.

그들이 이 일의 빌미가 된 최훈열 전무와 거리를 두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한영일보 내부 일을 알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만약 최훈열 전무가 자신들 내부 사정을 알면 어떤 형식으로든 이용하려고 할 것이 뻔했다.

최훈열 전무로서는 귀신이 곡할 따름이었다.

“최민혁 이 새끼가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해.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그 새끼를 빨아준 걸까. KM 그룹에 반기를 드는 것은 편집장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이재상 비서가 뒤늦게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란 황당한 기사를 떠올렸다.

“최민혁 실장을 옹호한 것을 보면 꼭 우리에게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가만 그 이야기는......”

그는 다급하게 장승일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확인해보았다.

[답변해 드릴 수 없습니다.]

[장 실장,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한영일보에 손을 쓴 것이 당신인가 묻고 있잖아. 그런데 모르겠다는 소리는 또 뭐야?!]

[죄송합니다.]

끊어진 전화에 황당한 최훈열 전무는 뒤늦게야 아버지도 이 일에 관여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당장 아버지를 만나러 일어났다가 풀썩 자리에 앉고 말았다.

정말 아버지가 이 일에 관여했다면 사전에 자신에게 연락이 왔을 것이다. 즉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는 사전 보고를 들은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소극적이라는 말은 후계 구도 싸움으로 본 것이었다.

최민혁 말대로 애들 싸움을 가지고 쪼르르 달려가서 이르는 것이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스스로 패배를 지인 한 꼴이었다.

최훈열 전무도 바보가 아니라서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 기사를 가져와서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읽었다.

“엿 같네. 누가 보면 내가 조용히 있는 최민혁 그놈을 공격한 것처럼 보이잖아?”

“이것은 후계 싸움에 끼어들기 위해서 명분을 만들려는 고도의 심리 전략입니다.”

‘그래서 큰형이나 셋째가 불구경하듯이 쳐다보는 건가?’

두 사람은 최훈열 전무 자신의 몰락을 바란다. 그 일을 최민혁이 해주는데, 손뼉을 치고 좋아할 일이라서 막지 않았던 것이다.

낄낄거리면서 사무실에 앉아 팝콥을 먹으면서 자기 상황을 즐기는 두 사람 모습을 상상한 최훈열 전무는 착잡한 얼굴을 한 체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했다.

이재상 비서가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깜빡한 것을 보고했다.

“일본 부품 업체에서 부품 가격을 올려달라는 것 때문에 TV 사업부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건 사업부 제품 기획팀장이 일본 업체에 협상하면 된다고 했잖아?”

“그게 단순히 우리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내의 모든 대기업이 대상이라서 쉽게 협상하기 어렵다고 알려왔습니다.”

“뭐야? 아니 그걸 왜 이제야 이야기하는 거야?!”

“그게......”

실상 보고를 했는데, 최훈열 전무가 최민혁에 집중한 나머지 무시해버렸다. KM 그룹 다른 사업부는 난리가 났는데, 정작 당사자가 그 사안을 무시한 것이었다.

원래는 KM 전자 중장기 전략 수립에 큰 영향을 줄 일이라서 최민혁 기획실장을 찾아가야 하지만 한 단계 건너뛰기로 마음먹었다.

“사장님에게 연락해.”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최민혁 그놈에게서 눈을 떼지 마. 필요하다면 인력을 더 증원해서라도 확인해!”

“네.”

***

최민혁은 묘하게 흥미로운 재벌 3세 기사를 몇 번이나 다시 봤다. 최훈열 전무에 대한 공격도 공격이지만 숨겨진 의미를 읽었기 때문이다.

‘한영일보도 괜한 일에 엮여서 짜증이 많이 났나 보군.’

김명준 과장도 가끔 최민혁이 도대체 한영 일보 내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최민혁도 적당히 보따리를 풀었다.

“지난 신문에서 공금 문제와 관련된 숨겨진 조각을 풀었을 뿐입니다.”

“신문 어디에 말입니까?”

“잘 찾아보셔야죠.”

“......네.”

최민혁은 사실을 말해도 도저히 믿지 않는 김명준 과장을 보면서 악동같이 웃었다.

“우리 장승일 실장님 반응은 어때요?”

“조용합니다.”

“진짜로 연락 한 번 안 왔어요?”

“네. 다만 한영일보 쪽과는 몇 번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마 이 일은 결국 KM 그룹 내부 후계 문제라고 내부적으로 타협한 것으로 보입니다.”

혼자 낄낄거리면 웃던 최민혁은 문득 시끄러운 회사 내부 일을 떠올렸다.

“우리 전무님은 일본 문제 당사자인데, 왜 이렇게 조용하죠? 그 안건은 기획실 중단기 전략과 통해서 저에게 먼저 연락해야 할 텐데......”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느긋하게 조사해보세요. 어쩌면 절 패스하고, 사장님을 직접 만나서 따로 이야기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는 문득 꿈속에서 최민수 통해서 들었던 회사 내부 갈등을 떠올렸다. 자신이 축출된 후에도 최훈열 전무는 회사 내부를 장악하지 못했다.

“아마 지금쯤 경영진 내의 내부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나기 시작할 겁니다. 누구에게도 TV 사업부 문제를 떠넘기기 힘든 상황에서 최훈열 전무가 다 책임져야 할 테니까.”

“......네.”

간단하게 대답했지만, 회사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면서 차가운 한기가 번뜩이는 최민혁 모습에 김명준 과장은 놀람을 쉽게 감추지 못했다.

‘정말 내가 아는 그 도련님 맞는 건가?’

***

한영일보의 최민혁 기사를 읽은 적지 않은 시민도 호기심을 드러냈지만, KM 전자 내부 임직원만큼은 아니었다.

기존에 눈치만 보던 이들도 최민혁 실장의 등장이 결코 지나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최 실장이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독하기로 소문난 한영이 꼬리를 말아버린 것일까?’

최민혁 기획실장이 나서기 전만 해도 구심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특히 올해 매출 1,400억 이상을 예상할 정도로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오디오 사업부를 책임진 문형섭 부사장은 이 기회를 명분 삼아서 오영근 사장을 직접 찾아가서 최훈열 전무의 성추행 사건을 언급했다.

“이봐요, 문 부사장님,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회장님 공신인 오영근 사장님 입장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최 전무의 성추행 문제는 매듭지어야 합니다.”

난감한 오영근 사장은 시선을 피했다.

단단히 마음먹은 문형섭 부사장은 시선을 피하는 오영근 사장에게 일축했다.

“여직원 문제는 그렇다고 하죠.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KM 그룹은 밑바닥부터 흔들릴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도한 차입금으로 말미암은 이자는 큰 충격을 줄 겁니다.”

차마 회사가 파산할지 모른다는 말까지는 하지는 않았지만, 그 지적을 알아들은 오영근 사장은 깊은 눈빛으로 말했다.

“내게 뭘 원하는 겁니까?”

“회장님을 설득해주십시오.”

“설마 인제 와서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지금 일본 부품 가격 인상 때문에 TV 사업부뿐만 아니라 저희 오디오 사업부도 타격이 불가피합니다. 작년에 그렇게 부품 국산화에 투자하자는 주장을 승인했으면, 큰 손실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최 전무가 반대해서 무산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요. 이것도 최 전무, 저것도 최 전무, 그 인간이 지금 회사를 다 말아먹고 있지 않습니까?!”

“......”

오영근 사장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오디오 사업부에서 난 흑자를 회사 미래 가치라는 명분으로 이리저리 당겨서 탕진한 것이 최훈열 전무였다. TV 사업부를 망가트린 것뿐만 아니라 오디오 사업부의 성장 엔진마저 갈아 먹었다.

“문 부사장을 볼 면목이 없네.”

“제가 지금 오 사장님 탓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화근은 최 전무라는 것을 잘 알면서 그러십니까. 최 전무에게 책임을 물으셔야 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극에 달했을 때 마침 비서가 최훈열 전무의 방문을 알렸다.

초조한 얼굴을 한 최 전무는 비서 뒤를 따라서 사장실 안으로 들어왔다가 흥분한 문형섭 부사장과 당황한 오영근 사장 얼굴을 보자 풀썩 옆자리에 앉았다.

그와 동행한 사람은 뜻밖에도 STB 사업부의 김현우 상무였다. 꼭 살진 돼지와 비견되는 얼굴에는 욕망이 가득했다.

최훈열 전무조차 김현우 상무가 옆 자리에 앉자 슬쩍 물러났다.

문형섭 부사장도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툴툴거렸다.

“두 분은 사장실도 자기 업무실인 양 막 들어와도 됩니까?”

최훈열 전무가 나서기도 전에 김현우 상무가 코를 킁킁거리면서 소리쳤다.

“문 부사장님은 뭘 그렇게 예민하게 그러고 그럽니까. 이미 비서 통해서 다 알렸지 않습니까. 혹시 두 분이 무슨 다른 밀담을 나눈 것입니까?”

방약무인이란 말이 절로 생각나게 할 정도로 김현우 상무는 눈치를 보지 않았다. 오히려 최훈열 전무가 괜히 김현우 상무를 데리고 왔나 후회할 정도였다.

오영근 사장조차 두 사람을 마주하자 인상을 굳히고 말았다.

“두 분은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에이, 사장님도 잘 알면서 그러신다. 지금 일본 부품 수급 때문에 난리가 났지 않습니까. 임원 회의를 당장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 너무 조용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곧 임원 회의를 진행할 겁니다. 특별히 급한 일이 아니면......”

이번에는 최훈열 전무가 나섰다.

“급합니다. 심지어 회사 내를 시끄럽게 하는 최민혁 실장이 만든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오늘 한영일보 보셨습니까. 최민혁 실장이 회사 내부 기밀을 한영일보에 넘긴 것이 분명합니다.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문형섭 부사장도 어지간하면 부담스러운 두 사람이라서 참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TV 사업부 손실은 공시로 나간 재무제표에 다 나와 있습니다. 다행히 성추행 문제가 빠졌던 군요.”

“뭐요? 문 부사장님은 지금 사람 앞에 두고 그게 할 말입니까?!”

두 사람은 결국 말이 격화되었다.

김현우 상무가 나서서 두 사람 말다툼을 막았지만, 말투는 달랐다.

“우리 문 부사장님은 하시는 사업부가 잘 나간다고, 회사 내에서 무서운 것이 없나 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허참, 당신은 회사 내부 사정을 모르고 그렇게 나대는 겁니까?”

“......”

그는 새삼 KM 전자 대주주로 꼽히는 사람이 오영근 사장 배후인 최용욱 회장, 김현우 상무 뒤에 있는 최두진 사장, 문형섭 부사장을 미는 중도 주주, 그리고 최민혁이라는 것을 떠올리면서 힐끗 뒤로 물러난 오영근 사장을 쳐다보면서 탄식했다.

하지만 머리가 둔한 돼지 머리와는 달리 간교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김현우 상무는 두 사람을 압박하지 않았다.

“하하하,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가족끼리 괜히 싸워서 되겠습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은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도통 이해를 못 해요.”

이번에는 조용히 침묵하던 오영근 사장이 일축했다.

“최 회장님이 만약 김 상무가 지금 한 말을 듣는다면 그냥 두지 않았을 겁니다. 혹시 최두진 사장 믿고 그러는 겁니까?”

움찔 몸을 떨던 김현우 상무는 말을 바꾸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제 말은 최훈열 전무님이 계속 불만을 토로해서 그 문제를 상기시키려고 한 것뿐입니다.”

“그건 최민혁 실장과 최훈열 전무 두 사람의 문제일 뿐입니다. 설마 최두진 사장님도 이번 경영 승계 문제에 낄 생각입니까. 그건 최 회장님이 알면 절대로 넘겨버리지 않을 겁니다!”

‘사장 임기도 얼마 안 남은 늙은이가!’

“아, 참, 우리 오 사장님은 왜 그렇게 심각하게 말씀하십니까. 제 말은 좋게 가자는 겁니다. 사실 최 실장만 아니었다면 이 난리가 날 일도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최 실장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그놈의 ‘최 실장’ 이야기는 한동안 대화에서 빠지지 않고 나왔다. 말하는 사람도, 말을 듣는 사람도 시간이 지나자 ‘최 실장’ 이야기에 스트레스를 크게 받았다.

< #017 > 끝

ⓒ SSDHDD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