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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6화 (16/1,021)

< #016 >

요즘 회사 내부에서 한창 시끄러운 최훈열 전무 이야기를 떠올린 박광민 사원은 지하철 내부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제 기획팀이랑 오붓하게 회식하면서 나온 이야기가 자신과 무관하지 않았다.

박광민 사원은 회사 도착할 때까지 넌지시 눈을 감았다가 옆에 앉은 한 시민이 보는 신문 기사를 힐끗 보았다.

“?”

그는 자신이 잘못 봤나 싶어서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서야 눈에 익은 사진이라는 것을 확인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요즘 회사를 시끄럽게 하는 최민혁 기획실장이었다.

목만 슬쩍 내밀어서 기사를 살피다가 지하철이 멈추자 곧바로 신문을 구해서 살폈다.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

한영의 이 괴상한 기사는 적지 않은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KM 전자의 미래 때문에 대학 생활의 애환과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KM 그룹 재벌 3세 최민혁 이야기였다.

최민혁은 굳이 자신이 재벌 3세라는 것보다는 인간 최민혁으로서 독자노선을 걷고 싶었지만, 집안의 위기를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대학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휴학을 선택하고 말았다.

젊은 시절의 꿈을 버린 채 홀로 고군분투하는 최민혁 모습은 누가 봐도 다른 재벌 3세와는 차별화를 넘어서 영웅적인 행보였다.

“와아!”

신문 일부를 차지한 사진에는 최민혁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한국대를 바라보면서 뒤돌아서는 멋진 장면이 나왔다.

박광민 사원은 회사에 도착하기 무섭게 이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러 기획팀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아침부터 배종대 과장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그쪽 사업부는 일본 부품 업체에서 부품 가격 올려주기로 했다 그걸로 끝내면 일 끝납니까?!]

[팀장님, 엔화절상 탓인 손실을 왜 우리에게 전가하냐 말입니다. 팀장님은 어떻게 상대 그런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만 합니까.]

계속 일방적인 압박을 가하던 배종대 과장은 도저히 상대가 말이 먹히지 않자 전화를 끊고 말았다.

요즘 들어서 위기를 심각하게 생각한 박상기 차장 안색은 평소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배 과장, TV 사업부야?”

“네, TV 사업부 상품팀 팀장입니다. 일본 전자부품업체가 엔화절상으로 인한 손실을 메꾸기 위해서 부품 가격 인상을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부품 가격이 더 오르면, 우리 회사 TV 사업부 손실 폭이 커질 텐데?”

“그것 때문에 TV 사업부는 전쟁터나 마찬가지입니다. 작년에 올린 모든 보고서를 다 수정해야 합니다.”

“올해 사업부 기획안도 마찬가지겠어.”

“......네.”

“뭐 해당하는데?”

“리모컨 IC를 비롯한 형광표시창이 들어가는 부품까지 생각보다 많습니다.”

“동남아나 유럽 측으로 거래처를 돌려도 안 되는 거야?”

“마이컴이나 비메모리 반도체같이 대체 불가능한 제품은 대안이 없습니다.”

두 사람은 굳이 더 대화하지 않아도 부품값이 올라가면 적자 폭이 얼마나 늘어났지 예측이 되지 않아서 침묵했다.

특히 박상기 차장은 얼마 전에 목젖이 보이라고 외치던 최민혁 실장의 모습과 자세한 것을 밝히지 않은 채 굳어 있던 문형섭 부사장 모습을 동시에 떠올렸다.

‘그랬던가?’

뒤늦게 모닝커피를 즐기면서 겨우 한숨을 돌리면서 일과를 시작하려던 조성돈 팀장이 두 사람 대화를 듣고는 바로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합시다.”

***

월마다 하는 월간 회의와는 달리 주간 회의는 지난주 실적을 확인하고, 이번 주에 있을 일을 구체적으로 확인한다.

하지만 오늘 주간 회의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박상기 차장이 회의가 시작하기가 무섭게 배종대 과장에게 질문했다.

“대안은 있을 것 아냐. 오성 전자, LC 전자, 아니 하다못해 대운 전자도 있잖아.”

“대운은 우리 비슷하겠지만 두 회사는 우리와 물량 자체가 다릅니다. 아마 주문양을 더 키워서 가격 인상 요인을 줄일 겁니다.”

결국 KM 전자와 오성 전자와는 매출 규모 차이가 심해서 가격 협상이 어느 정도 수용 범위 안이었다.

“결국 다른 중소업체나 중견업체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는 이야기군.”

“중소업체는 대기업과 하지 않는 틈새시장을 주로 노립니다. 하지만 당장 오성 전자나 LC 전자와 경쟁하는 우리 회사 타격이 제일 큽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거듭될수록 기획팀 분위기는 침울해졌다.

그들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마땅한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평소 자신만만하던 배종대 과장도 갑갑한지 넥타이를 풀었다.

“거래 자체를 달러가 아니라 엔화로 해달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엔화절상에 따른 환 손실이 영향을 미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겨우 최민혁 기획실장이 한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조성돈 팀장도 이렇게 빨리 그 예측이 실현된 것에 안색을 굳히고 말았다.

‘설마 최 실장님은 이런 상황까지 사전에 고려한 건가?’

“박 차장님, 오디오 사업부 쪽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당연히 문제가 됩니다. 아마 5%~7% 가까이 수익이 더 줄어들 겁니다.”

결국 흑자 사업부의 흑자는 줄어들고, 적자 사업부의 적자 역시 더 나빠진다.

조성돈 팀장은 결국 푸념을 털어놓고 말았다.

“최민혁 실장님이 그래서 그토록 극단적인 반응을 보였나 봅니다. 그때는 과하지 않았나 싶은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니었습니다.”

회의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다른 직원은 그저 손가락만 빨았다.

정성근 대리가 마침 박광민 사원이 가져온 신문을 확인하자 팔꿈치로 쿡 쳐서 감추라고 신호를 주었다.

박광민 사원은 아차 싶어서 신문을 보고서 밑에 밀어 넣다가 따가운 조성돈 팀장 시선을 받자 머리를 긁적였다.

“박광민 사원, 굳이 회의 시간에 신문을 들고 들어와야 하나?”

“그게 실장님이 신문이 나온 것 때문에 호기심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

조성돈 팀장은 의아한 눈으로 박광민 사원에게 신문을 받아서 최민혁 실장 기사를 확인했다. 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기사 전반부는 최민혁의 대학 생활에 대해서 다루었고, 후반부는 최민혁과 최훈열 전무와 심각한 갈등을 다루었다.

자연스럽게 최훈열 전무가 TV 사업부에서 한 실적이 적나라하게 나왔다.

[최근 해외 전시회에 출시한 37인치 초대형 TV는 두 개 화면을 동시에 보는 PIP 기능을 포함해서 다양한 기능을 갖추고 있다. 대형 TV 시장 70%를 장악하고 있는 KM 전자가 이 시장을 공고히 하기 위한 노력이다. 다른 경쟁 기업과의 경쟁을 위해서 25% 가까이 낮춘 가격이 문제인데, 몇 년간의 KM 전자의 지속적인 적자의 원인이다.]

하지만 이런 기사 외에 최훈열 전무가 협력 업체에 갑질해서 부품 가격을 후려쳐서 피해를 준 인터뷰 내용마저 나왔다.

[시장 지배력을 올리기 위해서 하도급 업체를 착취하는 이 행위는 분명히 근절되어야 한다.]

몇몇 다른 언론은 이 기사를 슬쩍 가져와서 자기 기사인 양 내보냈다.

덕분에 최민혁은 위기에 처한 구원자 재벌 3세로, 최훈열은 오너 가문의 후광을 입어서 멀쩡한 회사를 망가트리는 무능한 재벌 2세로 묘사되었다.

숨김없이 그대로 두 사람을 비교하는 이 기사는 KM 그룹을 저격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추켜세우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능력 하나만 보고 한국 대기업 역사상 20살의 최연소 기획실장이라는 강수를 둔 곳이 바로 KM 그룹이기 때문이다.

“와아.”

감탄사를 터트린 것은 어깨너머로 같이 기사를 보던 박상기 차장이었다.

다른 팀원도 쭈빗쭈빗 눈치를 보면서 우르르 몰려가서 기사를 확인하고 나서는 다들 탄성을 내질렀다.

그중에는 늘 말이 없던 정성근 대리도 있었다.

“한영일보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재벌가를 칭찬하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여진 한영일보의 행보를 뒤늦게 눈치채자 신문 기사 내용이 뭔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조성돈 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최훈열 전무를 깨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 같은데, 최민혁 실장에 대한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네. 누가 보면 기획기사라고 할 것 같아.”

박상기 차장도 수긍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차라리 최훈열 전무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설마 최민혁 실장님이 한영일보를 상대로 압력을 넣었다고 믿기지 않습니다.”

그제야 딱딱하게 굳은 기획팀 분위기가 바뀌었다. 덕분에 한 마디씩 이야기하면서 겨우 다들 한 숨을 돌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신문을 몇 번이나 들춰보면서 새삼 이제 고작 20살에 불과한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다.

배종대 과장이 참다 못해서 결국 투덜거렸다.

“20살 맞습니까. 이제 대학 들어갔다면 19살 아닌가요. 어리기는 진짜 어립니다.”

다들 어린 나이라 동의하면서도 불과 짧은 기간 동안 있었던 다양한 사건·사고(?) 때문에 막상 19살 기획실장을 상급자로 이상하지 않은 이질감을 느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최 실장님이 이렇게 영향력이 대단했던가. 하긴 지금 위기 상황을 사전에 예측한 분이니, 그럴 수도 있지.’

***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휴학계를 낸 최민혁은 덕분에 느긋하게 회사에 출근했는데, 평소와 다른 광경에 깜짝 놀랐다.

“실장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회사를 경비나 안내 데스크 여직원이 정중하게 인사를 해온 것이었다.

‘아, 깜짝이야.’

불과 하루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하던 최민혁은 기획실장실까지 가는 중에도 임직원의 환대를 받았다.

청소부 아줌마부터 시작해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진다는 말을 이번에 실감합니다.”

김명준 과장 역시 고개를 갸웃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는 특별히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가요?”

영문을 모른 최민혁은 아침부터 화사한 옷을 입고 나타난 오혜정이 내온 모닝커피를 홀짝이면서 눈치를 봤다.

“지시하실 거라고 있습니까?”

“아, 아니에요. 오늘따라 회사 분위기가 이상해서 말입니다.”

그제야 입가에 해맑은 미소를 한 오혜정 비서가 신문 하나를 가져와서 내밀었다.

“......”

최민혁은 한영일보에서 내놓은 자신의 기사를 읽어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알아서 하라고 했지만, 설마 이따위로 허위 과장 기사를 내 보낼지는 몰랐다.

한영일보 딴에는 그들 기준으로 최선을 다해서 내보낸 기사였지만 그가 원한 바는 아니었다.

“정말 사진 잘 나왔습니다.”

김명준 과장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스듬한 각도로 찍힌 최민혁이 한국대를 바라보는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사진 조작도 좀 한 것 같은데......’

그리고 조성돈 팀장과 박상기 차장이 같이 기획실을 찾았다.

최민혁은 힐끗 두 사람의 굳은 안색을 살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일본 부품사가 엔화절상 폭만큼 부품 가격 인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계속해보세요.”

그는 묵묵히 두 사람 보고를 듣기만 했다.

두 사람은 불과 얼마 전에 보였던 그런 행동은 아예 없었는데, KM 전자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진지하게 말했다.

오히려 두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최민혁 눈치를 심하게 봤다.

최민혁은 혀를 찼다.

“그렇게 스트레스받아가면서 보고하지 마세요. 제가 지난번에 두 분을 좀 심하게 대한 것은 위기를 위기라고 느끼지 못한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최 실장님의 뜻은 이제 충분히 알았습니다.”

“그러면 된 겁니다. 일을 제대로 하면 제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 일은 어떻게 할까요?”

“그걸 저에게 물어보면 어떻게 합니까. 두 분이 알아서 보고서를 만들어야죠. 아, 그리고 보니 투자 보고서도 거의 새로 만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

두 사람 안색은 창백하게 변했다. 막상 수정하려니, 손댈 곳이 한둘이 아녔다. 특히 심각한 부분이 있었다.

“왜들 그럽니까?”

“다른 사업부도 손을 자주 봐야 하지만 사실 TV 사업부 쪽에서 올라온 내용은 최훈열 전무가 세세한 내용은 다 빼고, 요약된 것만 올려서 얼마나 고쳐야 할지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최민혁도 ‘최훈열’ 이름만 들어도 골이 지끈 아팠다.

“형식적으로도 TV 사업부 쪽의 실무팀과 직접 만나서라도 정확한 보고서를 만들어주세요. 그래야 나중에 사장님이나 회장님 보고서에 명시할 수 있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뒤늦게 기획팀 보고가 제대로 돌아간다는 것을 느껴서 한 편으로 안도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앞으로 다가올 풍파를 떠올리다가 오늘 기사에 대해서 질문할까 하다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그들을 한영일보 데스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최민혁 기획실장을 다시 한 번 쳐다보면서 실장실을 나섰다.

최민혁은 때마침 걸려온 최경진 편집장 전화를 받았다.

[오늘 기사 어떻습니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만은 아니기에 이 정도로 타협 봤다.

[앞으로 조심하세요.]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저에게 연락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실장님을 돕겠습니다.]

[그러죠.]

김명준 과장은 평소와는 달리 힐끗 최민혁을 부드럽게 쳐다봤다.

“실장님, 축하합니다.”

“뭘 말입니까?”

“기획실장으로 회사에 완전히 적응하신 거 말입니다.”

“그다지.”

그는 퉁명한 최민혁 얼굴을 보면서 새삼 감탄하고 말았다.

‘정말 의식하지 않은 건가?’

< #01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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