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5 >
“돈 주면 없던 걸로 하고요?”
“글쎄요.”
슬쩍 말꼬리를 회피하는 범용구 기자는 주변을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혹시라도 감시 카메라가 있을까 싶어서 최민혁과 김명준 과장을 쳐다보았다.
가벼운 티를 입고 있는 그들 몸에서는 그 어떤 장치도 없었다.
“큰 거 한 장이면 됩니다.”
“범 기자님, 분명히 말해 봐요. 큰 거 한 장이 정확히 얼마죠?”
“에이, 왜 그러십니까. 학과 내에도 10억 가까이 뿌린 걸로 아는데, 고작 1억 가지고 그러십니까?”
“결국 1억 주지 않으면 폭로성 조작 기사를 쓰겠다는 소리인가요?”
“답변하기 좀 그렇습니다.”
교묘하게 말을 피해 가는 범용구 기자 태도에 최민혁은 혀를 내둘렀다.
“1억을 받고 나서 입 다물면 난 어쩌란 겁니까. 최소한 협박을 했으면, 명확하게 의사를 밝혀야 할 것 아닌 가요?”
“좋습니다. 1억 주면 준비한 기사는 전부 백지화하겠습니다.”
“1억 안 주면 사실을 조작해서라도 기사라도 내보내서 날 매장한다는 협박이군. 그렇지?”
자신도 만만치 않지만, 최민혁 역시 지독했다. 모호한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일일이 다 확인했다. 왜 저렇게 집요하게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은 범용구 기자는 순간 망설였다. 오랜 기자 생활 촉이 위험 신호를 계속 내보내고 있었다.
최민혁 역시 쉽게 넘어가지 않는 범용구의 집요함에 혀를 내둘렀다.
“좋습니다. 까짓 거 하죠. 1억 안 주면 조작 기사 터트려서 매장할 겁니다. 어차피 아실만한 분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좋네. 따라와.”
“넵!”
휘파람까지 분 범용구 기자는 히죽 웃었다.
‘3가지를 1가지로 줄인다고만 했지, 기사를 내보내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으니까. 딱히 거래를 어긴 것은 아니지.’
***
“어디로 가는 겁니까?”
“대학 본관.”
“1억만 주면 되는데, 거긴 왜 갑니까?”
“볼 일이 있어.”
한국대 대학 본관은 가끔 지나다니는 대학생이 있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특히 휴학계를 관리하는 쪽은 더 사람이 없었다.
최민혁은 그곳에 도착하자 김명준 과장에게서 서류를 받아서 제출했다.
“휴학계입니다.”
“잠깐만요. 휴학계를 내려면, 관련 서류를......아, 미리 다 준비하셨군요. 잠시 기다려주세요.”
휴학계를 담당하는 대학 직원은 꼼꼼하게 서류를 체크하고 난 후에 휴학서 제출 사유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회사 일 때문에 너무 바빠서 편법으로 이제까지 다녔지만,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아서 휴학계를 낸다면, 어디 취업하신 거에요?”
“KM 전자 취직했습니다.”
“어머,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만 빨리 서류 처리를 해주세요.”
“네!”
최민혁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범용구 기자를 쳐다보았다.
“마음에 들어?”
“도, 도대체 뭐하자는 겁니까?”
“뭐하긴 보면 몰라. 너 때문에 휴학계 냈잖아.”
“아니 굳이 멀쩡하게 다니는 대학에 휴학계까지 낼 필요까지야......”
최민혁은 이번에 김명준 과장 안주머니에 넣어둔 만년필을 받아서 장치를 동작시켰다.
[......좋습니다. 까짓 거 하죠. 1억 안 주면 조작 기사 터트려서 매장시킬 겁니다. 어차피 아실만한 분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씨발.”
“이게 그 유명한 첩보전에 나오는 만년필 도청기야. 어디서 구했는지 알고 싶지 않아? 아, 사실은 나도 몰라. 우리 김 과장님이 이런 거 잘 구해.”
“부, 불법입니다.”
“내 목소리까지 같이 녹음되었는데, 무슨 불법이야. 범 기자, 당신에게 이제 두 가지 선택길이 있다. 하나는 공갈, 협박, 사기, 명예훼손 혐의로 감방(?)에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날 위해서 기사를 쓰 주는 도구가 되는 거다.”
“......”
“세상 만만하게 살아왔지. 인생은 실전이야. 한 번 실수하면 그걸로 끝인 거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겁을 잔뜩 집어먹은 범용구 기자는 최민혁이 하대하는 것까지도 느끼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도대체 저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내가 좀 조용히 살고 싶어서 그렇게 노력하는데, 그걸 꼭 찍어서 자극한 게 네놈 아냐?”
“풉.”
최민혁 이야기에 웃음을 억지로 참은 것은 김명준 과장이었다. 그의 뺨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서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 같았다.
최민혁이 째려보자 무안한 김명준 과장은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어이, 범 기자.”
“......네.”
솔직히 KM 전자 내부 문제에 집중하고 싶은 최민혁은 최훈열 전무 때문에 이런 쓸데 없는 일에 시간 낭비하는 것만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할래? 너 인마, 내가 최훈열 전무가 너희 한영 통해서 수작 부리는 거 모른다고 생각 하냐?”
“!”
이미 꿈에서 재판받는 과정에 먼저 나서서 자신을 씹어대던 한영 행동이 이상하다는 생각해서 한 말인데, 동공이 크게 흔들린 범용구 기자 눈을 보면서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혀를 내둘렀다.
‘지금은 최훈열 전무를 잡는 것에 집중해야 해서 이 정도로 한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제가 별로 힘이 없습니다. 원하는 기사를 내보내려면 데스크 쪽에도 손을 써야 하는데, 그건 좀 어렵습니다.”
최민혁은 자기 휴대폰 예약 번호를 누르고 난 후에 직접 통화했다.
[박두영 부장검사님, 요즘 잘 지내시죠?]
[......웬일입니까?]
[하하하, 우리 사이에 안부 인사 겸해서 전화 드린 겁니다.]
[......그럴 분이 아니라는 것은 저도 알고, 실장님도 압니다. 본론만 말씀하시죠.]
[혹시 언론사가 기업에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 조작 인터뷰를 하면서 상대를 협박하면 심각한 범죄행위가 되겠죠?]
[......어디서 뭘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입니다. 최근 대검에서도 그 부분에 대해서 구체적인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시범 사례를 검토하고는 있는데......]
[그러면 제가 제보 하나 하면 부장검사님에게 큰 도움이 되겠죠?]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은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알아보고 전화를 다시 드리겠습니다.]
[시, 실장님 잠, 잠깐만......]
전화를 강제로 끊어버린 최민혁이 새파랗게 질려 있는 범용구 기자를 쳐다보았다.
“이래도 데스크 타령할래?”
“이, 이건......”
“범 기자, 누군지는 알지?”
여러 곳에서 수십 건의 사고를 쳤던 범용구 기자는 중앙지검에 불려 가서 수사를 받은 적이 많았기에 당연히 누군지 알았다.
“저, 정말 중앙지검의 박두영 부장검사입니까?”
“어, 너도 알아?”
잘 알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다른 검사와는 달리 실력도 좋은 박두영 부장검사는 야망이 많아서 이쪽저쪽에 연줄이 없는 경우가 없다. 언론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범용구 기자는 최민혁이 설마 중앙지검에 연줄이 있다는 것을 알자 꼬리를 말았다.
“아, 알겠습니다. 제가 편집장님에게 잘 말씀 드려서 최민혁씨가 원하는 것을 모두 다 해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잘 좀 부탁합니다.”
“자식 진작 그랬어야지.”
김명준 과장은 허겁지겁 떠나가는 범용구 기자 등을 바라보았다.
“범 기자를 믿으시는 겁니까?”
“아뇨.”
“어떻게 하실 겁니까?”
범용구 기자에 대한 꿈의 기억은 떠올리지 못했지만 결국 연관되는 한영 일보에 대한 미래 기억을 떠올린 최민혁은 히죽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두 마리 새를 쫓다가는 다 잡은 한 마리 새도 놓칠 수 있다는 것을 아니까. 그래서 말인데요. 작년에 퇴직한 한영 기자에 대해서 조사를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
한영 일보 최경진 편집장이 최훈열 전무 제안을 받은 것은 KM 그룹을 가볍게 보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비록 10대 그룹에는 못 미친다고 해도 KM 전자를 시작으로 해서 KM 그룹을 담보로 1차 차입금만 해도 모두 8억 달러에 가깝다는 것을 알기에 KM 그룹 미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 후계자 중의 하나인 최훈열 전무를 밀어줌으로써 미래 고객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고작 20살 핏덩이 서자 정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범용구 기자가 나타나서 한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도청기로 협박했다라.”
이 정도는 웃으면서 넘길 수 있지만 범용구 기자가 파악한 정보가 오히려 더 문제였다. 그 중에 박두영 부장검사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40억 대박 투자 내용에 더 소름 끼쳤다.
“이게 다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너 같으면 뻔히 보이는 투자만 하겠냐. 나라면 차명으로 계좌를 더 만들어서 진행하겠다. 그게 더 자기 힘이 될 테니까.”
“아.”
“그러면 70억 이상이라는 이야기네.”
최경진 편집장은 고민했다. 이대로 최민혁을 놔두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데 지금 능력만 봐서는 최훈열 전무에 비해서 나쁘지 않았다.
‘지지 세력이 약할 수는 있지만, 이 정도 능력이면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 같은데, 젠장 성급했어. 제대로 알아보고 뭘 하던 해야 했어.’
그는 결국 다른 기사 때문에 안면이 있는 KM 그룹 장승일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최민혁에 대해서 문의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아직 그룹 내부적으로 후계 구도가 결정 난 것은 없습니다. 최민혁 도련님 역시 그 대상 중의 하나입니다.]
최민혁에 대해서 손을 떼라는 압력이었다.
만약 최민혁 기사가 나갔다면 상당히 난감한 처지에 빠졌을 것이다.
‘그걸 빌미로 이득을 챙기겠지만......’
최경진 편집장이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범용구 기자 앞으로 소포가 왔다.
그 내용은 작년에 자신이 회사복사기, 워드프로세서와 같은 사무용품을 사장 결제 없이 임의로 지출해서 착복했던 내용에 대한 증거였다.
지방주재사원에게서 기부금 명목으로 받은 돈까지 합치면 무려 10억이 넘었다.
회사공금을 유용해서 착복한 범죄였고, 언론사에서 흔히 저지르는 오보와는 차원이 다른 행위로 이건 언론의 자유라는 명분이 통하지 않는 일이었다.
“!”
등허리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낀 최경진 편집장은 당장 최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몇 번이나 전화하고서야 겨우 통화가 되었다.
[한영 편집장 최경진입니다.]
최민혁은 모른 척했다. 그가 전해준 자료는 원래 작년 중순에 억울하게 퇴직해서 앙심을 품고 있는 한영 일보 기자가 폭로할 기사였다. 다만 이 제보를 한 후에 기자 생활까지 접어야 하는 것을 두려워한 그를 설득해서 중간에 가로챈 것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혹시 범 기자에게 소포를 보내셨습니까?]
최민혁은 전가의 보도인 박두영 부장검사 이름을 팔았다.
[아, 받으셨군요. 안 그래도 지금 박두영 부장검사 만나러 중앙지검으로 가고 있습니다.]
[자, 잠깐만요. 이번 일은 뭔가 오해가 있었습니다. 만나 뵙고 사과드리겠습니다.]
[굳이 만날 필요가 있나요. 나쁜 죄를 저질렀으면 처벌을 받으셔야죠.]
[시, 실장님, 다시 말하지만, 범 기자도 자신이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말로는 반성 다 합니다.]
말하는 투를 봐서는 중앙지검으로 가는 건지 의심스러워서 내심 욕설이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았다.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괜히 협박하는 것 같아서 좀 그러네요. 그냥 알아서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니 구체적으로 조건을 말하라고 말하면, 협상은 없는 걸로 알겠습니다.’란 대답을 들을까 염려해서 말을 바꾸었다.
[그러면 내일 신문을 보십시오. 그때까지만이라도 부탁합니다.]
[오늘 하루는 연기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빌어먹을!”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쩔 수 없잖아. 최민혁 이자가 원하는 것은 최훈열 전무일 테니. 그쪽을 공격해줄 수밖에 없어.”
“하지만 KM 그룹에서도 그냥 있지 않을 텐데요?”
“최훈열 전무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누락시킨 것을 문제 삼으면 돼. 아니면 최민혁 실장이 의뢰했다고 돌려서 말하면 될 거야.”
“그런데 괜찮을까요?”
아무리 헌법에서 언론의 자유라는 권리를 누린 기자라고 해도 10억 이상의 공금 횡령은 거의 실형이 나올 수밖에 없는 범죄였다.
“이 새끼야, 괜찮을 리가 없잖아!”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번 회사 공금을 받아먹은 인사 목록을 떠올린 후에 내일 나갈 신문을 수정하기 위해서 일일이 전화하기 시작했다.
‘괜히 남의 집 전쟁터에 끼어들어서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뒤늦게 최민혁에 대해서 알아보지도 않고 일을 만든 자신을 후회했지만 이미 기차는 떠나고 난 다음이었다.
‘아니 최민혁 이 자식은 도대체 우리 회사 내부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안 거야?’
***
< #015 > 끝
ⓒ SSDHD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