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4 >
그리고 이런 기대는 박상기 차장만이 아니라 적지 않은 회사 임직원이 다 비슷하게 생각했다.
***
오디오 사업부 신공장 TFT 관련 회식에는 모두 이십여 명이 참석했는데, 여기에는 뜻밖에 여직원이 생각보다 많았다.
박상기 차장은 이 자리에서 은근슬쩍 오혜정 비서 사정을 빙 돌려서 말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 자리에 참여한 여직원 대다수는 오혜정 비서의 딱한 사정에 공감했고, 최 전문에 대해서 무지막지하게 씹어댔다.
“그 인간 진짜 더럽다니까. 아 글쎄, 복도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엉덩이를 만지지 뭐에요?”
“난 가슴 당했어.”
“뭐 그럴 새끼가 다 있어?”
“왜 감사팀에 신고하지 않았어?”
“최 전무가 로열패밀리란 것을 알잖아.”
“그런 새끼가 후계자 중의 하나라니, KM 그룹도 이제 끝이 보여.”
그리고 불만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술이 제법 들어가자 자연스럽게 재무팀 여직원 입에서 목멘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저기 이건 비밀인데요. 제가 회계 장부를 정리하면서 맞지 않는 숫자가 나오는 거에요. 그런데 저희 팀장님은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넘어가는데, 그 금액 차이가 50억이 넘어요. 나중에 듣기로는 최 전무가 따로 이야기했다는 소리가 있는 거에요.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바로 탈세 이야기다.
구체적인 범법 행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최훈열 전무는 천하에 나쁜 놈으로 욕을 먹었다.
자연스럽게 과장된 이야기가 살을 붙여가면서 덩치를 키워갔다.
회식이 끝났을 때쯤에 최훈열 전무는 여자에 미친 삼두육비의 괴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다시 KM 전자 본사 여직원 라인을 통해서 급속하게 퍼졌다.
불과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서 이 이야기는 KM 전자 본사 직원은 대부분 한 번씩 다 들었다.
이재상 비서는 화장실에서 큰 볼일을 보는 중에 쑥덕거리는 다른 직원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즉시 최훈열 전무를 찾아가서 보고했다.
“정말이야?”
“네, 생각보다는 많은 이들이 아는 것 같았습니다.”
“민혁이, 이 새끼가!”
이재상 비서가 다시 실장실을 찾아가려고 일어난 최훈열 전무를 막았다.
“안 됩니다.”
“무슨 소리야? 지금 최민혁 그놈이 떠버리지 않고서야 며칠 사이에 이렇게 많은 회사 직원들이 알 리가 없잖아!”
하지만 회사 내부 돌아가는 사정을 제법 알기에 반박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회사에 생각보다 전무님 적이 많습니다.”
“뭐?”
그는 뒤늦게야 정신을 차리자 가슴 한구석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새로 기획실장을 뽑고 나면, 그 자신이 새로운 대표 이사가 될 예정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당장 오영근 사장부터가 자신을 좋아할 리가 없고, 겉으로는 티 내지 않지만 계속 적대하는 문형섭 부사장은 더 극구 반대할 것이다.
그나마 자기 아군이라면 STB 사업부의 김현우 상무가 있지만, 오히려 그 자신도 좋아하지 않았다. 돼지 같은 덩치에 힘센 놈에게만 아부를 잘하고, 그 밑에 임직원을 학대하는 놈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회사 내부 사정 때문에 김현우 상무를 내칠 수가 없었다.
몇 년간은 돈이 안 되는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부 이일태 이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최훈열 전무는 뒤늦게야 자기 권력을 남용해서 회사 내부 임직원 입을 찍어 눌러왔는데, 그 댐에 구멍이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엿 같네.”
힘없이 풀썩 자리에 앉은 최훈열 전무는 왜 최용욱 회장이 굳이 최민혁을 기획실장에 앉혔는지 새삼 깨달았다.
어깨 힘이 쭉 빠졌다.
자신은 회사 내에서 평판이 너무 좋지 않았고, 더 심각한 문제는 회사 적자를 계속 키우고 있는 일등공신이다.
아무리 최용욱 회장이 그룹 회장이라고 해도 최훈열 전무를 일방적으로 밀어줄 수가 없어서 견제 수단으로 최민혁을 실장에 앉힌 것이다.
덕분에 최훈열 프레임이 최민혁 프레임으로 바뀌면서 불협화음이 거의 사라졌는데, 최민혁이 난리 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신규 차입만 빨리 진행되어도 다 끝날 일인데, 그놈의 조 팀장이 질질 끄는 바람에 이 사단이 난 거야. 이 새끼도 잘라 버려야겠어.’
돌이켜 보면 기획팀의 중도를 가장했지만, 막상 돌이켜보면 적 성향에 가까운 조성돈 팀장 행동도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치명적이었다.
평소 어벙한 조성돈 팀장 모습을 떠올리면서 소름이 오싹했다.
이재상 비서는 진정한 최훈열 전무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눈치를 봤다.
“시간은 우리 편입니다.”
“그럴까?”
“네. 어차피 회장님이 원한 것은 비메모리 반도체입니다. 그 비전을 위해서는 3조 이상의 막대한 투자금이 필요합니다. 그것 자체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날 보고 개새끼란 소리 듣고, 그냥 자리만 지키란 말이야. 날 아는 인간이 얼마나 비웃을지는 생각도 안 해?!”
“제 말은 굳이 나서서 회사 내부에 분란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너 설마 오혜정 비서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내가 그년에게 얼마나 공을 들여서 작업해 왔는데, 지금 포기하라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압니다. 문제는 이게 다 가 아닙니다. 만에 하나라도 일이......”
“그건 문제가 없다고 했잖아?!”
“아, 네, 잘 처리하기는 했습니다. 아무래도 요즘 증권 감독원 행동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번 재벌 3세(?)의 주가 조작 때문에 정부에서도 여론이 나빠지자 이 문제를 관심 기울이고 있습니다.”
“끄응.”
감옥에 간 아들 최민수(?)를 떠올리자 부글부글 끓는 최훈열 전무는 스스로 노화를 식힐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 얼마 있지 않아서 생각을 바꾸었다.
“잠깐 회사 내부가 아니라 외부라면 괜찮다는 소리야?”
치밀한 이재상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상관없습니다만......”
“최민혁 그놈은 지금 대학생이잖아. 지금 한창 학기 중일 텐데, 저렇게 회사에 나와서 일할 시간이 있는 거야?”
“한국대 학사 과정이 빡빡할 걸로 유명하니, 아마 그건 어려울 겁니다. 아, 혹시......”
“그래. 그놈은 분명히 편법을 사용했을 거야. 그걸 좀 과장하면 어떨까? 이왕이면 메이저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나오면 좋잖아. 요즘 재벌 3세 사회 일탈 행위 때문에 난리인 상황에서 부정 입학 문제까지 넣어서 일을 만들면 제법 재미있는 그림이 나오겠지?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한국 아줌마 부대가 알면 난리가 날 거야!”
“멋진 생각입니다.”
“그래, 이왕이면 지금 바로 시작하는 것이 좋겠어. 한영 편집장에게 전화해 봐.”
“알겠습니다.”
***
최훈열 전무는 한영 최경진 편집장을 한 일식집에서 만나서 최민혁에 대한 것을 부탁했다. 6개월 광고를 받는 조건으로 최경진 편집장은 이 일을 수긍했다.
재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최경진 편집장으로서 재벌 돈으로 재벌 3세를 공격하는 일이라서 이 일에 꽤 만족해서 저격 취재에 잔뼈가 굵은 범용구 기자에게 따로 지시를 내렸다.
범용구 기자는 즉시 한국대를 찾아가서 최민혁 주변 인물을 인터뷰했다.
그는 예상한 답변과는 좀 다른 특이한 결과에 고개를 갸웃했다.
“결국 최민혁씨가 학과 내에서 별다른 문제를 만들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네.”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아서 다른 몇 사람을 더 찾아다녔다.
“한국대 학과 수업이 만만치 않은 걸로 아는데, 툭하면 강의를 빼먹고 그게 가능합니까?”
“그런 적 없습니다. 민혁이가 얼마나 열심히 강의를 듣는데요.”
도플갱어도 아니고 밑에 후배 기자 시켜서 뻔히 KM 전자 본사에 출근해서 일하는 것까지 확인했는데, 숨김없이 그대로 거짓말하는 최민혁 친구들의 뻔뻔함에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대학 생활을 어떻게 하고 다니기에 이들이 최민혁을 이런 식으로까지 옹호하는 걸까?’
물론 최민혁을 싫어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기자라고 밝히기만 하면 뭔가 갈등하는 것 같더니, 다들 쉬쉬 피해 갔다.
그들은 기자에게 진실을 폭로해서 얻는 것보다 최민혁 통해서 받는 이익이 더 크게 느낀 것이었다.
다행이라면 거의 500만원(?) 가까운 돈을 쓰고서야 성추행(?)을 당했다고 알려진 의문의 여대생을 결국 만났다.
‘내가 취재하면서 이렇게 돈 뜯기기도 처음이네.’
기자 생활을 하다 보니, 연예인을 꽤 만나서 어지간한 여자에게 흔들리지 않는 범용구 기자조차 마른 침이 절로 나올만한 미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이혜영이라고 밝혔는데, 최민혁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민혁씨는 그런 적이 없어요.”
“제가 들은 이야기로는 성추행이 분명한데, 혹시 최민혁씨에게 협박을 받으신 겁니까. 제가 아는 변호사가 있는데......”
“아뇨. 그러는 그쪽은 아무리 봐도 이해를 할 수 없는 기자세요. 도대체 대학 잘 다니는 최민혁씨는 왜 조사를 하는 거죠?”
“요즘 재벌 3세에 대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에 관한 시리즈 기사로......”
분명히 성추행당했다고 제보를 한 사람만 세 명이나 되는데, 정작 그 당사자는 오히려 그 상황을 로맨스로 여기는 것 같아서 범용구 기자는 내심 당황했다.
“저기요.”
“저기고, 여기고가 없어요. 괜한 헛소문 듣고 와서 절 귀찮게 하나 본데, 자꾸 그러면 그쪽을 진짜 스토커로 고소할 거에요!”
‘무슨 여자가 이따위야?’
“저기 최민혁씨를 두려워서......”
이혜영은 끈질기게 달라붙는 범용구 기자를 보다 못해서 대학을 순찰하는 경비에게 손짓했다.
“저기 순찰 아저씨, 여기 스토커 있어요!!”
땀을 삐질삐질 흘린 범용구 기자는 대학 경비가 달려오자 허겁지겁 도망쳤다.
‘이런 엿 같은 경우도 다 있나.’
***
다른 사건과는 달리 좀 더 고생한 범용구 기자는 결국 1,000만원 가까이 더 돈을 쓰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최민혁이 40억으로 무려 70억을 벌었다는 전설적인 투자 내역을 확인했다.
‘작전주야!’
하지만 그는 증권 회사까지 방문해서 추적한 끝에 제약 회사에 투자해서 수익을 냈다는 것을 결국 밝혀내고 말았다.
그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고작 한 달 만에 4천으로 7천만을 버는 것과는 달리 40억으로 70억을 버는 것은 이야기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새끼 정체가 뭐야?’
결국 취재 기간이 자꾸 길어지자 범용구 기자는 마음을 굳혔고, 마침 강의를 들어온 최민혁을 직접 찾아갔다.
최민혁은 당연하게도 그를 이미 알고 있었다.
“아, 당신이 그 유명한 범 기자군요. 언제 오나 했는데, 많이 늦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도 좀 생각을 해주세요.”
“아니 절 어떻게?”
인상을 잔뜩 찡그린 최민혁은 만나는 사람마다 반복되는 ‘기자’ 이야기에 노이로제가 걸렸고, 지금 기획팀에서 진행하는 KM 전자 보고서 재작업 현황을 확인하는 시간을 낭비해서 분노했다.
“당신이 이제까지 한 짓을 생각하고서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무슨 말인지......”
“만나는 사람마다 최민혁이라고 캐묻는데, 그 사람이 그냥 입 다물고 있겠습니까? 한마디씩만 해도 전 200번을 듣습니다!”
“아, 본의는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국민의 안 권리를 위해서......”
장난스럽게 웃기만 하던 최민혁이 안색을 차갑게 굳혔다.
“재벌 싫어하는 한영 기자가 용건이 뭡니까?”
“하하하, 아닙니다. 전 어디까지나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사전 정지 작업으로......”
그도 상대 헛소리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소리쳤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좀 하시죠.”
강하게 나오는 상대는 너무 많이 경험해본 범용구 기자는 오히려 히죽 웃었다.
“역시 뭔가 켕기는 것이 있나 봅니다.”
최민혁은 오히려 가소로운 눈으로 범용구 기자를 쳐다보았다. 이미 최훈열 전무가 손을 섰다는 것을 이미 예상했기 때문이다.
“원하는 게 뭡니까? 돈입니까?”
“흠흠.”
범용구 기자는 굳이 부인하지는 않았다.
“기자를 어떻게 보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신념을 지닌 개념 기자 흉내 내는 범용구 행동에 최민혁은 숨김없이 그대로 비웃었다.
“돈 안 주면, 폭로 기사라도 쓸 건가요?”
“전 팩트만 기사화할 겁니다.”
< #01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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