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3화 (13/1,021)

< #013 >

“좋습니다. 뭐 소문이라고 하는데, 넘어가죠. 하지만 제 눈에 증거가 뜨이면 그룹 감사실에 보고 해서 공론화할 겁니다.”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던 최훈열 전무는 뒤늦게야 이곳에 온 용건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그는 입술에 피가 나도록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래, 좋다. 그런데......도대체 그 기획안 재검토는 또 뭐야?”

“아, 그거요. 말이 안 되는 쓰레기 기획안을 통과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임마, 그거 회장님이 직접 구두 지시를 해서 진행된 일이야. 비록 우리 KM 전자에서 진행하는 일이지만 너 같은 사회 초짜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냐.”

“그렇다고 잘못된 회장님 지시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보고 해서 바로잡던지, 아예 가능성이 없으면 폐기할 생각입니다.”

“너 돌았냐? 도대체 무슨 의미에서 그따위 소리를 하는 거야?”

“당장 지금 판매되는 VTR 제품은 고작 대운전자 제품에 비해서도 재생 시 화질, 음질이 많이 떨어집니다. 애초에 기술력 경쟁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기존 품질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채 기능만 덕지덕지 붙인 차세대 VTR이 과연 시장에서 먹히겠습니까. 말 나왔으니, 이 기회에 더 하죠.”

TV 사업부가 벌이고 있는 적자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나열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TV 사업부 임직원이라면 다 고민하는 부분이었다.

실제로 이 부분은 고객의 불만 요청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TV 사업부에 진행하는 적지 않은 아이템에서 공통으로 나타났다.

“최 전무님은 여비서에게 들이 되거나 아니면 신규 투자를 받아서 돈 쓰는 것이나 관심이 있습니다. 이번에 일단 신규 자금 유입해서 겉으로 부채를 낮추면 기업 적자가 어디로 간답니까.”

“야!!!”

최민혁은 실장실 창문이 깨질 정도로 큰 고함에 복도를 오가던 임직원조차 화들짝 놀라는 상황에서도 개소리로 치부했다.

“그렇게 소리친다고 달라지는 것 없습니다. 가서 일이나 제대로 하세요!”

“너 이 새끼가......”

“또 그러신다. 정 억울하면 기조실 찾아가던지, 아니면 다른 곳에 맞으면 늘 하는 것처럼 회장님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이르세요.”

“두, 두고 보자!”

최훈열 전무는 따가운 김명준 과장 시선을 의식하자 결국 기획실에서 물러 나오고 말았다.

분노한 최훈열 전무와는 달리 다른 이들은 바위처럼 굳은 안색을 한 채 멍하니 최민혁이 한 말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뒤늦게야 KM 전자 위기를 피부로 느낀 것이었다.

최민혁도 솔직히 그들이 스스로 위기를 자각할 지 장담하지 못했는데, 자신이 고생한 보람을 뒤늦게야 찾았다.

그들이 떠나자 한쪽에서 멍하니 망부석처럼 서 있는 오혜정 비서를 쳐다보았다.

“성추행 소송 말입니다. 말하면서 느낀 건데, 지금까지 증거로는 승소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설사 승소한다고 해도 오히려 오혜정 비서에게 손해입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너무 분하실 것은 없습니다. 이번 일이 회사 내부적으로 서서히 알려지면 최훈열 전무 입지도 망가질 테니까.”

“......네.”

표정이 확 바뀐 오혜정 비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실장실을 나섰다.

김명준 과장은 놀라운 시선으로 최민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그저 웃기만 했다.

“기다려 보세요. 아마 재미있는 일이 곧 생길 겁니다.”

***

최민혁이 기대한 재미있는 일 중에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은 최훈열 전무 일이 아니었다.

매집 지시를 한 오성 전자 주가가 계속 내려갔기 때문이다.

“이상하네요.”

“네?”

“아, 아닙니다. 혹시 특이한 상황은 없나요?”

“조금씩 매집하는 세력이 있지만 그렇게 티가 나지 않았습니다.”

“설마 오성 전자 주식 가지고 주가 조작하려는 애들은 없을 테고, 누굽니까?”

“외국인 투자자로 보입니다.”

작년에 오성 전자에서 개발한 256MD램은 한국 과학 기술 분야에 큰 영향을 끼칠 성과로서 결코 무시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오성 전자 주가가 10만 원을 돌파한 것도 그 이유였다. 비록 년 초 일본 지진 여파 때문에 저점을 찍었다고 해도 일시적이었다.

최민혁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오성 전자 투자에 혀를 내둘렀다.

‘조용히 지내고 싶은데, 신경 거슬리게 하는 놈이 왜 이렇게 많아.’

“그러면 주가가 내리면 내리는 대로 계속 매수를 해주세요. 필요하다면 나머지 대출한 86억을 전부 사용해도 되니까.”

“한 종목에만 이렇게 몰빵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KM 그룹은 망해도 오성 전자는 안 망하니까.”

“말을 하셔도 꼭 그렇게까지 표현하셔야 합니까?”

“사실이니까.”

“끙.”

“전 정말 조용히 살고 싶은데, 세상이 절 내버려두지 않네요. 어쩔 수 없잖아요. 이대로 당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요.”

사실 작년 오성 전자는 256MD램에 성공했지만, 실적이 별로 나오지 않았다. 연말이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져서 벽걸이 액정 TV, HDTV용 브라운관에서도 채용되면서 매출이 급격히 늘어났다.

문제는 이런 시기에 국내 주식 수급 자체가 좋지가 않았다.

기관 투자자나 해외 투자자의 자금 사정이 시기적으로 좋지 않아서 중소대형주 매입이 시장 가치를 따라가지 못했다.

한전이나 포철 거래량이 고작 10만 주가 채 되지 않았고, HY 자동차 거래량은 고작 4만 주에 불과할 정도로 나빴다.

오성 전자는 특히 외국인 투자자가 제대로 매입도 못 한 상황이라서 주가를 올려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집요할 정도로 개인에게 후려쳐서 주가를 떨어트렸다.

이런 시기에 무려 586억이라는 자금 수요가 들어오자 이들 세력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량을 조금씩 팔아 치웠다.

[하루 백만 주 이상 거래되는 초대형주들이 증권사의 자금 악화 때문에 힘을 쓰지 못해서 주가는 계속 밀리는 상황입니다.]

김명준 과장은 최민혁 지시를 받아서 이들 분위기를 무시한 채 계속 소극적이지만 집요하게 물량을 받아먹었다.

오성 전자 주가는 이상할 정도로 힘을 추지 못해서 계속 추락했다.

덕분에 그는 580억으로 무려 68만 주를 사들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8만원을 한 번 찍은 주가는 오성 전자 일사분기 대규모 흑자 소식에 무려 12%를 껑충 뛰어오르면서 단숨에 10만원을 회복했고, 11만원을 넘어서 12만원에 도달했다.

주식 가치는 무려 816억에 달했다.

이번에 장난치다가 막대한 손해는 물론이고, 오성 전자 주식을 비싸게 산 대형 투자자는 의문의 큰 손을 욕했다.

의도치 않게 대형 주식 시장을 뒤흔들어 놓은 최민혁은 단숨에 136억 가까이 벌어들인 이 결과에 혀를 내둘렀다. 뒤늦게 그도 이 시기가 재판에 집착해서 주변을 돌아보지 않아서 공백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덕분에 미래 정보를 얻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꽤 큰 이익을 거뒀기 때문이었다.

‘추세가 돈을 버는구나.’

겉으로는 최민혁도 KM 전자 지분을 포기하겠다고 떵떵거리고는 있지만 내심 그 지분이 아까웠다. 지금까지 마음 한 구석에 최훈열 전무에게 쏟는 시간도 낭비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 미련도 버린 채 필요하다면 할아버지 최용욱 회장과 정면에서 싸울 각오를 한 채 느긋한 마음으로 KM 전자 내부 변화를 살폈다.

‘역시 현금이 두둑하게 생기니, 마음이 편해지네. 회사 내부에서 최 전무 싫어하는 이들도 서서히 움직이겠지.’

***

기획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최훈열 전무 라인 쪽에서는 분노했지만, 이쪽저쪽에 알릴 일은 아니었고, 비서 오혜정은 감히 떠들지 못했다.

조성돈 팀장은 회사 내부적으로 중도를 걷기 때문에 굳이 회사 내부에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디오 사업부 기획을 메인으로 담당하는 박상기 차장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그는 겉으로는 소심한 적 했지만, 회사 분위기를 살피다가 기획가 왔을 때 문형섭 부사장에게 다가갔다.

“이번 대운 전자 신제품 TV 광고 때문에 방송 예산을 20억 가까이 더 당겼다고 해서 재무팀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KM 전자 내에서 유일하게 흑자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회사를 먹여 살린다고 자부한 문형섭 부사장은 심드렁했다.

“최 전무 그 친구가 하는 행패가 어제오늘 일이 아니잖아.”

“그보다는 최근 2년 동안 무섭게 성장한 대운 전자 위세가 무섭습니다. 세탁기, 냉장고, 심지어 다이아몬드 VTR로 히트했는데, 이번에는 TV를 내걸고 있습니다. 오성이나 LC 전자 고객층이 워낙에 탄탄해서 크게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우리 고객층은 다릅니다.”

“하긴 획기적인 광고전략인 것은 사실이니까. 멘트를 짧게 준 것이 효과가 컸어. 최첨단 기법을 도입한 것도 나쁘지 않아. 브랜드가 딸리면 그런 창의적인 생각은 있어야 하는데, 우리 최 전무는 그런 거 못해.”

“그러게 말입니다.”

박상기 차장은 계속해서 TV 사업부를 까면서 침이 튀도록 떠들었다.

오늘따라 유달리 시끄러운 박상기 차장 행동에 문형섭 부사장은 인상을 찡그렸다.

“박 차장.”

“네, 부사장님.”

“할 말이 있으면 해.”

딱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획실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이어졌다.

문형섭 부사장도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집중하기가 무섭게 비서가 들어오는 것도 손짓을 막아서 아무도 들여 보내지 말라고 손짓했다.

그는 박상기 차장 이야기가 다 끝나자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스토커처럼 집요한 최 전무가 그냥 가만히 있고?”

“말도 마십시오. 주먹질까지 일어날 뻔했는데, 김명준 과장 때문에 그나마 거기서 끝났습니다.”

“가만 최 전무 반응이 너무 과하잖아. 오 비서 이야기는 정말이었어?”

“우리 기획팀 이영란 대리가 다른 여직원 통해서 들은 이야기로는 100% 사실입니다. 최훈열 전무가 툭하면 오혜정 비서를 찝쩍거리니까요. 회사 입구에서 기다리다가 차까지 태운다고 하지를 않나. 직원 회식이 있을 때 갑자기 끼어들어서 추근대지 않나. 뭐 끝도 없습니다.”

“쯧쯧.”

문형섭 부사장은 혀를 차면서도 이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최훈열 전무 능력에 대해서 이미 의심했다.

지금까지는 손동권 전 실장이 최 전무에 갈려나가는 것을 보고 나서 자중했다. 이제는 최민혁 실장이 설치면서 상황이 달랐다.

‘사장님이 회장님 때문에 참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난 이야기가 달라.’

그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박상기 차장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자네는 참 속을 안 보여.”

“차장 나부랭이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요.”

“이 친구도 참, 알았어. 그러면 보자, 우리 이번에 베트남 공장 신설 TFT가 있잖아. 거기 관련자 모두 모아서 크게 회식이나 해.”

“네?”

“이 친구가 참 둔하네. 거기 가서 여직원에게 술을 잔뜩 먹여서 기획실에서 있었던 일을 다 폭로하란 말이야. 지금은 최 전무의 서슬이 퍼런 칼날을 두려워서 조심하지만, 최민혁 실장이란 돗자리를 깔아두면 이야기가 달라.”

“그게......”

“불안해?”

“아무래도 좀......”

“걱정 마. 이번에는 나도 사장님을 따로 만나서 이 문제를 적극 항변할 테니까. 아무리 오너 일가라고 해도 여직원을 자기 맘대로 부릴 수는 없는 거야.”

‘물론 이건 명분이지만.’란 말까지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좋아지자 그제야 진지한 주제를 이야기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차입금 문제와 KM 전자 유동성 문제를 계속 문제 삼던데, 역시 과장된 것이겠죠?”

“그건 아니야. 나도 전 손 실장 주장에 공감해.”

“최악의 상황에 KM 전자도 위험하다는 말입니까?”

“자네는 그룹 내의 투자 보고서를 보지 못해서 모를 거야. 지금 해외에서 단기로 자금을 막 당겨서 쓰고 있잖아. 만약 그런 문제가 차입금 문제와 결합한다면 KM 그룹 전체적으로 위기가 올 수도 있어.”

“맙소사. 그, 그러면 최 실장 주장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말입니까?”

“만약의 경우에 그럴 수가 있다는 거야. 비메모리 사업이 순조롭게 돌아간다면 그런 상황이 생기지 않을 거네.”

“......네.”

하지만 박상기 차장 안색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긴장한 문형섭 부사장 태도에서 그 역시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늦게 최민혁 실장이 최훈열 전무와 왜 그렇게 극단적인 대립을 보였는지 깨달았다.

‘최 실장이 그래서 그렇게 분노했구나. 최 전무 그 인간보다는 차라리 최민혁 실장이 더 나을지도.’

< #01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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