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2 대 >
보다 못한 박상기 차장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기 실장님, 이번 기획안은 기조실에서 이미 결정이 난 것으로......”
“기다려보세요.”
그는 바로 장승일 기획 조정실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 안건을 따졌다.
[이번 KM 전자 투자 기획안은 그룹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결정 난 겁니까?]
[그게 사실은......]
사실은 최용욱 회장이 주도적으로 결정하고 밀어붙이는 일이었다. 기조실 내부에서도 반대하는 이가 꽤 많았다.
그 자세한 내막을 말할 수 없는 장승일 실장은 이미 뜨거운 맛을 경험해서인지 최민혁 눈치를 보면서 말을 버벅거렸다.
최민혁은 이미 자신이 하는 요구가 최용욱 회장에게 반기를 드는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설사 자신이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그저 그룹 수명이 최소한 늘어나기만을 바랐다.
‘이 정도 노력이라면 지분 받은 대가로 충분하겠지.’
[실장님, 그러면 아직 결정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까?]
[아, 그룹 외부적으로 그렇지만 내부적으로 일부 결정이......]
[좋습니다. 위에서 그렇게 할 수도 있죠. 그런데 이 기획안이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면 다시 재검토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또 말꼬리를 흐리는 장승일 실장은 차마 최용욱 회장 성격 때문에 더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군요. 결국 장승일 실장님도 반대하는 것 아닙니까?]
[......]
[답변 충분히 들었습니다.]
말 없는 장승일 실장 태도에 단호하게 전화를 끊은 최민혁은 완전히 얼어붙은 두 사람을 앞에 둔 채 아예 결론 내렸다.
“이번 투자 기획안을 원점에서 다시 재검토할 겁니다. 어설프게 기획안을 올리면 제가 기획실을 갈아엎을 겁니다.”
“저, 저기 실장님, 그렇게 마음대로 결정하시는......”
충분히 설득해도 먹히자 않은 것에 분노한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에게 소리쳤다.
“조 팀장님, 정신 좀 차리세요.”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박상기 차장님!”
“아, 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팀장이 미처 간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밑에서 도와주는 당신이 나서서 잘못된 부분을 고쳐야 할 것 아닙니까!”
최민혁은 내심 기획안에 부정적인 박상기 차장이라면 분명히 다른 라인이 있을 거로 생각해서 압력을 더 넣었다.
두 사람은 나가면서도 처음과는 달리 최민혁 실장의 지나친 반대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깊이 생각했다. 뒤늦게 과거 보고 내용을 떠올리면서 문제점을 떠올린 것이었다.
김명준 과장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도가 심한 것 같습니다.”
미래를 알 수 없다면 자신이 설득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았다. 더욱이 할아버지 최용욱 회장이 자기 뜻을 바꿀 사람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KM 그룹이 막대한 차입금을 받으면 무조건 어려워질 겁니다.”
정확히 8년 후에 일어날 일이다. 그때는 회사 적자를 감당 못해서 결국 TV 사업부를 정리하는데, 그나마 인수하겠다고 나선 중국 기업이 미적거리면서 손 떼버리고 만다.
TV 사업부는 조각조각 분해되어서 헐값에 팔려나가고, 대부분 직원은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길바닥으로 쫓겨난다.
“그거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아닙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회사 일이 잘될 수도 있고, 힘들 때도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아직 정해진 것은 없지 않습니까?”
“최훈열 전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정말 회사를 도와주는 겁니다. 기획팀 실무 책임자로서 뻔히 알만한 일을 묵인한 두 사람 책임도 큽니다.”
“......”
김명준 과장도 내심 통쾌하게 생각했지만 두 사람이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해서 나선 것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 두 사람도 너무 소극적이라서 문제를 키웠다는 점을 뒤늦게 깨달고는 고개를 숙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뭐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미래 일은 누구도 예단할 수 없으니까요.”
“최훈열 전무님도 나름 노력을......”
“아, 그 부분은 곧 알게 될 겁니다. 일단 그렇게만 아세요.”
김명준 과장도 과거라면 반대하겠지만 이미 500억이라는 거금을 마련한 최민혁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가 특히 놀란 것은 최근 행보였다. 작전주를 찾기는커녕 아예 투자를 보류했기 때문이다.
“참, 그 500억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최민혁도 현금이 많을수록 좋다고 확신하자 이 시기에 오성 전자같은 대형주는 괜찮다고 판단하자 말을 바꾸었다.
“쉬어가는 것도 투자입니다. 아, 생각해보니, 오성 전자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일단 500억은 모두 오성 전자 주식을 모두 사들이세요.”
“알겠습니다.”
***
KM 전자 옥상 사옥은 임직원 휴게실로 많이 이용되는데, 오늘도 건물 곳곳에서는 삼삼오오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성돈 팀장은 초조한 표정으로 줄담배를 연이어서 물었다.
박상기 차장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괜찮습니까?”
“좀 아프네요.”
“네?”
“최 전무였다면 그냥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최 실장은 팩트로 때리니, 고통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거야......”
“박 차장님도 요즘 영업팀에서 하는 말들을 알지 않습니까. 다들 죽겠다고,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힘들어진다고 합니다. 벌써 2년 전부터 나온 이야기라서 이제 만성이 되어서 무시한 사실입니다.”
“으음.”
박상기 차장은 착잡한 조성돈 팀장은 다시 담배를 물자 말렸다.
“몇 년 전에 담배를 끊었지 않습니까?”
“오늘은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사실 최민혁 실장이 냉정하게 말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실감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더 고통스럽습니다. TV 사업부 미래를 얘기할 때는 섬뜩했습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될까요?”
“최민혁 실장님은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뭔가 알고 있지 않고서야 그런 식으로 확신을 못 가집니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보고서 내용 중에 최민혁 실장님이 언급한 것도 있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최민혁의 과도한 반응 때문에 덩달아서 심각해진 박상기 차장도 평소와는 전혀 다른 조성돈 팀장 눈치를 봤다.
“어쩔 생각입니까?”
“지금 봐서는 최 실장은 최 전무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려고 작정한 것 같은데, 그러면 그 일을 도와줄 수밖에 없죠.”
“배종대 과장을 이용할 생각입니까?”
“겉으로는 대범한 척하지만 속으로 잔머리를 잘 굴리는 친구이니, 굳이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최 실장이 한 일만 말해도 충분합니다.”
“일이 커질 텐데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후유.”
박상기 차장도 단단히 마음 굳힌 조성돈 팀장뿐만 아니라 적극 위기를 호소하던 최민혁 실장 모습을 떠올리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
든든한 자금이 곧 들어올 것을 예상한 최훈열 전무는 요즘 위성방송 송신 시스템 사업에 꽤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 디지털 위성방송은 앞으로 KM 전자 미래 먹거리 사업으로 괜찮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한 선행기술 확보라는 명분 아래 위성방송 사업부 이일태 이사와 같이 전자통신연구소를 자주 방문했다.
‘5년 연구 개발비로 300억을 투자해도 표가 잘 안 날 정도로 연구비가 특히 많이 들어가. 투자 손실로 적지 않은 연구비는 사라지고.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가만......’
“오 비서는 아직 이래?”
“인사팀장과 몇 차례 상담은 했지만 계속 거절하고 있습니다.”
이재상 비서는 최훈열 전무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인사팀에서도 계속 말이 나오는데, 보류하는 것이 어떨까요? 너무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면 문제 될 것 같습니다.”
“이 비서, 지금 날 설득하려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곧 사장님이 되실 것 아닙니까. 괜히 그 전에 입방아에 오르면 기조실 눈에도 뜨일 것 같고......”
기획 조정실 말이 나오자 인상을 잔뜩 구긴 최훈열 전무는 입맛을 다셨다. 새삼 눈에 아른거리는 오혜정 자태 때문이었다.
“알았으니까. 이 비서가 문제없도록 잘 좀 풀어 봐. 내 말 잘 알지?”
“그리고......”
“또 다른 일이 있어?”
“배종대 과장이 기획팀에서 이번 사업안을 다시 재검토에 들어갔다가 확인해달라고 했습니다.”
“?”
최훈열 전무는 이미 다 끝난 일을 인제 와서 검토하겠다는 농담을 어떻게 받아들지 알 수가 없어서 눈만 껌뻑거렸다.
심호흡까지 한 이재상 비서도 오혜정 욕을 하면서 자책했다.
“최 실장님이 기획안을 재검토하라고.......”
“지금 날 웃으라고 하는 소리야?”
“아닙니다. 심지어 조 팀장과 박 차장도 최 실장님에게 앞에서 면박당했다고 해서 기획실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진짜야?”
“네.”
“최민혁 이 새끼가 결국 사고 치네!”
그는 분노한 채 전무실에서 벌떡 일어나서 최민혁 이사실로 향했다.
***
최민혁은 이제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자 퇴근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마시던 커피를 다 마시고, 오혜정 비서의 시선을 받으면서 일어났다.
그런데 때마침 실장실 문이 박살이라도 난 것처럼 열리더니 씩씩거리는 최훈열 전무가 기획팀 인원까지 거느린 채 나타났다.
TV 사업부를 담당하는 배종대 과장과 기획팀장 조성돈 부장, 그리고 이재상 비서를 같이 대동하고 나타난 것이었다.
최훈열 전무는 오혜정 비서를 보자 잠깐 흠칫해서 입가에 미소를 짓나 싶었지만, 최민혁 상판을 보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야, 최 실장, 지금 너 뭐 하자는 거야?!”
삿대질까지 하는 최훈열 전무 행동에 최민혁은 어깨마저 뒤로 젖힌 채 다리를 꼬았다.
“그러면 우리 최 전무님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없나 봅니다. 남의 사무실 들어설 때 최소한 노크는 하셔야죠.”
“이 새끼가 지금 나랑 말장난하자는 거야?”
“그 말 함부로 하지 맙시다. 듣는 이 새끼가 저 새끼라고 하면 기분 좋겠습니까?”
“하, 이놈 보게.”
최훈열 전무는 어이가 없어서 아연실색한 세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 뒤에 동행한 세 사람은 최민혁 폭언에 뒤로 물러나서 아예 끼지 않으려고 했다.
최민혁은 불안한 시선을 떨면서 침중한 얼굴로 커피를 내온 오혜정 비서를 보자 피식 웃었다.
“요즘 우리 최 전무님이 여직원을 상대로 질척거린다는 소리도 파다하던데, 정말인가 봅니다.”
“야!”
분노한 최훈열 전무가 최민혁에게 달려들었지만, 그 앞을 막은 것은 김명준 과장이었다. 그는 마치 서로 짜기라도 한 것처럼 최훈열 전무 양손을 잡았다.
“김 과장, 너 이 새끼도 보이는 게 없구나!”
“최 전무님, 그만 하시죠.”
하지만 최훈열 전무도 바보는 아니었다. 회사 내에서 이리저리 말이 도는 것과 실제로 말로 듣는 것은 상황이 좀 다르다.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세 사람과 너무 놀라서 딸꾹질하고 있는 오혜정을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씨발.’
최훈열 전무는 내심 최민혁의 노림수에 이를 갈았지만 참았다. 음흉한 미소를 짓는 최민혁 얼굴을 보자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을 느꼈다. 오혜정 문제는 싸워봐야 무조건 자신만이 손해였다.
“으음, 회사 내에 도는 헛소문 듣고 오해하나 본데, 오혜정 비서 일은 소문일 뿐이야. 내가 지금 널 찾아온 것은......”
최민혁은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간 최훈열 전무 태도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제가 오혜정 비서에게 직접 물어볼까요?”
“민혁아, 난 너의 둘째 큰아버지다, 말버릇이 그게 뭐냐.”
“큰아버지면 회사 여직원을 마음대로 해도 된답니까?”
“으악!”
결국 폭발한 최훈열 전무는 최민혁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상상을 초월한 대립에 넋 놓고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재상 비서가 중간에 말리고, 다른 기획팀 직원이 중간에 합류하자 일단 혼란한 상황은 다행히 넘어갔다.
한 대 치면 맞아줄 각오까지 한 최민혁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 역시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 어깨를 으쓱했다.
< #012 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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