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1화 (11/1,021)

< #011 >

직급은 부장과 차장으로 차이가 나지만 나이 차가 별로 없는 탓에 서로 말을 높이는 두 사람은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실력에 자신이 있어서 늘 당당한 TV 사업부를 담당한 배종대 과장이 휴게실 근처로 잠깐 왔다가 두 사람 대화를 들었다.

“제가 잘못 들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신임 기획실장님이 KM 전자 올해 가장 중요한 기획안을 퇴짜 놓았다는 말 같은데, 맞습니까?”

늘 저돌적인 오너 일가에 주눅이 들어서 공무원 냄새를 풍기는 두 사람은 뒤늦게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탄식했다.

“아.”

오히려 신이 난 배종대 과장은 재미있다는 듯이 떠들었다.

“조 팀장님, 이제 큰일 났습니다. 최 전무님이 아침마다 내려와서 출근 도장 찍는 곳이 우리 기획팀 아닙니까. 그런데 신임 기획실장이 사고 쳤으니, 어찌합니까?”

꼰대 의식이 조금 있는 조성돈 팀장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배 과장, 지금도 최 전무님이 이 기획안을 밀어붙이는 것을 잘 알아. 하지만 최 실장님이 확인한다고 하는데, 나도 별수가 없잖아.”

“압니다. 저라고 해서 팀장님을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최 실장님에게 너무 저 자세로 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요.”

그도 쥐뿔도 없는 재벌 3세가 기획실장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정 답답하면 자네가 나서.”

“과장 나부랭이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럽니까?”

“또 진급 누락 된 것 때문에 그러나 본데, 배 과장 일은 나와는 무관해. 최 전무님이 손을 쓴 것으로 아니, 인사팀에 따로 확인해 봐.”

놀라운 사실에 욱한 배종대 과장은 발끈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지금 최 전무님이 저에게 수작을 부린 겁니까? 아니 제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런 짓을 한다는 말입니까?!”

‘자네 까칠한 성격 때문에 찍혔어.’란 말까지는 굳이 하지는 않았다.

“난 몰라.”

박상기 차장이 커피를 홀짝이면서 혼자 흥분한 배종대 과장을 쳐다보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배 과장이랑 놀 상황이 아니라서 다시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정말 기획안이 보류된 겁니까?”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 느낌이지만 최 실장님이 말하는 것을 봐서는 쉽게 통과시킬 것 같지 않습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역시 재벌 3세가 자존심 차리려고 억지로 행패를 부리는 거다. 만약 그렇다고 설사 합리적인 보고를 한다고 일이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신임 실장은 이제 겨우 대학에 들어간 것으로 압니다. 그것만 봐도 정상적인 의사 결정 내릴 수가 없습니다. 제가 듣기로 최 전무가 기획실장 일을 도맡아 하다가 자신은 사장으로 승진하고, 새로운 사람에게 넘기는 것으로 압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는데......”

사실 이 부분은 회사 내에서도 말이 많았다. 반대 의견을 낸 기획실장을 잘라버리고, 오너 일가가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잠깐 자리를 맡기로 한 최민혁이 기획실장 노릇을 한다고 한다는 것은 오영근 사장이 허락할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그제야 일이 좀 묘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종대 과장만 홀로 분개해서 최훈열 전무를 죽으라고 씹어댔다.

“......”

‘저러니 승진이 빠지지.’

***

KM 전자 본사는 서울 강남구 코엑스 사거리 인근에 있는 KM 빌딩에 입주했다. 지하 3층, 지상 15층의 이 빌딩은 연면적이 2,000평 가까이 된다.

최민혁은 하루 강의를 완전히 패스한 채 이 건물을 찾았는데, 건물 입구에서 장애를 만났다.

뜻밖에도 최민혁에 대해서 안내 데스크에서 잘 모르고 있었다.

그나마 김명준 과장을 아는 지인이 있어서 큰 오해를 겪지 않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이사로 선임된 사람을 모른다니.”

김명준 과장 역시 착잡한 얼굴을 한 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마 윗선에서 통보해주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최민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단단히 작당했겠죠. 설마 이곳에 제가 나타날 줄은 몰랐을 테니까요.”

“......”

김명준 과장도 눈치를 보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 최민혁은 마약 사건이 최악으로 흘러갔다면 구치소에 갇혀서 재판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최민혁도 다시 한 번 꿈속의 재판 기억을 연상하고 나서 기분이 나빠지자 한동안 침묵한 채 묵묵히 기획실로 향했다.

‘할아버지랑 딱히 감정이 없지만 어쩔 수가 없네요. 제가 설득해서 될 일도 아니고, 우리 서로 쉽게 갔으면 합니다.’

***

신임 기획실장이 사고 쳤다는 이야기 때문에 평소보다 10분 더 팀원과 이야기하다가 사무실로 돌아가던 기획실 박광민 사원은 두 사람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제가 신임 기획실장 최민혁입니다.”

“네?”

너무 훅 치고 들어온 이야기에 깜짝 놀란 박광민 사원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어붙었다. 그도 신임 기획실장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장난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놀랄 것도 없습니다. 으음, 일단 가이드 좀 해주세요.”

비록 말뿐인 이사라고 해도 평사원 정도는 잘라버릴 수도 있는 당사자를 앞에 둔 박광민 사원은 마치 신임 병사처럼 자세를 바로 했다.

“아, 알겠습니다.”

미심쩍기는 했지만, 거짓말이면 바로 들통 날 일이라는 것을 인지한 박광민 사원은 조심스럽게 기획팀 사무실로 안내했다.

현재 9명인 기획팀은 전 기획실장이 갑자기 잘리는 바람에 붕 떠 있어서 사무실이 제대로 굴러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박광민이 신임 기획실장이 왔다는 이야기를 넌지시 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다들 하는 업무를 멈춘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나서 최민혁에게 인사했다.

“실장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회사 오너 일가가 나타난 것이니, 긴장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최훈열 전무도 주로 팀장급만 상대하기에 기획팀 직원 전체를 상대하지 않았다.

아무리 말뿐인 기획실장이라고 해도 사단장을 직접 보자 다들 습관적으로 긴장했다.

최민혁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쳐다보면서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불행히도 아는 얼굴이 없어서 실익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자신을 향하는 경직된 시선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주식 투자를 통해서 500억을 벌었던 것과는 비교하기 힘든 것이었다.

최민혁은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해서 책임자로 보이는 조성돈 팀장 안내를 받아서 기획실장 사무실로 천천히 향했다.

그는 뒤늦게 복잡한 시선을 받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 있을 회사는 아니니까.’

***

“광민씨,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기획실에서 가장 입담이 센 배종대 과장이 포문을 열었다. 다른 팀원 역시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박상기 차장은 눈치껏 이 모임에서 빠진 채 슬쩍 기획실장실로 가버렸다.

얼떨떨한 질문 공세에 당황한 박광민은 말을 계속 더듬었다.

그는 아침부터 소란의 주동이 되어버리자 아는 대로 설명했다.

배종대 과장이 깔끔하게 정리했다.

“결국 사무실 입구에서 만나서 이곳까지 안내한 것이 박광민씨가 한 역할이다?”

“네.”

“그게 뭐야? 난 또 뭐 있는 줄 알았잖아!”

“죄송해요.”

웃음이 많은 이정원 과장이 구박받는 박광민을 다독였다.

“배 과장이 장난삼아서 하는 말이니, 마음에 두지 마. 광민씨는 숫기가 그렇게 없어서 어떻게 이 일을 계속하려고 그러는 거야?”

“죄송합니다.”

이정원 과장은 팔꿈치로 툭 치면서 친근하게 말했다.

“그런데 정말 다른 이야기는 없어? 왜 그 분위기란 게 있잖아.”

그는 앳된 최민혁 얼굴을 떠올리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나이가 어려 보여서 그것만 생각날 뿐입니다. 솔직히 먼저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면 실수할 뻔했습니다.”

“하긴 심하게 어리더라, 가만 올해 대학 들어갔다고 했으니, 와아, 나이가 얼마나 어린 거야? 군대 면제되었다는 소리가 있으니, 이제 스무 살이야?”

곧이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왔지만, 썩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스물살 짜리 초임 기획실장이 자기 상급자라는 것을 떠올리자 차라리 기획실장이 공석인 게 오히려 다 났다고 소리쳤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

최민혁이 KM 전자 기획실장실에 들어가자 초면임에도 자연스러운 오혜정 비서가 내온 커피를 홀짝였다. 늘씬한 각선미에, 금테 안경을 한 그녀는 사람의 시선을 한눈에 끌었다.

조성돈 팀장조차 헛기침했고, 뒤늦게 따라 들어온 박상기 차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참 오 비서는 최 전무님 사무실로 옮긴다는 소리가 있던데, 어떻게 할 거야?”

“아닙니다!”

딱 잘라서 거부하는 오혜정 비서 안색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8등신의 미모 못지않게 연예인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미모가 빛을 잃었다.

하지만 오혜정 비서 집안 사정을 그나마 알고 있는 조성돈 팀장이 박상기 차장을 구박했다.

“박 차장님도 참 그러지 맙시다. 오 비서 가정 사정을 알면 그렇게 말 못합니다. 이번에는 최 전무의 독선입니다. 여기가 자기 집도 아니고, 비서가 마음에 든다고 막 빼가면 됩니까?”

“그거야 본인이 좋다고 한다면 굳이 간섭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본인이 싫다고 하지 않습니까.”

“최 전무님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왜 이 자리에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안한 오혜정은 허리를 다시 숙였다가 조용히 실장실을 나섰다.

최민혁도 원래는 오혜정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그 미모에 놀랐다. 뒤늦게 두 사람의 논쟁을 듣다가 구치소 면접실에서 떠올리지 못한 기억이 오혜정에 대한 사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이 여자였구나. 둘째 큰아버지가 강간한 여자가 오 비서였구나.’

오혜정 비서는 계속 지금 자리를 고집했지만 새로운 실장이 오고 난 후에 결국 최훈열 전무가 승진해서 사장이 되자 그 비서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에는 최훈열 전무도 KM 전자 일 때문에 별다른 간섭이 없었지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난 후에 계속 오혜정에게 질척거렸다.

사고가 터진 것은 역시 국내 출장 때문에 둘만 같이 간 이후다. 투숙한 호텔에서 오혜정을 강간해버린 것이었다.

오혜정은 결국 최훈열 전무를 고소했지만 뒤늦게 임신한 것을 알고 나서는 합의해버렸다.

‘기조실이 엄청 괴롭혔다고 했지. 하긴 기업 법무팀과 싸워서 이기기 어렵지.’

김여정 여사가 이 사실을 알고 나서는 오혜정을 스토커처럼 괴롭혔고, 결국 오혜정은 아이만 데리고 종적을 감추었다.

최민혁은 당시 복수심에 미쳐서 여러 방안을 연구하다가 오혜정에 대한 일을 알고, 찾아보았지만 결국 뒤늦고 말았다.

‘우울증으로 자살했지.’

지금이면 최훈열 전무가 한창 오혜정에게 공을 들이는 시점이었다.

최민혁은 KM 전자 내부에도 꽤 문제가 적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둘째아버지처럼 오너 일가가 전횡을 저지른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 날 끌어들인 것일 수도 있겠어.’

“저기 실장님......”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 말에 사색에서 곧 깨어난 후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아, 오 비서는 최 전무 비서로 안 보낼 겁니다.”

“......네.”

박상기 차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최 전무님이 오 비서에게 흠뻑 빠져서 쉽지 않을 겁니다.”

“최 전무가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입니다. 비서에게 질척거리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죠. 개도 그 짓은 하지 않습니다.”

“!”

두 사람은 노골적인 최민혁 말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 최훈열 전무와는 이미 척을 지기로 마음먹은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아무리 오너 일가라고 해도 여직원이 성 노예가 아닙니다. 함부로 구는 것을 지켜볼 수가 없습니다. 이건 제가 직접 나서서 스토킹으로 고소하던지 밀어붙일 겁니다.”

실상은 최훈열 전무를 자극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내막을 잘 모르는 두 사람은 안색이 딱딱하게 굳은 채 기획안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최민혁 독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두 분 다 TV 사업부 적자 때문에 KM 전자 손실이 계속 늘어나는 것 알 것 아닙니까. 오성 전자와 LC 전자와는 싸워서 이기기도 힘듭니다.”

“하지만 저희 TV의 품질은 두 회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화질 면에서는 더 좋다고 하는 소비자가 대부분입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두 회사의 브랜드에 밀려서 이기기 힘듭니다. 그렇다고 원천 기술이 앞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최 전무님도 디지털 TV 시대에 앞서서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려는 것 아닙니까?”

“디지털 시대는 개뿔, 지금 아날로그 TV 경쟁에서도 밀리는 주제에 무슨 말을 못합니까. 2,000억 투자금 받아서 자기 주머니나 채우겠죠. 결국 그 피해는 회사나 주주에게 돌아갑니다. 최종적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것은 당신 같은 임직원 아닙니까.”

“......”

추상같은 질책에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들 역시 억울했다. 전 기획실장이 선봉에 섰다가 회사에서 퇴출되었으니까.

< #01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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