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0 >
‘오, 이거 좋은데, 결산법인 회계처리 오류라, 그게 아니지. 탈세겠지.’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은 증권감독원이 결산법인 중에 무작위로 회계 감사한 내용이었다. 이 시기에 KM 전자 재무팀은 미친 듯이 난리를 쳤기 때문이다.
‘잘하면 우리 큰아버지에게 제법 타격을 줄 수도 있고. 좀 더 뭔가 있는데, 그게 뭘까. 자극적인 사건이 더 있어.’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있는 자리가 구치소 접견실이라는 것을 떠올리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꿈과 같은 환경 아래에 있어야 구체적인 지식을 얻을 수가 있는 거야?’
최민혁은 꿈과 관련된 지식이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 편으로 혀를 내둘렀다. 마침 최민수 접견 때문에 구치소에 오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았다.
상념은 여기까지였다.
어깨가 축 처진 얼굴을 한 채 구치소 면회소에 나온 최민수는 대학에서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해서 나타났다.
“민수 형!”
“......최민혁!”
어금니를 부드득 가는 최민수는 뒤늦게야 최민혁이 자신에게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구속된 것은 작전 세력과 엮인 일 때문으로 최민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철저한 확인을 통해서 진행한 일이라서 빌미를 제공한 최민혁에게 책임을 돌릴 수는 없었다.
결국 최민혁 앞까지 터벅터벅 걸어서 면회 테이블에 앉았다.
“웬일이야?”
“에이, 형이 구치소가 갔다고 하는데,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안부겸 해서 나온 거야. 이번에 구속되었다면서?”
“그렇게 됐다.”
“진짜 대학 앞에서 형사에게 끌려간 거야?”
요즘도 잠을 자면 꼭 꾸는 악몽인 터라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최민수는 참았다.
“......그래.”
의도적으로 약을 바짝 올린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내가 괜한 소리 해서 형 마음 아프게 하는 것 같은데......”
“괜찮아.”
“형을 위로하기 위해서 면회 왔는데, 크게 나빠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야.”
“얼굴 봤으니, 난 이만 가 보련다.”
“어어, 그러지 좀 마. 정말 걱정되어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이니까.”
“지금 날 놀리냐?!”
속으로 내심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은 최민혁은 꿈속의 미래를 떠올렸다. 그가 마약 혐의로 구치소에 들어간 후에 종종 최민수가 거꾸로 자신을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최민혁은 최민수에게 어리석음을 끊임없이 조롱받았고, 그 덕분에 KM 그룹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당히 잘 알았다.
그 과정에서 얻은 모멸감은 경험해보지 않다면 느끼기 힘든 것이라서 최민혁은 선명하게 기억했다. 아니 이를 갈았다.
복수는 무의미한 것이라는 개소리를 하지만 정작 자신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통쾌했고, 시간이 너무 잘 가서 아쉽기만 했다.
“괜히 내가 준 정보 때문에 형이 구속될지는 몰랐어. 미안해.”
아킬레스건을 건드려서인지 분노한 최민수는 양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뒤늦게 구치소 면회실을 방문한 다른 이들은 쾅 소리에 힐끗 쳐다보았다.
냉정하게 상황을 살피는 최민혁이 다급하게 사과하는 선에서 끝났다.
최민수는 주변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감정이 풀리자 속에 품고 있는 감정의 응어리가 폭포수처럼 터져 나왔다.
“진짜 엿 같다. 억울한 게 뭔지 아냐. 그놈들은 기범형에게 연락받아서 나에게 연락한 거야. 내가 주가 조작 세력의 행동 대장이라나 뭐라나. 그래서 날 통해서야 서로 합의가 가능하다고 개지랄한 것 아냐. 그런데 이 일을 주도한 기범 형은 나중에 전혀 모르겠다고 잡아떼잖아!”
“......”
‘흠, 횡설수설한 것을 봐서는 나에 대한 분노보다는 둘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은가 보네. 잘만 하면 갈등을 부추기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아. 혹시나 해서 왔는데, 역시나 잘 왔네.’
최민혁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들어보면 최민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저 김기범이 시키는 대로만 했고, 사달이 나자 몽땅 그가 뒤집어쓴 것이었다.
그리고 겁 많고, 의심 잘하는 김기범은 아니다 싶으니, 나 몰라라 하고 도망친 것이었다.
‘나랑 다른 것이 없구나.’
문득 최문경 부회장을 원망도 많이 했지만 최민수 꼬락서니를 보니, 꼭 그의 탓으로 돌리기 어려웠다. 무능하고 소심했던 자신 탓이었다.
‘그렇다고 꿈의 일을 그냥 덮고 갈 수는 없지. 어차피 내가 가만있어도 그쪽에서 행동으로 옮길 테니, 그 기회를 이용해서 제대로 복수나 해줘야지.’
“큰아버지는 뭐래?”
“집행유예로 판결 날 거래. 그런데 재판하는 동안에는 구치소에 있어야 해서 보석으로 빼 내달라고 하니, 지금은 여론 때문에 힘들다나 뭐라나. 진짜 인생 좆같다.”
“힘내.”
‘진담이야. 형이 다시 사회에 나와야 복수하기가 더 쉬워질 것 같아. 나도 실망했지만, 진짜 구속될지는 몰랐어.’
집행유예라는 판결을 생각하자 새삼 재벌가의 힘을 확인한 최민혁은 고민에 빠졌다. 사실 간단한 일이라면 일방적으로 복수하면 끝날 일이지만 이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할아버지 최용욱 회장인데, 정말 자신을 사랑했고, 많은 것을 아낌없이 줬다.
비록 정략결혼한 김미숙은 딸 최미연 하나뿐이라고 해도 고작 작은 계열사 하나만 물려주었지만 자신에게는 KM 전자 지분을 넘겼다.
‘심지어 막대한 아버지 유산까지 별 탈 없이 물려줬잖아.’
앞으로 일 때문에 고민하던 최민혁은 결국 한마디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대학에서 퇴학도 당하지 않았으니, 몇 달 후에 구치소에서 풀려나오잖아. 그러니 형 건강관리만 잘해.”
“야!”
‘아차 또 실수했네.’
“어, 쏘리.”
겉으로는 미안한 얼굴을 한 최민혁은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 결국 구치소 접견장을 빠져나가고 말았다.
‘나는 재판 받으면서 대학에서 퇴출당하였어. 그것에 비하면 재수 좋은 거야. 민수 형 구치소 생활 잘 좀 해라. 종종 면회(?)올 테니까.’
***
최민수가 구속되어서 감옥에 간 뉴스는 알게 모르게 한국대 내에서 이야기가 돌았다.
최민혁으로서 이제 겨우 소소한 복수 한 걸음을 했지만, 꽤 만족했다. 그는 심지어 길게 가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 대학 생활도 잘 적응했다.
굳이 먼저 다가가지 않아도 주변에서 알아서 다가온 이들이 많았다.
“민혁아, 좋은 아침.”
“건강 좀 챙겨라. 안색이 영 엉망이다.”
“너 지난주에 물리학 강의 빼먹었지? 여기 필기한 거다.”
“어.”
솔직히 저들 중에 이름을 아는 이는 그렇게 흔치가 않았다.
최민혁은 가끔 돈을 노리고 찾아와서 기부 해라거나, 투자 명분으로 돈을 요구하는 녀석을 가볍게 비웃어 주었다.
좀 심하게 달라붙는 이들은 경호원 김명준 과장으로 하여금 개처럼 내쫓았다.
김명준 과장은 꼭 자신이 잡상인 내 쫓는 경비원 같아서 의기소침했지만,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대리 출석, 대리 쪽지 시험도 썩 나쁘지 않았다. 심지어 돈 받고 대리 시험 봐준 녀석은 언제라도 연락하라고 부탁했다.
대학 생활도 이 정도면 졸업 때까지 해볼 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다행히 기다리는 소식이 있었다. 지난주 부터 꼬리가 생겼다. 이전과는 달리 김명준 과장은 그들이 기조실 소속이라는 것을 알고 넌지시 말해주었다.
‘역시 괜한 짓을 했나?’
기조실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은 좋았지만, 그 여파는 만만치 않았다. 기조실에서 아예 대놓고 뒷조사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최민혁은 오히려 기대한 반응이라서 꼬리 자르기 하기도 곤란해서 그냥 놔두었는데, 가능하면 할아버지에게 제대로 보고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룹 기획 조정실에서는 공식적으로 함흥차사였다. 자기 정보를 습득한 기조실에서 위에 대한 보고를 차단한 것이다.
‘마음에 안 들어. 월급 받으면 제대로 일을 해야 할 것 아냐.’
최민혁은 기획 조정실을 한 번 뒤흔들까 하다가 지금은 큰아버지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우선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서 동부 구치소에 몇 시간 가서 신문을 확인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최민수를 면회해서 기조실 관련 이야기를 떠버렸다.
그런데 최민수는 역시 멍청한 소리나 늘어놓았다.
“너무 예민한 것 아냐?”
“아냐, 정말 무서웠다니까.”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둔한 놈이다.’
김명준 과장이 말해준 기조실 직원의 인상착의를 토대로 사실적으로 말해줘도 최민수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런 이야기 할 거면 앞으로 면회 오지 마라. 내가 사형수도 아니고, 귀찮다.”
“난 형 생각해서 그런 건데......”
은근히 즐거워하는 낌새를 느낀 최민수는 차마 욕설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경고했다.
“구치소에서 나가면 너 정말 그냥 안 둔다!”
‘그래, 이젠 내가 지지다.’
“아, 알았어.”
솔직히 몇 번 구치소 방문하고 나니, 이것도 재미가 없는 최민혁은 그렇다고 신문만 보자고 구치소를 방문하기도 그랬다.
“앞으로 조심할게.”
“오지 마!”
그리고 최민혁 방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최민수는 집사 변호사가 오면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다. 이 사실은 고스란히 최훈열 전무 귀에 들어갔다.
최훈열 전무는 몇 가지 사실만으로 기조실, 즉 아버지가 최민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판단하자 다급하게 움직였다.
그는 조성돈 기획팀장을 직접 찾아가서 조성돈 기획팀장 면전에서 압박했다.
“조 팀장, 그따위로 일 처리할 거면 당장 집에 가서 애나 봐!”
“아, 알겠습니다.”
***
최민혁은 예상보다 늦은 조성돈 기획팀장의 연락에 쾌재를 불렀다. 바로 KM 전자에서 진행하는 신규 투자에 관한 기획안 때문이었다.
[이미 사업부 전체 회의 통해서 내부적으로 다 확인된 내용입니다. 기획실을 총괄하는 최민혁 기획실장님이 서명만 해주시면 됩니다.]
사업부 회의라고 해도 실세인 TV 사업부 최훈열 전무가 정한 일이었다. 밑에 실무진 선에서는 이 안건에 대해서 말들이 많았다.
특히 TV 사업부에 대대적인 투자를 진행한다고 하는데, 지금도 적자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오히려 흑자 기조를 이어가고 있는 오디오 사업부 문형섭 부사장은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살펴야 하지 않나라고 조심스럽게 주장했다.
KM 전자 오영근 사장은 특별하게 좋다 나쁘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곧 있을 다음 사장 임기를 지키기 위해서 최훈열 전무 눈치만 봤다.
아마 한참 구치소에서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갈굼 당하던 최민혁이라면 그냥 알아서 하라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제 책상 위에 올려두세요. 내일 오전에 가서 직접 확인할 테니까.]
[네?]
[조 부장님이 조금 전에 그랬잖습니까. 기획을 총괄하는 기획실장이라서 결제를 해야 한다고, 그러니 내가 그 기획 책임자로서 확인해서 처리할 테니, 책상 위에 올려 두세요!]
[아, 알겠습니다.]
막상 배후에서 일을 밀어붙인 최민혁도 전화를 끊고 나서는 한동안 피가 끓어 올라서 심호흡까지 했다. 마약 사건이 자기 인생 전환의 시작점이라면, 이 기획안 처리가 인생 변곡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당장은 배임 때문에 둘째 큰아버지 최훈열 전무가 자기 뜻대로 움직일 것 같지 않아서 깊이 고민했다.
주식 이익금 중에 30억은 보안팀 인센티브와 인원 확충에 쓰라고 김명준 과장에 주고 남은 500억 이익금을 가지고 다른 대안을 잠깐 생각해보았다.
‘KM 전자는 땅(?) 외에는 아무리 봐도 가망이 없어. 어떤 형식으로든지 적당히 지분도 정리하고, 손 털고 나와야 해.’
***
KM 전자는 자본금 200억에, 자산만 3,000억으로 견실한 회사처럼 보이지만 작년 하반기 적자만 100억이 발생했다.
몇 년 동안 누적된 이익잉여금은 계속 까먹기만 해서 회사 상태가 좋을 리가 없었다.
매출액 대부분이 TV가 차지할 정도로 한쪽에 쏠려 있는 기형적인 구조 역시 문제다.
그렇다고 TV 부분은 오성 전자, LC 전자의 공격에 계속 밀리기만 하는 상황이었다. 아날로그 TV 기술 덕분에 국내 TV 시장의 20%를 장악하고 있지만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결과라서 앞날이 밝다고 하기 어려웠다.
이번 신규 투자 기획안이 통과되면 회사 부채율도 대폭 낮아서 상황이 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미 그룹 사정을 잘 아는 전 손동권 기획실장은 앞장서서 이 기획안을 결사반대하다가 회사에서 잘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어서 눈치만 보는 조성돈 팀장도 형식적으로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최민혁에게 전화를 걸어서 문의한 것이다.
“책상에 올려두라니.”
툭하면 최훈열 전무가 기획실에 나타나서 갈구는 기획안이라서 크게 당황했다.
조성돈 기획팀장과 마음에 잘 맞는 박상기 차장은 당황한 조성돈 팀장에게 질문했다.
“일은 잘되었습니까?”
“그게......확인해보고 결제하겠답니다.”
“네? 우리 부장님 농담도 잘하십니다.”
피식 웃으면서 가져온 커피를 내 미던 박상기 차장은 심각한 조성돈 부장을 보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진담입니까?”
그는 불길한 검은 먹구름이 회사로 몰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제가 이런 일로 거짓말 하지 않습니다.”
< #010 > 끝
ⓒ SSDH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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