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9 >
장승일 기조실 실장도 딱히 결론 내리지 못했다. 이번 사태를 조사하다가 알게 된 최민혁의 투자 실력이 운이 좋은 건지, 정말 안목이 있는 건지 판단하기에는 투자 종목이 너무 작았다.
최용욱 회장은 대충 돌아가는 분위기를 파악하자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두기에도 모호한 상황 때문에 고민했다.
최민수 사건과는 달리 최민혁은 명확한 결과를 냈기에 과정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 민혁 일은 넘어가는 걸로 해. 하지만 민혁 이놈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봐. 헛짓하고 있으면 차라리 다시 본가로 부를 테니까.”
“알겠습니다.”
답을 하는 장승일 실장은 이미 몇 가지를 보고 들은 바가 있기에 차마 내색하지 않았다.
‘아직은 공식적으로 못 들은 것이니까. 민혁 도련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
KM 그룹이 아무리 10대 그룹에 못하다고 해도 기조실은 기조실로 어느 정도 정보 취득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장승일 실장은 굳이 최용욱 회장 지시를 받지 않아도 KM 기조실이 만들어둔 이 채널 통해서 다양한 정보를 얻었다.
다만 최민혁 경우에는 그저 이름만 올라 있어서 회사 관련된 사안은 작았다. 즉 한국대 들어가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일까지는 몰랐다.
그는 그저 일상적인 정보만 얻다가 인력을 투입해서 한국대 내의 최민혁 행적을 확인하고 나서는 어이가 없었다.
‘설마 사실이었다니.’
재벌가 망나니로 정의되는 최민혁 행동은 도저히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고 한 번 일어나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일테면 재벌 3세라면 늘 흔하게 일으키는 성추행 고소 사건이라든지, 아니면 강간 혐의 사건이다.
아마 그랬다면 벌써 기조실에서 상황을 파악했을 테지만 그렇지가 못했다.
추가적인 조사를 통해서 학과 내에 돈을 막 뿌리고 다니기 때문이라는 것과 그 자금 출처가 이번 주식 대박을 통해서 얻은 이익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최용욱 회장이 이 적나라한 사실을 알면 어 알았다고 할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비롯한 기조실을 뒤집어엎어 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도 억울한 것은 최민혁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앙지검에서 마약 사범으로 수사 대상이었던 것이었다.
기획 조정실 구길모 과장도 장승일 실장 눈치를 보았다.
“저희도 정말 억울합니다. 애초에 최민혁 도련님은 말뿐인 기획조정 실장이었습니다. 그러니 관심 대상일 리가 없었습니다. 솔직히 최영란 아가씨만 해도 지금 KM 산업 기획팀 대리로 시작해서 올해 들어와서 과장 달았지 않습니까?”
최영란은 최문경 부회장의 장녀로 사내에서 꽤 평판이 좋았다. 성격도 나쁘지 않았고, 일도 오너 가족답지 않게 잘 풀어갔다.
올해 과장 승진 역시 기획팀 내에서도 그다지 이견이 없을 정도로 괜찮았다.
그런데 적자도 아닌 서자가 KM 전자 기획실장으로 경영 수업 시작하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었고, 사내에서 말도 많았다.
“미치겠다.”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고 고개를 숙인 장승일 기조실 실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10대 그룹과는 달리 극단적인 오너 중심 경영에 별다른 힘이 없어서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받았기 때문이다.
구길모 과장은 다시 눈치를 봤다.
“저기 실장님,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이제 노선을 분명히 해야 하지 않을까요. 막말로 최문경 부회장님이 회장으로 올라서면......”
“난 아웃이라고?”
“이미 회장님도 스스로 올해 안에는 회장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습니다.”
“그렇지.”
“이런 시기에 최문경 부회장님에게 고개를 숙인다면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저도 물론 그 라인에 붙고 싶습니다!’란 말은 차마 하지 못한 구길모 과장은 착잡한 눈으로 갈등하는 장승일 실장을 쳐다보았다.
아니 한마디 더 했다.
“요즘 회장님도 실장님 찾는 횟수가 많지 않습니다. 그만둘 생각이라면 미리 말 좀 해주십시오. 제가 답답해서 미칠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팀장님 대신에 이 자리에 제가 왔겠습니까.”
“자네에게 미안해.”
의외로 장승일 실장이 순순히 인정하자 구길모 과장은 더 목소리를 낮춘 채 자료를 내밀었다.
“여기 보시면 알겠지만, 은행에서 지분과 아파트를 담보로 각각 40억과 10억을 대출받았습니다. 아마 이거 회장님이 알면 난리가 날 겁니다.”
“......”
장승일 실장은 재벌가 망나니 최민혁 행동 내용을 보고받은 터라 매우 놀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만 그러면 모두 90억을 빌린 거야?”
“네. 50억 중에 10억만 투자해서 4억 손실을 봤고, 특이하게도 김기범에게 대출받은 40억으로 70억을 벌어들였습니다.”
“많이도 빌렸다. 회장님이 알면......”
“절대로 지금 보고 하면 안 됩니다. 어차피 분위기 봐서는 곧 상환할 테니까요. 그때 가서 넌지시 이야기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겠어. 그런데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거야?”
“그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실장님이 직접 만나 보는 것이 어떨까요? 어차피 이번 사태 근원도 모두 최민혁 도련님 때문 아닙니까?”
“그럴까?”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어차피 최문경 부회장님도 그렇지만 최훈열 전무님도 이 문제를 걸고넘어질 건데,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제가 바로 약속 잡겠습니다.”
“수고해.”
“천만에요.”
구길모 과장은 물러서면서도 은근히 우유부단한 장승일 실장 행동에 한 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를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이전 최장수 기조실 실장이 길어야 고작 1년을 버틴 것에 비하면 무려 3년이나 버틴 그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아부도 능력이니까.’
***
괄괄한 최용욱 회장은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독단적인 면도 있고, 특유의 욱하는 성격도 KM 그룹 내에 잘 알려졌다.
이런 최용욱 회장을 무려 3년 넘게 잘 보필한 장승일 실장이 비록 아부에 능하지만 한 편으로 대인 관계를 잘했다.
최민혁조차 꿈에서 본 적이 있다 정도로만 느낄 정도이니까.
“장승일 실장님, 안녕하세요.”
“독립하고 나서 자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자주 연락드린다고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저 형식적인 인사로 두 사람은 가끔 눈인사만 했을 뿐이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장승일 실장은 허울뿐인 최민혁을 굳이 알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신기한 동물을 보듯이 장승일 기획 조정실 실장 얼굴을 살폈다.
‘이렇게 존재감이 없는 인사는 처음이네.’
꿈속에서 주기적으로 장승일 실장이 찾아오기는 했지만 정작 대변인 역할을 한 것은 눈치만 보다가 끼어든 구길모 과장이었다.
“기조실 구길모 과장입니다.”
“네.”
구길모 과장은 좀 엉성한 면이 있지만, 그 덕분에 오히려 타인과 잘 어울렸다. KM 그룹 내의 자잘한 일을 전담하면서 터줏대감 노릇까지 했다.
최민혁이 구치소에 있을 때도 주기적으로 방문해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손을 썼다.
‘대부분은 뻥이기는 했지만 그걸 그대로 믿었으니, 입담은 나쁘지 않지. 딱히 장점도 보이지 않은 인물이니, B- 정도일까.’
그래서인지 두 사람이 딱히 좋다 나쁘다 평하기는 곤란했다.
“무슨 일로 절 찾아온 겁니까?”
“지금 최민수 도련님이 구속된 것 때문에 기조실도 난리가 났습니다.”
“제 투자 때문인가요?”
“아, 네. 그런데 아시겠지만, 만약 지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받을 것을 회장님이 안다면 정말 난리가 날 겁니다.”
딱 듣는 것만으로 자신이 무리해서 고생한 일을 기조실에서 털어 막았다는 것을 깨달은 최민혁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요?”
“네?”
구길모 과장은 당황할 거라고 예상한 최민혁 행동이 상리를 벗어나자 당황했다. 최용욱 회장이 안다면 빌어도 시원치 않은 일이니까.
둘의 관계가 시작부터 꼬이자 김명준 과장이 안면이 있는 장승일 실장에게 인사하려다가 슬쩍 물러나고 말았다.
“절 만나러 온 용건이 뭡니까?”
“그게 은행 대출 문제도 있고, 최민수 도련님이 구속된 것도......”
“설마 그 일이 제 책임이라는 겁니까?!”
최민혁의 공격적인 반응에 구길모 과장은 움찔했는데, 장승일 실장은 슬쩍 한걸음 물러나서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뗐다.
구길모 과장은 내심 장승일 실장 행동에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하루 이틀 경험하는 일도 아니라서 일단 참았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자초지종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고 싶어서일 뿐입니다.”
“그건 스스로 알아보세요.”
최민혁은 괜히 상대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자 곰곰이 고민한 끝에 마침 떠오른 생각을 정리해서 말했다.
“제 일은 알아서 보고하시고요. 그보다는 기조실에서 자기 일이나 제대로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번 정부 공기업 민영화 방침에 따라서 K 은행 자회사인 부극상호신요금과 한미상호신용금고 재입찰에 응한 것으로 압니다. 2차 입찰 목적 자체가 회사 사금고로 이용할 용도라는 것은 아는데, 이 상호 금고에 손실 난 금액이 꽤 되는 걸로 들었어요.”
“네?!”
깜짝 놀란 구길모 과장은 당황해서 장승일 실장을 쳐다보았다. 장승일 실장 역시 평소 표정과는 달리 안색이 굳어 있었다.
두 사람은 신용금고 재입찰한 것은 아직 언론에도 알리지 않았는데, 최민혁이 알고 있다는 것과 부실이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 그걸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최근 은행에서 대출받는 중에 이런저런 소식을 제법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걸 담당자가 말해줄 리가 없습니다.”
“그것도 능력 아닐까요?”
심술이 잔뜩 난 최민혁은 비웃듯이 말해주었다.
“딩인산업, 나신실업, 성민 건설은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세요? 1차 입찰 시행에서 예정가가 나오지 않자 다른 업체와 거래를 했으니까요.”
“설마 그러면.....”
구길모 과장은 최민혁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최근 기조실을 통해서 의뢰를 맡긴 흥신소에서 몇 가지 이상한 점을 보고받은 내용을 떠올리자 가슴 속이 차갑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없어서 K 은행 담당자와 입찰 업체 직원이 비밀리에 만났다는 내용을 그냥 넘겼지만 마음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KM 그룹이 상호신용금고를 터무니없는 가격에 인수한 후에 뒤늦게 그 부실을 덮기 위해서 일을 벌이는 것을 잘 알았다.
막대한 투자금 이자에 허덕이는 중에 이 상호신용금고 문제마저 터지면서 속수무책이 되어버린다.
최민혁이 굳이 이 문제를 지적한 것은 그들을 위함이 아니었다.
상호신용금고 인수가 실패하게 되면 대규모 투자를 진행 받으면서 돈을 굴릴 수 있는 수단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차입 규모가 좀 줄어들겠지.’
구길모 과장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기가 무섭게 최민혁 문제를 간단하게 마무리하고는 장승일 실장과 허겁지겁 차를 몰고 떠나면서 전화기로 소리쳤다.
[난데, 아직 상호신용금고 재입찰 신청 안 했지? 그래, 그러면 잠깐 보류해. 내가 직접 갈 테니까. 아, 그러니까, 당장 재입찰 멈추라고!]
“......”
최민혁도 자신이 준 조언을 저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두 사람의 기민한 행동력에 혀를 내둘렀다. 나름 조사를 해볼 것이라 예상했는데, 아예 결정부터 내리는 모습에 솔직히 감탄했다.
‘확실히 입만 산 것은 아니었어.’
지금 일이 언발에 오줌 누기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도 저들이 이번 입찰을 포기한다면 자기 역시 시간을 벌어서 KM 전자 지분을 무난하게 정리해 손을 뗄 수 있어서 나쁘지는 않았다.
‘이왕이면 제값은 받아야지. 경영권 프리미엄까지 포함하면 금액이 제법 크니까. 가만 최민수 구속이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이것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어.’
***
구길모 과장이 외부 흥신소까지 이용해서 K 은행 책임자 동선을 살핀 것은 딱히 스토킹하기보다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였다.
그 과정에서 기묘한 자료를 많이 보고 받았지만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민혁 조언에 따라서 다시 검토하고 나서야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고, 퇴직한 전 상호신용금고 직원을 통해서 막대한 손실이 있다는 것도 파악했다.
뒤늦게 회장실에 이 보고가 되자 난리가 났다.
다행이라면 손실이 나기 전에 처리되어서 큰 문책은 없었지만, 기획 조정실을 비롯한 KM 그룹 관련 부서에 북풍 한파가 몰아쳤다.
최민혁은 김명준 과장 라인 통해서 쑥대밭이 된 기획 조정실 내부의 자세한 소식을 들으면서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구치소를 방문하면서 따가운 시선을 받자 그제야 감정을 정리했다.
‘동부 구치소라.’
구치소는 형량이 확정되지 않은 형사 피의자나 형사 재판 피고인을 잡아 가두는 곳인데, 만기 1년 미만의 형기를 받은 가벼운 징역형 선고자도 포함한다.
꿈에서 툭하면 구치소에 있었던 최민혁은 마치 고향을 방문한 것 같은 익숙함에 혀를 내두르면서 신문을 살폈다.
밖에 있을 때는 신문을 보면 미래 기억이 모호하게 연상되었다. 안개처럼 불투명한 지식을 가지고 투자를 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자신이 늘 살다시피 한 이 동부 구치소 접견실에서 신문을 읽었는데, 밖에서와 달리 뚜렷하게 사실 일부를 기억했다.
< #00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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