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3 >
***
아버지 최병문은 막내라서 최용욱 회장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막내답지 않게 현명한 최병문은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특히 KM 전자 미래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대안으로 반도체 산업에 관해서 깊이 연구했다.
KM 그룹 미래 먹거리가 반도체로 정해진 것도 최병문 때문이었다.
KM 그룹에서 그렇게 두각을 드러냈던 최병문은 뜻밖에 최민혁을 어린 시절부터 계속 살폈다. 생일이면 반드시 최민혁 근처로 와서 지켜보았다.
초등학교 들어간 모습을 보면서 호탕하게 웃기도 했다.
비참한 미래를 꿈에서 경험한 최민혁은 왜 최병문이 그렇게 조심했는지 너무도 잘 알았다.
최민혁은 며칠 동안 김명준 과장에게서 선친 최병문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용히 보냈다.
그런데 조용히 있던 둘째 큰아버지 장남 최민수가 최민혁을 직접 찾아왔다.
당시 클럽에 최민혁을 초대했던 이가 김기범이고, 현장에서 사라진 점을 감안해서 최민수에게 툴툴거렸다.
“설마 기범이 형이 경찰에 마약 제보한 것은 아니겠지?”
“야!”
버럭 화를 내는 최민수는 덩치만 컸을 뿐인지, 머리를 잘 굴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여기 온 것만 해도 김기범 지시를 받았을 테니까.
“아, 미안. 그냥 괜히 해본 소리야. 그런데 기범 형 말대로 했다가 자칫하면 나 마약 사범으로 실형을 받을 뻔했어.”
“기범 형도 이미 말했지만 초범이라서 그렇게 될 리가 없어.”
“압수된 마약 양이 많았거든.”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기범 형이 그 사건을 덮으려고 얼마나 이리저리 고생했는지 모를 거다. 당시는 그게 최선이었어.”
마치 자신이 감옥 가야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식이다. 꿈에서 그 사실을 경험해본 최민혁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이 새끼는 생각하고 말하는 건가?’
한국대 음대에 부정입학 소리가 나오는 최민수는 지금도 흥분해서 날뛰는 데, 이 일을 주도했다고 하기 힘들다.
차라리 최민수 어머니 김여정 오빠 김용만의 지시를 받아서 장남 김기범이 이 일을 주도했다고 봐야 했다.
째진 눈 때문에 술수를 잘 부리는 사람처럼 보이는 김용만 장남인 김기범은 미래에도 악명이 자자했다.
‘DL 그룹이 결국 KM 반도체를 인수했잖아. 어쩌면 마약 사건도 KM 그룹 이미지를 떨어트리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 아니었을까.’
최민혁은 딱히 가족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기 외가에 놀아나는 최민수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알았어. 어차피 일은 잘 끝났으니, 그 일은 그만 언급했으면 좋겠어.”
“어, 나도 그래.”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는 최민수는 용건을 다 끝냈다고 생각하자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최민혁은 최민수와 별로 상종하고 싶지 않았지만, 재벌가 망나니 흉내를 위해서라도 이 인맥(?)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최민수 입이 가벼운 점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파티하면 또 불러. 이번에는 정말 질퍽하게 놀고 싶으니까.”
“그, 그래? 아, 그래야지.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지.”
‘병신 같은 놈’이란 말이 혀끝에까지 나왔지만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
“나 피곤하니까. 나중에 또 봐.”
“알았다.”
***
최민혁은 최민수와 만나서 이야기한 것만으로 꿈속의 악몽이 다시 떠오른 것 때문에 한동안 심사를 다독거리기 위해서 명상까지 했다.
명상 통해서 내공의 고수가 된다는 그런 환상 때문이 아니라 안정을 취하고 싶었다. 효과는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다.
‘내공은 안 생기네. 회귀 특전으로 몸도 좋아진다고 하던데, 아쉽네.’
그런데 이번에는 검은색 정장을 한 김기범이 수행원까지 데리고 나타났다. 숙모 김여정 오빠이자, DL 그룹의 차남 김용만의 장남 김기범 인상은 더러운 편이다.
잔머리를 잘 굴리는 돼지머리와 닮은 김기범은 성격도 좋지 않았다.
“괜찮나?”
“아, 별일 없어요.”
“그래도 다행이다. 이렇게 일이 잘 끝나서 말이다. 그리고 지난번에 내가 한 말은 다른 사람 부탁을 받아서 나선 거다. 너도 당시 파티 참석자 중에 나도 부담스러운 형이 있다는......”
골치 아픈 거짓말을 더 듣고 싶지 않은 최민혁은 손을 들어서 막았다.
“저 정말 괜찮아요. 그런데 자꾸 지난 이야기를 꺼내면 힘들어질 것 같아요. 검사에게 취조받던 기억이 좋지는 않으니까.”
“너도 재벌가의 일원이니, 싫든 좋든 그쪽과 엮이게 되어 있어. 이번에 액땜했다고 생각해. 어차피 횡령만 해도 완전히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야.”
장황한 서울 중앙지검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과장이 많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말하면서 눈동자를 계속 굴리는 그 모습만 봐도 혹시 자신이 중앙지검에서 엉뚱한 소리를 하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최민혁은 손목을 앞뒤로 흔들었다.
“형, 나 짜증나. 그렇게 의심나면 그냥 가라, 가!”
김기범도 무안한지 최민혁 어깨를 툭 치면서 피식 웃었다.
“아, 그렇지. 미안하다. 자꾸 자제한다고 하면서도 계속 말이 나오네. 나도 언론에서 그렇게 시끄럽게 굴지 몰랐어.”
이 말은 사실이었다. 재벌 3세의 마약 파티 기사와 중앙지검 검사의 특혜 수사 의혹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주까지만 해도 주요 신문사의 헤드라인이었다.
‘말꼬리를 계속 걸고넘어지네. 진짜 집요한 새끼네. 하긴 찔리는 것도 많겠지. 내가 무죄가 되었으니, 자칫하면 수사가 확대되어서 자신도 수사 대상이 될 테니까.’
원래 별생각이 없던 최민혁 머릿속에 괜찮은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아, 안 그래도 그 박두영 부장검사가 클럽 감시 카메라 녹화본을 구했데.”
“뭐, 정말이야?!”
‘놀라는 거 봐라. 가만 왜 이렇게 놀라는 거야?’
“확실한 건 아냐.”
김기범은 최민혁 양어깨를 붙잡고 앞뒤로 크게 흔들었다.
“무슨 소리야, 제대로 말 좀 해봐!”
최민혁은 김명준 과장이 나서려는 것을 눈짓으로 물러나게 한 후에 김기범 양손을 뒤로 밀어내면서 피식 웃었다.
“농담이야.”
“이 새끼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뒤늦게야 최민혁은 이번 클럽 사건이 마약 거래 사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일단 이번 사건에서 빠지는 것이 다였지만 마약 사건 주범은 이야기가 많이 달랐다.
“나도 잘 몰라. 그냥 담당 검사랑 조사받는 중에 그 이야기를 들었어.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가 바로 풀려난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어.”
“......진짜구나.”
“아니 난 잘 모른다니까.”
괜히 이 일로 구설에 오를까 싶어서 최민혁은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패닉에 빠진 김기범은 몇 마디 더 하다가 허겁지겁 떠나고 말았다.
이미 중앙지검 내부에서 합의를 본 것을 확신한 최민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렇게 오버하는 거지?’
***
[죄송합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모님도 제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 사건을 더 키울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다만 다음 승진이 걱정입니다. 저도 대검찰청에서......, 아 물론입니다. 도와주신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어휴,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기겠습니까. 제가 평생 검사할 것도 아닌 마당에 뒷일도 생각합니다. 아, 법무팀에 자리 만들어주신다면 제가 거절할 리가 있겠습니까.]
[녹취본이라니? 어떤 놈이 그런 유언비어를 퍼트렸습니까. 이번 마약 사건은 클럽 종업원이 물 타기 하려고 꾸민 술수였습니다. 찌라시를 믿으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핸드폰이 마치 난로처럼 후끈 달아올라서 결국 전원을 꺼버린 박두영 부장검사는 지금까지 화를 낸 것과는 달리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는 서랍에 숨겨둔 코냑 한 잔을 가볍게 마신 후에 냉수로 입가심까지 했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혹시 엉뚱한 놈이 알 수도 있으니까.
이보다는 최해진 검사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괜찮습니까?”
“아, 좋아. 기분 최고야!”
“하지만 이번 마약 사건에 연루된 쪽에서 자칫 압력을 넣을 수도......”
“야, 최 검사,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도대체 어떤 새끼가 나에게 협박하는데?”
“아니 혹시라도......”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어.”
“설마......”
“또 봐라. 너는 능력은 좋은데, 왜 그렇게 감정적인 거야. 이 일은 아무도 몰라야 해. 그래야 내 값어치가 더 올라가니까.”
그리고
“너도 생각을 해봐. 무려 0.5kg 마약이 클럽에서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거래 규모로 추정해보면, 최하 거래양은 2kg 이상이야. 아무리 재벌가라도 이 범죄에 엮이면 무조건 실형이야.”
“그래서 클럽 종업원을 이용해서 마약 거래 규모를 줄이신 겁니까?”
“그렇지. 너도 알겠지만, 이 일은 나 혼자 결정한 것도 아냐.”
“그건 그렇지만 괜찮겠습니까?”
“어, 걱정할 것 없어.”
박두영 부장검사는 힐끗 컴퓨터 속의 동영상을 다시 살폈다. 클럽 안에서 이루어지는 마약 거래 증거가 너무도 잘 나와 있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건방진 최민혁은 전혀 범죄 혐의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화면에는 늘 최민혁이 나와 있어서 마약 거래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영화 주인공도 아니고, 너무 많이 나와.”
최해진 검사 역시 어깨너머로 영상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요. 저거 감시 카메라인데, 어째서 최민혁만 나올까요?”
“그렇지?”
그는 검사 본능 때문에 다시 동영상을 자세히 살피고서야 인상을 찡그렸다.
“이거 편집되었잖아?”
그랬다.
동영상은 최민혁의 동선을 기준으로 해서 절묘하게 짜깁기 되어 있었다. 얼마나 정교한지 자세히 살펴도 찾기 힘들었다.
“확실하네요. 장면 하나의 길이가 다 다릅니다. 인위적으로 조작하지 않고야 이렇게 될 리가 없습니다.”
“이 새끼가.”
그는 결국 전화기를 들어서 최민혁에게 전화하려다가 멈추고 말았다. 다시 최민혁을 참고인으로 소환해서 조사하면 외부에 알려지기 때문이다.
지금 동영상은 그럭저럭 넘어갈 수도 있다. 만약 원본에 치명적인 정보가 담겨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마약 거래 재벌 3세 처벌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 역시 그 칼날에서 피해 갈 수 없었다.
최소한 확인을 해야 했다.
“이 새끼가 감히 현직 부장검사를 속여?!”
결국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최해진 검사와 김대영 수사관은 슬며시 그의 뒤를 따랐다.
***
최민혁은 재벌가 망나니 흉내를 위해서 대학 자퇴를 뒤로 미루었다. 대학은 저렴한 비용으로 망나니 효과를 최대한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역시 망나니 버킷 리스트에 술을 빼놓을 수가 없어서 연습했다가 결국 며칠 몸살이 나서 침대에 누워버렸다.
‘이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따가운 김명준 과장 시선이 있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보다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권 실장을 따로 만났다고요?”
“그 동영상 파일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왜 경호팀장에게 넘기지 않았는지 확인했습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도련님이 지시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믿어요?”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절 다른 시선으로 봤습니다.”
“그런 일은 알아서 하세요. 이왕이면 회사에서 그만두세요. 제가 따로 고용할 테니까.”
“아닙니다.”
“하긴 굳이 일을 만들어서 더 시선을 끌 필요는 없겠죠.”
그는 애초에 김명준 과장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부랑자였던 자신을 여전히 지켜봤던 이가 그였으니까.
‘아마 임종 전에 직접 듣지 못했다면 그것도 알 수가 없었겠지.’
최민혁은 이보다는 앞으로 일을 위해서 시드 머니에 대해서 고민했다. 스토커 최문경 부회장 시선을 피해서 현금을 쟁여둬야 하는데, 이 일의 난이도가 만만치 않았다.
자기 문제 때문에 고민하던 그로서는 갑자기 찾아온 박두영 부장검사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파트 앞 쉼터에서 만났다.
“요즘 중앙지검은 많이 한가한 가 봅니다. 일반인을 직접 찾아오고 말입니다.”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이미 다 끝나지 않았습니까?”
“편집된 동영상을 준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말하는 박두영 부장검사 시선은 김명준 과장을 지그시 째려보았다.
최민혁이 오히려 의아한 눈으로 반문했다.
“편집이라뇨? 그게 무슨 당치도 않는 소리입니까? 가만 설마......”
따가운 시선을 받은 김명준 과장은 굳이 속내를 속이지 않았다.
“동영상 일부 화면을 삭제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중요한 내용은 아닙니다.”
“동영상 원본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아, 사본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뒤늦게 상황을 눈치 챈 최민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편집한 김명준 과장도 어이가 없었지만 박두영 부장검사가 도대체 왜 그 파일에 저렇게 노골적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0.5kg 마약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애초에 날 감옥에 보내려고 작업했을 텐데, 일이 꼬였나 보네.’
그랬다.
세상일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클럽 내부 마약 공급책 사정도 있으니까. 외부에서 그 내막까지 알 수는 없었다.
당시 클럽을 압수 수색한 경찰 역시 전부 다 그 내막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한 편으로 깔끔하게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박두영 부장검사의 철저함에 내심 감탄했다.
동영상 편집은 사소한 것이라면 사소한 것인데, 끝까지 그 내용을 확인한다는 것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것이었다.
그는 물끄러미 박두영 부장검사를 살피자 처음에는 흐릿했지만 조금씩 연상된 기억을 자연스럽게 하나둘씩 떠올렸다.
‘가만 이 양반이 중앙지검장을 거쳐서, 검찰 총장, 심지어 법무장관까지 했잖아.’
< #00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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