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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화 (2/1,021)

< #002 >

***

각방으로 분리된 일식 전문집은 문까지 달려서 안을 볼 수가 없다. 고기 냄새로 가득한 고깃집과는 달랐다.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연락받고 나타난 권재홍 비서실장은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이 부탁한 그 요구를 지키지 못한 것 때문이다.

“실망입니다.”

술 한 잔을 단숨에 마신 박두영 부장검사는 초밥을 한입에 삼켰다.

“감시 카메라 녹취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미 경찰 조사에서 다 확인된 겁니다.”

경찰 수사 단계에서 이미 감시 카메라를 다 정리했다는 의미다. 그것도 몇 번에 걸쳐서 철저하게 확인한 것이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지역 경찰이 증거를 조작했다는 의미를 듣자 새삼 혀끝이 쓰기만 했다. 그렇다고 그런 내심을 내색할 초짜는 아니었다.

“그 친구 경호원으로 보이는 이가 챙겨왔습니다. 그건 그쪽에서 알아보셔야죠.”

당황한 권재홍 비서실장은 뒤늦게야 김명준 과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회사 내부 문제라서 자세하게 질문하지 않았다.

“......어떻게 구했다는 말입니까?”

“그거야 저도 모르죠. 다만 경찰이 압수 수색했을 때 기회가 있었겠죠. 그때 최민혁 그 친구 주변에 있었다면 녹화본을 미리 빼돌렸겠죠.”

“끙.”

스트레이트 한 방을 맞은 권재홍 비서실장 모습에 꽤 만족한 박두영 부장검사는 툴툴거렸다.

“저도 최 부회장님을 믿습니다만 이번 일은 실망입니다. 만약 그 녹화본을 이용해서 뒤통수 쳤다면 제 처지가 난처해졌을 겁니다. 그건 다른 분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 피해가 고스란히 최 부회장님에게 갔다고 생각해보세요.”

권재홍 비서실장은 슬쩍 한 걸음 물러나면서 술잔을 따라주었다. 그의 입가에는 어느 사이엔가 미소가 가득했다.

“그 이야기는 제가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새끼, 그럴 줄 알았다. 너희 놈을 믿는 놈이 등신이지.’

박두영 부장검사는 그렇다고 권재홍 비서실장을 향해서 비난하지 않았다. 그 역시 입가에는 미소를 띤 채 자잘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비록 실패했지만, 이번 일에 제가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일전에도 몇 번 언급했지만, 대검찰청 쪽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대검찰청은 모든 검사가 다 원하는 쪽이고, 그쪽으로 인사 발령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설사 권재홍 비서실장이라고 해도 적지 않은 로비를 해야 했다.

“그 일은 잘될 겁니다.”

“하지만 이번 마약 사건을 경험해보니, 꼭 그렇지도 않더군요.”

“제가 다시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믿겠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엉뚱한 생각을 한 채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물론 권재홍 비서실장은 보고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실패라니. 골치 아프네.’

***

컬러TV, 반도체, 전자시계와 같은 전자 산업 원조 소리를 듣는 KM 그룹은 최근 들어서 성장의 한계를 느끼고, 돌파구를 고민했다.

그 대안이 바로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 진출이다.

문제는 이 분야로 나가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자본이 필요했다.

KM 그룹은 이 자본과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 진출을 위한 다양한 연구를 거듭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자본 확충을 위해서 계속 대안을 연구했다.

“이번 유럽 사절단 분위기는 어때?”

“프랑스, 독일, 영국 정부 분위기는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프랑스는 경제구조 개편이나 투자 협력 방안에 대해서 적극 관심을 보였습니다.”

“우리 쪽도?”

“네. 비메모리 분야 가능성에 대해서는 크게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영국이나 독일도 협상 내용에 따라서 얼마든지 투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좋네.”

하지만 그도 권재홍 비서실장이 안으로 들어오자 기획실장을 비롯한 기획팀 실무진을 모두 부회장실에서 내보냈다.

그는 자기 책상 앞에 놓인 재벌 3세 마약 사범 특혜 의혹 관련 기사 신문을 집어 던졌다.

“클럽 직원이 마약을 공급했다는 소리는 또 뭐야?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마약 혐의로 구속된 민혁이 그냥 나올 수가 있어?”

“그게 오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권 실장,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아무리 한국 검찰이 병신 같아도 현행범으로 잡아넣은 놈을 어떻게 바로 혐의없음으로 내 보내?!”

“그게......감시 카메라 테이프가 또 발견되었습니다.”

그 역시 클럽 안에 있던 10대 그룹에 속한 재벌 3세에 대한 것을 들었기에 인상을 찡그렸다.

“남은 것은 다 치운 것으로 아는데?”

“김명준 과장이 따로 빼돌린 것 같습니다.”

“김명준이라면......민혁이 경호원 말하는 건가?”

“네.”

“그 친구가 알아서 증거를 빼돌렸다면 그걸 왜 자네에게 보고 하지 않은 거야?”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일이라면 권재홍 비서실장에게 전권을 넘기겠지만 이미 자신이 최용욱 회장을 설득해서 최민혁에게 최병문 지분 일부를 넘겼다. 이것도 최병문 지분을 더 쉽게 얻기 위해서였다.

‘아버지에게 지분을 얻는 것보다는 훨씬 났지. 뭐 신뢰도 얻었으니까. 결과는 나쁘지 않았는데, 이런 문제가 생기다니.’

이번 재벌 3세 마약 사건을 이용해서 최민혁을 감옥에 잠깐 보내려고 한 것도 후일 최민혁에게서 지분을 쉽게 인수받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실패한 것이다.

“그 친구 프로필은?”

“여기 있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김명준 과장 입사 자료를 살폈는데, 특이한 경력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저 군 특수부대를 나온 후에 몇몇 경비 회사를 전전했고, 최병문이 따로 자기 경호 담당자로 임명한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병문이 경호원이었어?”

“네.”

“뭔가 이상한데.....”

“홀로 도련님 경호원에 지원했고, 자연스럽게 그가 정식 경호원이 되었습니다.”

“특이한 친구군, 이 친구에 대해서 한 번 자세히 알아봐.”

“알겠습니다. 민혁 도련님은 어떻게 할까요?”

‘도련님’이란 말에 인상을 잔뜩 구긴 최문경 부회장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버지 최용욱 회장에게 완전히 인정을 받았기에 최민혁은 더 필요 없었다. 비록 대학 입학 기념 선물로 독립시켰지만, 최용욱 회장의 시선을 의식해서 조심해야 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지.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 하지만 전담 인원을 24시간 붙여놔. 기회는 쉽게 올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

부동산실명제 여파 때문에 아파트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실구매자는 아파트 가격이 유례없는 침체의 늪에 빠질 것이라 확신해서 관망했다.

최민혁은 그 덕분에 강남구 청담동 100평형 고급 아파트를 7억에 사들였다. 주변 조망도 나쁘지 않을 뿐 아니라 가격에 만족했다.

김명준 과장을 위해서 따로 32평형 아파트를 사줬다.

최문경 부회장이라는 소시오패스와 엮인 것만 제외한다면 고가의 아파트를 이렇게 쉽게 살 수가 있다는 점에서 재벌 3세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이게 다 의도가 있다는 것이겠지.’

김명준 과장의 도움을 적극 활용해서 원래라면 지금도 중앙지검에서 계속 수사를 받는 미래를 바꾸었다. 지금이 과거로 돌아온 것인지, 꿈인지 이제는 알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기억하는 미래 지식이 아주 정확하다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최문경 부회장이 계속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주식이나 부동산을 사들인다면 그가 어떤 형태로든지 방해할 것이다.

최민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단 밥 먹으러 집을 나섰다.

옆에 동행한 김명준 과장 안색이 살짝 바뀌는 것을 확인했다.

“미행입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김 과장님 표정이 단순해서 다 드러납니다.”

“......네.”

고민했다. 어차피 녹화 테이프를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넘긴 상황. 이미 최문경 부회장은 자신을 변화를 알았을 것이다.

‘그 양반의 집요한 성격상 두고 보지 않겠지. 이게 문제란 거야. 조용히 살고 싶은데, 절대로 날 내버려두지 않는 거.’

KM 그룹 지분 일부만 받아도 수천 억은 가볍게 넘어간다. 최문경 부회장이 아니라 큰아버지들도 그 재산을 자신에게 넘길 생각은 없을 것이다.

그건 자기 생각과는 관계가 없었다.

‘고민되네.’

그렇다고 자기 능력을 숨기기 위해서 마약사범으로 감옥에 갈 수는 없었다. 이미 김명준 과장 능력이 드러난 상황이다.

“적당히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입가에 살짝 떠오른 미소는 김명준 과장 역시 신경을 많이 썼다는 의미였다.

“적당히 처리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김명준 과장은 몸을 돌려서 최민혁이 바로 지나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최민혁은 호기심 때문에 슬쩍 김명준 과장이 사라진 골목 안을 들여다보았다.

정신없이 도망가는 두 사람은 달려드는 김명준 과장을 보자 오히려 달려들었다.

김명준 과장은 가볍게 다리를 살짝 굽혔다가 튀어 오르면서 오른 다리를 부채꼴 모양으로 빙 돌려서 두 사람의 얼굴을 노렸다.

한 걸음 앞서 달리는 이는 일격을 턱에 맞고 뒤로 벌렁 나뒹굴었다. 다른 한 명은 가까스로 그 공격을 막았다.

김명준 과장은 충격을 이용해서 마치 허공을 유영하듯이 다른 발로 얼굴을 때렸다.

그 충격에 옆으로 밀려나서 벽에 충돌하고 나서는 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했다.

지면에 내려선 김명준 과장은 무릎으로 제일 먼저 쓰러진 이의 얼굴을 그대로 가격했다. 입에 거품까지 문 상대는 기절한 채 일어나지 못했다.

김명준 과장은 벽에 있던 막대기를 가져와서 상대 무릎을 몇 번 때린 후에 천천히 돌아섰다.

그들을 쫓는 이들은 KM 그룹 비공식 경호팀 소속으로 실력이 평범한 이들이 아니다.

그런데 불과 2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쓰러졌다. 압도적인 실력 차이가 있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다.

최민혁은 압도적인 김명준 과장 무력에 방긋 웃은 채 몸을 돌렸다.

‘역시.’

***

얼큰한 뼈다귀 해장국 국물을 마시던 김명준 과장은 따가운 시선에 힐끗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김치 그릇을 슬그머니 내밀면서 방긋 웃었다.

“김치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이것도 드세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는 가슴이 턱 걸린 느낌에 식사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결국 숟가락을 놓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김 과장님이 고생하시잖아요. 그것 때문에 고민 중입니다.”

“전 KM 그룹 경호팀 소속원으로 일하는 것뿐입니다.”

“아버지 경호원이었던 분이 굳이 제 경호를 지원할 이유는 없죠.”

“그건......”

“아, 제가 호구 조사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기절한 두 사람이 KM 그룹 소속일 겁니다. 아마 권재홍 비서실장이 따로 관리하겠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을 밟아버렸으니, 이제 시선을 피하기 어려울 겁니다.”

“......”

솔직히 김명준 과장은 최민혁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최민혁을 맡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지켜봤다.

지금까지 최민혁은 소심하면서도 크게 뛰는 면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보였다.

최민혁은 그런 김명준 과장 내심을 읽은 것처럼 피식 웃었다.

“제 말은 권 실장이 이제 김명준 과장님을 적극 조사할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래도 저는 그 시선을 피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저보고 그만두란 말입니까?”

“아뇨. 그 반대입니다. 김명준 과장님의 남은 인생을 제가 책임질 테니까. 지금부터 내키는 대로 하세요. 마음껏 설치란 말이죠. 미행자 생기면 알아서 다 정리하고 말입니다.”

로봇처럼 평소에 전혀 감정이 없던 김명준 과장은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최민혁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래야 제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죠.”

“아.”

대충 상황을 이해한 김명준 과장은 KM 그룹 후계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한 편으로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그러면 도련님은 무슨 일을 하려는 겁니까?”

“그건 고민 중입니다. 재벌가 망나니 흉내도 좀 해야 하는 데, 그 문제도 있고요. 이왕이면 국내 시선을 피하려고 국외 쪽 라인이 있으면 좋은데......”

‘지금 이지수는 미국에서 열심히 고생하면서 실력을 키우고 있을 텐데, 연락하기가 좀 그러네. 그렇다고 당장 믿고 맡길 사람도 없고.’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김명준 과장은 잠깐 멈칫했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유령회사 같은 것을 말하는 겁니까?”

“그것도 괜찮죠. 그런데 지금은 최문경 부회장 시선 때문에.....”

김명준 과장은 품에서 주섬주섬 몇 가지 서류를 내밀었다. 뜻밖에도 페이퍼 컴퍼니 서류였다. 비록 자본금은 얼마 되지 않지만 당장 활용할 수 있었다.

“......이건 뭡니까?”

고민하던 김명준 과장은 묘한 시선을 한 채 말했다.

“최 사장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따로 준비해둔 것입니다. 만약 도련님이 필요하다고 말을 하면 전해주라고 했습니다.”

아주 사소한 말 몇 마디 때문에 최민혁은 자신의 미래가 살짝 바뀐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 말하지 않았다면 김명준 과장은 이 자료를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요?”

“네. 으음,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돌아가신 최 사장님은 도련님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다만 주변 시선 때문에 가까이 가지 못했을 뿐입니다.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내는 일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꿈에서는 상상도 못한 답변에 최민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망설이던 김명준 과장이 내민 몇 장의 사진도 받았다.

최병문이 어린 시절부터 멀리서 최민혁을 지켜보고 있는 사진이었다. 눈물마저 글썽이면서 멍하니 아들을 지켜보는 그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최민혁은 뒤늦게야 김명준 과장을 만난 것도, 본가로 들어갔던 것도 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면서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그랬던가?’

물끄러미 최민혁을 지켜보던 김명준 과장은 최병문 죽음과 관련된 조사내용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급하게 나설까 싶어서 차마 내놓지 못했다.

< #00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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