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 - ⓒ SSDHD
KM 그룹의 막내 최병문의 서자 최민혁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 정미선을 떠나 본가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 일은 큰아버지 최문경이 KM 그룹의 경영 과실을 덮기 위해 사전 정지 작업을 한 것이었다.
최용욱 회장은 실제로 최문경의 처리에 만족했다.
그저 좋게만 생각했던 최민혁은 결국 최문경의 희생양이 된 채 두 번이나 감옥에 갔다.
감옥에서 나왔을 때 KM 그룹은 이미 공중분해 되고 없었다.
홀로 된 그를 돌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결국 쓸쓸히 죽어갔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마치 꿈처럼 사라졌다.
그는 지긋지긋한 재벌가의 욕망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고, 미래 지식을 이용해서 조용히 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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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1 >
나는 소위 말하는 재벌가 서자인데, 딱히 노력해서 내 정체성을 안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큰아버지 최문경의 권재홍 비서실장이 직접 집을 찾아왔다.
늘 냉랭한 어머니 정미선은 매우 놀랐지만, 오히려 권재홍 실장이 나를 데려가겠는 통보를 순순히 수긍했다.
한 때 유명한 연예인 출신으로 다시 연예계 복귀를 준비하던 정미선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 죽음 이후에는 은근히 나를 귀찮게 여겼다.
당시 고작 열일곱에 불과한 나는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이해 못 했다.
그래도 대궐 같은 저택에 살 수 있다는 것에 환호했다.
할아버지 최용욱을 비롯한 다른 가족도 나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수 천억 상속과 관련된 것을 감안하면 말이 안 되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뒷날에야 최문경이 나를 이용하기 위해서 집안으로 끌어들인 것을 깨달았다. 친구는 가까이 두고 적은 더 가까이 두라는 격언을 따른 것뿐이었다.
최문경도 예상 못한 IMF 시기에 KM 그룹 생존을 위해서라도 천문학적인 부채에 대한 책임에 대한 희생양으로 날 선택했다.
허울뿐인 지분 승계는 이 일에 대한 명분으로 나무랄 것이 없었다.
결국 횡령과 배임 혐의로 감옥에 갔고, 덕분에 다른 가족은 검찰의 수사망을 이리저리 잘도 빠져나갔다.
심지어 최문경은 세탁한 비자금을 이용해서 미국 지사를 독립시켜서 더 키웠고, 결국 미국 나스닥에 상장시켰다.
당연히 검찰에서 이 사태를 주시했고, 결국 회사 내의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빼돌린 협의로 나를 다시 구속했다.
이번에는 8년 형이 나왔다.
감옥에서 나왔을 때는 그나마 IMF 이후에 명맥을 유지하던 KM 그룹은 이미 공중 분해되어서 사라졌다.
나머지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다들 중견 기업 하나씩을 챙겼다.
최문경은 빼돌린 비자금을 이용해서 미국에서 승승장구했고, 타임지 커버가 될 정도로 유명했다.
그때야 깨달았다.
첫째 큰아버지 최문경이 무슨 의도로 자신을 이용했는지, 둘째 큰아버지 최훈열 외가 쪽에서 왜 의도적으로 검찰 라인을 이용해서 압력을 넣었는지 말이다.
오십 대 초반의 나이에 주변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서 남겨둔 김명준과 이지수만이 내 임종을 살폈다.
어이가 없는 것은 그 자신이 최문경 이간질에 속아서 김명준을 버렸다.
그런데 김명준은 지난 일을 다 잊은 듯 착잡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남긴 편지에 사람이 최고의 자산이란 말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왜 아버지가 굳이 김명준 같은 사람을 자신을 위해서 준비해둔 것인지 알았다.
그것은 이지수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하버드 대학 출신으로 천재라고 알려진 그녀 역시 자신의 임종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정말 병신이 아닌가.
흔히 말하는 킬러가 와서 죽인 것도 아니라 폐암으로 죽어간 것이었다.
‘이렇게 죽다니.’
***
목젖에 이물질이 닿기만 해도 구토한다. 위 속 내용물이 목구멍을 뚫은 채 쫙 흘러나온다. 이게 먹었던 음식을 토해내는 구토다.
악취가 가득한 위 내용물은 마치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와서 앞에 있던 물체를 그대로 덮어버렸다.
그 반동에 몸을 살짝 뒤틀자 오바이트 과녁은 옆을 향했다.
졸지에 음식 찌꺼기로 목욕한 두 사람은 넋을 잃은 채 서 있었다.
특히 서울 중앙지검 강력부 박두영 부장검사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최민혁을 향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이 새끼가 미쳤나?”
같이 음식물 찌꺼기로 목욕한 최해진 검사가 허겁지겁 말렸다.
“자, 잠깐만 부, 부장님......”
“?”
눈만 껌뻑인 최민혁은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나 죽었는데......’
기묘한 기시감.
그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익숙한 이 사무실 모습이 바로 서울 중앙지검 강력반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챘다.
그 자신의 인생 변곡점이 된 시점이었다.
이곳에서 수사를 받게 된 것은 바로 클럽 마약 수사 때문이었다.
최민혁은 그저 둘째 숙모 오빠 김용만의 장남 김기범 소개를 받아서 한 클럽을 방문했다. 김기범은 재벌 3세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것이라면 클럽 여자를 소개해주었다.
이 비밀 클럽에는 연예인 지망생뿐만 아니라 모델도 꽤 나왔다.
마약을 탄 술이 오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당시 가족을 믿은 최민혁은 김기범의 환대를 믿고 말았다. 그런데 김기범이 작업한 모델을 데리고 사라진 후 얼마 있지 않아서 이 클럽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최민혁은 결국 클럽 현장에서 체포되고 말았는데, 김기범이 변호사 통해서 자신과 소개한 지인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라고 말했다.
현장에서 체포될 때 보였던 수십 명의 재벌 3세는 경찰서에 사라지고 없었다.
마약 공급에 관한 것 역시 최민혁 자신이 했다고 시인하라고 했는데, 어차피 초범이니, 집행유예로 풀려날 것이라고 설득했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런데 실형이 나오고 말았다.
물론 2심에서 다시 형량을 줄이고, 3심에서 집행 유예가 되었다.
다만 최민혁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치소에 가봤고, 범죄자와 같이 생활하면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뒤늦게야 이 일이 일종의 길들이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최민혁은 분노하고 있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생수기에서 냉수를 가져와서 홀짝였다. 그도 지금 상황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
오바이트 덕분에 검찰 조사는 중지되었고, 두 사람은 옷을 갈아입었다.
시간을 번 덕분에 최민혁은 자기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꿈인가? 아니면 회귀인가?’
도저히 과거로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흐릿한 자신의 삶은 그저 악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아쉬웠다.
로또 번호도 흐릿하고, 미래의 일도 안개와 비슷했다.
기억 속에 남은 것이라고는 굵직굵직한 사건이었다.
KM 그룹의 공중분해, 이라크 전쟁, 911, 한국 부동산 불패 신화, IT 버블, 모기지론 사태와 같은 큰 사건이었다.
최민혁은 미래 사건보다는 큰아버지 최문경 레이더에 찍힌 것을 더 아쉬워했다.
겉으로는 시골 사람 같은 말투와는 달리 최문경 인성은 악귀나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이 노린 이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차라리 평범한 서민이었다면 미래 지식을 이용해서 적당히 돈을 벌어서 살 수 있어. 그런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해.’
소심한 마음은 잠깐.
쉽지 않겠지만 미래 지식을 이용해서 최문경을 비롯한 큰아버지들을 KM 그룹 경영에서 끌어내리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그들이 없어진다면 공중분해될 KM 그룹 미래도, 자신의 처참한 미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이라면 든든한 아군이 있었다.
뒤늦게 소식 듣고 달려온 김명준은 서슬 퍼런 눈빛을 한 채 이를 갈면서 나타난 박두영 부장검사를 쳐다보았다.
살기가 가득한 그 눈빛이 얼마나 섬뜩한 지 두 사람은 물러서고 말았다.
최민혁은 따스한 눈길로 김명준 과장을 막았다.
“과장님, 잠깐만요.”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어차피 제가 내린 지시 때문에 둘째 큰아버지 보러 간 거잖아요.”
“하지만......”
“나중에 이야기하죠. 지금은 저 두 사람 일이 더 우선이니까.”
사무실 한쪽에서 벌떡 일어나서 만약의 상황을 대비한 수사관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채 눈동자만 굴렸다.
박두영 부장검사도 힐끗 심상치 않은 김명준 과장 눈치를 보면서 최민혁 앞에 앉았다.
“좋습니다. 뭐 구토한 것을 가지고 처벌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최민혁씨가 마약을 복용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진실입니다.”
서늘한 어조에는 이번 사건을 이용해서 강력하게 처벌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이미 최민혁씨도 알겠지만, 클럽에서 발견된 마약이 모두 0.5kg이 넘습니다. 그리고 당시 클럽에 있던 종업원은 최민혁씨가 그 마약을 가져왔다고 증언했습니다.”
최민혁은 마치 꿈속의 상황이 다시 반복되는 것을 느끼면서 그 충격에 흠칫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입니다.”
“증인이 모두 다섯 명이나 나왔는데,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사실 자세한 내막은 최민혁도 몰랐다. 경찰이 클럽을 덮친 것도 제보 때문인지도 몰랐다. 경찰 압수 수색 이후에 당시 클럽에 있던 이들은 희생양이 필요했고, 김기범이 나서서 최민혁이라는 카드를 내놓았다.
큰아버지 최문경은 막내에 대한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는 최용욱 회장이 손자 최민혁에 대해서 크게 실망하게 만들 기회였다.
박두영 부장검사가 저렇게 숨김없이 그대로 나오는 것은 최문경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야 요즘 한창 뜨고 있는 KM 그룹 일가를 건드릴 생각은 없을 테니까.
최민혁은 이미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고민했다. 그것은 최문경의 의도와는 달랐다. 그렇다고 감옥에 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는 지금 상황이 정말 꿈속과 같은 지 확인하고 싶어서 슬쩍 김명준 과장을 쳐다보면서 손을 내밀었다.
“감시 카메라 녹화본을 주세요.”
최민혁 상황을 파악하자 클럽에 달려가서 감시 카메라 녹화본을 몰래 카피해서 만약을 대비했던 김명준 과장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김 과장님 솜씨라면 뻔하죠. 누군가 감시 카메라를 지울 것이라 추측했을 테니까요.”
“허.”
김명준 과장은 깜짝 놀란 시선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그의 처지에서는 최민혁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최민혁 선친 최병문의 유언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품에서 감시 카메라 내용을 카피한 CD를 꺼냈다.
“?”
박두영 부장검사는 깜짝 놀랐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컴퓨터 전원을 켰다.
클럽 내부를 기록한 동영상 파일은 클럽 파티 모습을 적나라하게 잘 보여주었다. 심지어 클럽 직원이 마약을 나눠주는 장면까지 나왔다.
그 마약을 받은 이들은 소위 말하면 재계 서열 30위권 내의 잘 나가는 재벌 3세였다. 최민혁과는 비교조차 하기 힘든 이들이었다.
‘......이거 골치네.’
사실 몰래 최민혁에게 이 파일을 받았다면 좋은 무기가 된다. 그런데 지금 지켜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최해진 검사에, 김대영 수사관도 있었다.
두 사람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니터 화면을 보고 만 것이었다.
아차 싶어서 컴퓨터 전원을 바로 내려버렸다.
“흠흠.”
이미 상당한 뇌물을 받은 박두영 부장검사를 비난할 생각이 없는 최민혁은 힐끗 김명준 과장을 쳐다보았다.
“복사본은 있죠?”
“이미 언론사에 보낼 파일은 따로 준비해뒀습니다.”
“역시.”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김명준 과장을 쳐다보았다. 아버지 최병문은 죽기 전에 자신을 위해서 믿을만한 사람을 준비했다.
특임대 출신으로 놀라운 감각을 보유한 김명준 과장은 무력이 일반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 혼자라면 중대급 병력과도 맞짱을 뜰 수 있을 정도로 신출귀몰했다.
심지어 정보 조작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도 경험이 많았다.
‘아버지는 이 사람을 어떻게 얻은 것일까?’
선친 최병문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지만, 자신을 끔찍이 사랑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오히려 절대로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김명준의 진정을 오해해서 퇴출해버린 최민혁 자신이 문제였다.
“박 부장검사님.”
“앗? 네? 네!”
마치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 박두영 부장검사는 최민혁 눈치를 봤다. 흔들리는 동공은 그의 심정을 잘 드러냈다.
저 동영상이 유출되면 얼마나 많은 외압을 받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진저리를 쳤다.
최민혁은 깍지를 켠 채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렸다.
“어떻게 할 겁니까?”
“그게......”
그의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흘렀다. 눈치 빠른 최해진 검사는 김대영 수사관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을 사무실에서 쫓아냈다.
최민혁은 큰아버지 최문경이 전화 한 통만으로 박두영 부장검사 옷을 간단히 벗길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합시다. 무혐의로 가죠.”
어차피 클럽 직원 한 명을 희생양으로 내세워서 이번 사태를 덮으면 간단했다. 이미 클럽에서 마약 파티를 벌인 이들 대부분은 기사에도 나가지 않았다.
최민혁이 입만 다문다면.
“으음, 그 감시 카메라 원본은......”
“제가 뭘 믿고 그걸 줍니까?”
“......”
그는 잔뜩 긴장한 두 사람을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소식 기다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감시 카메라 일부가 발견되어서 어쩔 수 없다고 하세요. 적당히 핑계를 만들라는 말입니다.”
기묘한 말에 박두영 부장검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약 사범으로 재판받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일을 키우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문제를 더 만들고 싶지 않네요. 조용히 이번 사건을 덮으세요. 저에 대한 것도 더 말하지 말고. 그게 박 부장검사님 미래를 위해서도 좋습니다.”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겠지만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최민혁은 망설이는 두 사람을 뒤로 한 채 당당한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괜찮을까요?”
최해진 검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무슨 말이야?”
“기자들이 난리를 칠 텐데, 그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오류가 있었다고 해야지.”
말하는 박두영 부장검사 표정은 전혀 평온해 보이지 않았다. 최민혁에 대해서 이를 으드득 갈면서 분노를 참았다. 그는 핸드폰 번호를 누르면서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동영상에 관한 이야기를 망설이던 최해진 검사도 차마 더 질문하지 못했다. 그 역시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재벌가에서 걸려온 수십 통의 전화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 #00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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