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44화
가을
“그럼 그동안 제가 안배 속에서 봤던 조부님 또한 당신입니까?”
엘릭이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미르카의 안배 중.
조부님이 어떻게 마신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것인지 줄곧 의문이었던 탓이다.
그가 대단한 것은 맞지만, 조부님은 시조도, 사계도 아니었으니까.
“그래 맞단다.”
그리고 시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엘릭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그것 또한 나였지. 그리고 지금은….”
화악!
강한 빛과 함께 시조의 얼굴이 다시금 변했다.
“…이렇게 너이기도 한 것이고.”
“…!”
그 모습에 엘릭은 짐짓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시조의 얼굴은 자신과 꼭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동시에 시조를 주변으로 다른 시선들이 느껴졌다.
하늘,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
엘릭은 본능적으로 그 시선의 주인이 창천, 청백, 자비와 같은 여러 신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모든 신들이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한 시조가 손을 뻗은 건 그때였다.
“너도 우리와 함께 이곳에 설 자격이 있단다. 원한다면 우리와 같이 갈 테냐?”
한 마디로 신이 되지 않겠냐는 뜻.
사계의 인장을 모두 깨우치면서 신격을 얻을 자격을 얻은 것이었다.
사계는 곧 자연이고
자연을 다룰 수 있는 이는 오직 신만이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신(神).
그것은 하늘에서 지상을 굽어보는 존재를 의미할지니.
엘릭은 잠시 침묵하는 듯하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만일 시조님의 손을 잡는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말했다시피 신이 되게 된단다. 죽음이나 고통 같은, 그동안 너를 얽매이던 모든 것들을 초월한 존재가 되는 것이지.”
시조는 이것 말고도 말로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일들을 겪을 수 있을 거라고 설명했다.
“그렇군요. 그럼 그게 저를 점지하신 이유입니까?”
“그래. 너도 알겠지만 메르빙거의 후손들은 하나의 길을 선택한단다. 하지만 타고난 성향과 환경에 따라 그 길은 전부 천차만별이지.”
엘릭은 시조의 말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은 사계라 해도 각자 추구하는 방식이 확연히 다르곤 했으니까.
“하지만 너는 조금 달랐지.”
“제가요?”
“그래. 너는 완벽한 ‘중도(中道)’의 길을 걷고자 했잖니? 그런 너라면 메르빙거의 오랜 숙원을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단다.”
시조와 마신의 대립.
그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자 하는 엘릭이라면, 이 전쟁을 끝낼 수 있겠다 판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어떠니? 가겠느냐?”
시조의 물음에, 엘릭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답했다.
“제안은 감사드리지만, 제가 있을 곳은 지상이지 천상이 아닙니다.”
신이 되는 것.
물론 좋다.
모든 것을 초월해, 더는 힘들게 살아갈 필요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엘릭은 그게 좋았다.
가문을 위해, 가족을 위해 사는 것.
애초에 지금껏 그가 노력한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않은가?
그런 와중에 무책임하게 그들을 두고 훌쩍 떠날 생각 따윈 없었다.
그런데….
“그래, 너라면 그럴 줄 알았다.”
시조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미소로 화답했다.
“너는 너만의 길을 간다고 했었으니까. 그렇다면 시조로서, 먼 가족으로서 너의 길을 응원하마.”
“감사합니다.”
“대신에 부탁이 하나 있단다.”
“부탁이요?”
“흩어진 ‘마’를 모두 회수해 줄 수 있겠니? 그것은 메르빙거의 실수이자 더 나은 길로 나아가려는 세계의 발목을 붙잡기만 하는 존재이니.”
“당연히 그래야죠.”
엘릭이 흔쾌히 답했다.
어차피 ‘마’가 존재하는 한, 위험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자신은 물론이고 선조들이 반복해 겪어왔던 일을, 딸 리아에게 만큼은 절대 이어지게 할 순 없었다.
아무리 신이 되지 못한다고 한들.
그것만큼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시조는 엘릭의 얼굴에서 강한 의지를 느끼곤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연 내가 점지했던 아이구나. 훌륭하다.”
그가 말을 마치자,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엘릭에게 향하던 시선도 하나둘씩 거둬지고 있었다.
엘릭과 시조를 이어주던 천계의 문이 닫히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무운을 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며 완전한 암흑이 찾아왔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엘릭은 익숙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비행선의 내부.
그중에서도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방이었다.
“….”
그는 여전히 여운이 가시질 않는지, 멍하니 앉아 허공을 바라봤다.
시조는 물론, 다른 신들이 자신을 바라보던 감각이 여전히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치 지금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
“….”
엘릭은 괜히 천장을 슬쩍 바라보고는 이내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조가 부탁한 일을 준비해야 했으니까.
“흩어진 마를 모두 회수해달라라….”
다르게 말하자면 남은 대마왕을 모두 처리해달라는 뜻.
지금껏 엘릭이 마주하지 못했던 대마왕은 오직 하나였다.
종말의 샤이탄.
그리고 난교의 릴리스가 어딘가에 숨어 있을 테니, 사실상 처리해야 할 대마왕은 총 둘이었다.
‘서두를 필요가 있다.’
‘마’는 죽지 않는다.
정확히는 힘을 잃고 사라질 뿐,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다시 돌아오는 존재들이었다.
예전만큼은 아니겠지만, 릴리스 또한 그동안 잃었던 힘은 어느 정도 회복했을 터.
시간이 늦어질수록 불리한 건 엘릭이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하네. 메피, 사계를 완성한 상황에서 대마왕들마저 삼키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사계를 완성함으로써 시조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마 대마왕들을 전부 삼킨다면 마신이 가진 힘만큼을 손에 얻을 수 있을 터.
즉, 시조와 마신.
두 신의 힘을 동시에 얻는 거나 마찬가지인 셈인데.
그렇게 되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에 메피스토는 언짢은 듯, 팔짱을 낀 채 엘릭을 바라보다 홱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본왕조차 다다르지 못한 위치이거늘. 그걸 어떻게 알겠느냐?』
“…뭐야? 메피 지금 삐졌어요?”
『삐지긴 누가 삐져?』
“누구긴 제 눈앞에 있는 대마왕 메피스토펠레스 님이시죠. 왜요? 제가 더 위에 서니까 짜증이 나시나 봅니다.”
『그런 거 아니래도!』
“에이, 얼굴 보니 맞네 뭐.”
엘릭은 씨익 웃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니, 가족이 좀 강해지면 같이 기뻐해 주고 그래야지. 그러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이, 이 빌어먹을 메르빙거 놈이 또, 또 그딴 소릴…!』
“빌어먹을 메르빙거라뇨. 그거 누워서 침 뱉기에요.”
『아아아아악! 젠장, 젠장! 메르빙거어어어!』
단 한 번을 지지 않고 말대꾸를 해대는 엘릭 탓에, 메피스토는 머리를 마구 쥐어뜯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엘릭은 그 모습을 보고 한참 동안 웃음을 터뜨렸고.
그가 시조에게 말했던 ‘가족’에는.
이제 메피스토도 포함되어 있었다.
* * *
비행선은 한참 동안 이동을 계속하다가 드디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슬쩍 아래를 바라보니, 광장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 이쪽을 보곤 무어라 떠들고 있었다.
비행선이 워낙 눈에 잘 띄기도 하고.
비행선의 소문이 제국 전체에 퍼진 탓에, 실제로 보는 걸 신기해하는 듯했다.
“엘릭.”
그렇게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 도중이었다.
가이가 뒷짐을 진 채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작은 할아버님의 행방을 알아냈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예상대로 자유혁명군 쪽과 연관이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더군.”
가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엘릭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자유혁명군으로 보이는 자들과 함께 있는 오거스틴의 사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괜찮은 건지 안 괜찮은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딱딱한 표정.
그리고 그 아래엔 이번 일과 관련된 보고가 적혀 있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번 황제와의 면담이 끝나면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당연히 그래야죠.”
엘릭의 즉답에, 가이가 짐짓 놀란 모습을 보였다.
자칫하면 자유혁명군과 전쟁을 하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아무리 엘릭의 성취가 높아졌다 하더라도.
지금껏 그가 쉴 새 없이 싸워온 것을 생각하면, 선뜻 하기 어려운 부탁이었다.
엘릭은 누누이 이번 싸움이 모두 끝나면 바깥 세상으로는 신경도 쓰지 않을 거라고 외쳤으니.
엘릭은 그런 가이의 생각을 읽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스승님이신데요. 제자가 스승님을 구하러 가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비행선은 어느덧 황제가 머무르는 황성에 도착해 있었다.
“이제 가야겠군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황성에 초청받은 건 오직 엘릭 한 명뿐.
그는 걱정 어린 표정을 한 가신들을 뒤로한 채, 황성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성문 바로 앞에 착지하자, 가장 먼저 한 기사단이 엘릭의 눈에 들어왔다.
황금사자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화려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갑옷.
엘릭은 단번에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근위기사단.’
그들이 아니고서야 황제가 있는 장소에서 이토록 화려한 갑옷을 입을 순 없었으니까.
“어서 오십시오 엘릭 공.”
근위기사단 중에서도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룬 것으로 보이는 사내가 다가온 건 그때였다.
그는 투구를 벗으며 엘릭을 반겼다.
“저는 근위기사단의 단장 네오라고 합니다.”
네오는 고개를 숙이며 엘릭을 반겼다.
동부에서 봤던 삼공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
엘릭은 황실이 자신에게 적대심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긴장을 풀었다.
지금까지 여러 일들이 있었던 만큼, 비행선에서 나오면서 줄곧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으니까.
“반갑습니다, 네오 경.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찬성공작께서 오셨는데 당연한 일이지요. 엘릭 공께서도 바쁘실 테니 바로 가실까요?”
“그러시죠.”
엘릭은 네오과 나란히 걸으며 황성으로 향했다.
* * *
엘릭은 황성에 들어왔을 때부터 자신을 향해 두런거리는 말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저 사람이 바로 그….”
“황금사자를 잡았다는? 실물은 처음인데 너무 어린 거 아닌가?”
“외면만 보고 판단했다간 큰코다칠 걸세.”
제국의 여러 귀족이었다.
대륙 최강이었던 황금사자를 꺾었다는 소문에.
평소 엘릭에게 관심이 없던 자들 또한 그를 유심히 살피고 있는 것이었다.
『감회가 남다르겠구나.』
‘뭐… 그렇죠.’
절맥증을 앓았을 때만 해도, 엘릭은 아카데미에서조차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후에도 마찬가지.
마법을 다시 쓸 수 있게 됐음에도, 여전히 과거 메르빙거의 명성에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평을 들었던 그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모두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엘릭과 연을 맺을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그리고 그중엔 비단 귀족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엘릭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크롬헬을 제외한 다른 황자들과 황녀들.
그들은 엘릭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자신들이 데리고 있는 시종에게 무어라 속삭이는 중이었다.
어떤 내용일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엘릭은 나름대로 그런 시선을 즐기며, 네오를 따라 계속해서 안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는 중간중간.
네오는 엘릭에게 이것저것 설명해주었다.
“일단 분위기로 봐서는 폐하께서 엘릭 공을 부른 이유는 대공의 자리를 제안하기 위함일 겁니다.”
본래 황금사자가 가지고 있던 작위.
하지만 그가 죽음으로써 공석이 되자, 엘릭을 그곳에 앉히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들었을 때는 크게 문제 될 게 없어 보였다.
마침 엘릭의 작위가 공작이기도 했고.
다른 누구도 아니고 황금사자를 쓰러뜨린 당사자인 만큼 자격은 충분했으니까.
‘이걸로 지루한 대립이 끝난다면야.’
황실과 깊이 연결되는 게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쯤은 양보할 생각이 있었다.
다만,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제가 대공의 자리에 앉기엔 너무 어리지 않겠습니까?”
대공은 대대로 황사(皇師), 즉, 황제의 스승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아, 제가 한 가지를 빼놓고 말씀드렸군요. 당연히 현 황제 때의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는 건….”
“예, 생각하시는 게 맞습니다. 다음 황제의 스승이 되어주십시오.”
그제야 엘릭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되면 또 얘기가 달라지니까.
“그러니 앞으로는 평소보다 조금 더 몸가짐을 바르게 해주십시오. 공작께서 바르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보는 눈이 많다는 뜻이니까요.”
“그거야 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전 늘 큰 문제 없이 바르게 살아왔으니까요.”
“…예?”
“네?”
“아, 아닙니다.”
네오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