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43화
가을
엘릭은 다른 겨울 6장들과 함께 어딘가로 이동했다.
얼마나 갔을까.
바스락.
‘…음?’
아무것도 없이 새하얗기만 하던 심상 속에서 무언가 발에 밟혔다.
시선을 내려보니 웬 낙엽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그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낙엽을 따라 시선을 점점 앞으로 옮길수록, 그 양이 점차 많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엔.
“끌끌… 너로구나. 가주님께서 점지해주신 아이가.”
허리가 살짝 굽은 한 노인이 단풍나무에 기대앉아 이쪽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겨울 6장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참으로 늦었구나. 참으로 늦었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원망스러운 투로 말했다.
휘이이이.
그러자 주변의 낙엽들이 휘날리더니, 이내 지팡이의 모습으로 변하며 그의 손에 쥐어졌다.
‘테르지치 메르빙거….’
엘릭이 속으로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가을의 주인이자 사계의 마지막.
툭툭!
테르지치는 지팡이를 두들겨 보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뭐 됐다. 온 것으로 된 것이겠지. 따라오거라.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는 그렇게 말하곤 몸을 반대로 돌렸다.
“…!”
엘릭은 떨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자신을 점지한 당사자이자.
신과 마찬가지인 존재.
시조.
오랜 시간 끝에 드디어 그를 조우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꽈악!
그 사실에 엘릭의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
터벅, 터벅-
달빛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협곡 아래.
크롬헬은 황금사자의 유해가 담긴 목함을 품에 안은 채 어딘가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늘 호위가 함께였던 그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오직 힘없는 발소리만이 협곡에 메아리치며, 그의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
크롬헬의 발걸음이 멈췄다.
바로 앞엔 누군가가 얼음으로 만들어 놓은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금사자 시로>
크롬헬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부인….”
애처롭게 말하는 크롬헬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당신도….”
흐느끼는 목소리와 함께 몸이 떨려왔다.
“장인어른도….”
툭, 투둑.
묘비 앞에 굵은 눈물이 하나둘 떨어졌다.
“내가 지키지 못했소.”
그 말을 끝으로 크롬헬은 묘비를 붙잡고 비통하다는 듯이 울음을 터뜨렸다.
황자의 체통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
그는 ‘내가 지키지 못했다’고 연신 말하며 감정을 쏟아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소. 움직여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엘릭의 기운에 완전히 압도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무능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을 뿐.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다 못해 누군가 칼로 마구 헤집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충분한 능력이 있었더라면.
모두를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못난 스스로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자책은 후회가 되고, 후회는 죄책감이 되어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런 그와 같이 울어주기라도 하는 것인지.
시로의 묘비에 작은 물방울들이 맺혔다.
“보고 싶소, 부인.”
크롬헬이 묘비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시울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문득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못난 자신을 보고 꾸짖었을까.
아니면, 곁에서 같이 슬퍼했을까.
‘아니, 아니다. 시로였다면….’
이렇게 말해줄 거라 확신했다.
괜찮다고.
당신이 최선을 다한 것만으로도 된 거라고.
흑, 흐흑…!
그럴 리 없겠지만, 시로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크롬헬이 몸이 들썩일 정도로 흐느꼈다.
“고맙소, 부인. 정말로 고맙소.”
항상 내 편이 돼주어서.
조금이나마 가슴을 옥죄던 죄책감이 사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부인. 이제 다 내려놓을까 싶소.”
크롬헬은 묘비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젠 너무 지쳤어. 권력도 아무 의미 없는 것 같더군.”
어느 하나 부러울 것 없는 황자로 태어났으나, 돌이켜보니 썩 좋은 삶은 아닌 것 같았다.
숨 쉬듯 오가는 거짓말과 서로에 대한 견제.
그리고 주변의 시선 때문에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인생.
우리 안의 맹수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황좌 따위는 아무나 가지라 하고, 이젠 그냥 이렇게 살까 싶소.”
크롬헬은 그렇게 말하며 시로의 묘비 옆에 나란히 누웠다.
차가운 바닥이 등 전체에 퍼졌다.
고조됐던 감정이 빠르게 식어갔다.
크롬헬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좁고 길게 뻗은 협곡 위로 보이는 하늘엔 별이 한가득해 퍽 아름다웠다.
“당신이 그때 말했었지. 밝고 화려한 아침보다 조용하고 여유 있는 밤이 좋다고.”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군.
그는 그렇게 읊조리며 묘비를 향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차가웠던 바닥은 크롬헬의 온기로 따뜻해진 상태였다.
마치 시로와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것 기분이었다.
‘부인, 진작에 이렇게 할 걸 그랬소.’
모든 걸 내려놓으니 이리도 편할 수가 없었다.
만일 처음부터 그랬다면.
시로와 가정을 꾸려 행복한 나날을 즐기고 있지 않았을까?
이제는 멀리 떠나버린.
자유로워 보이기만 한 저 친구처럼.
크롬헬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엘릭은 테르지치와 함께 가로수길을 걷는 중이었다.
양쪽엔 단풍이 진 나무들이 길게 늘어져 있었고, 바닥엔 빨갛고 노란 낙엽들이 한가득했다.
그러면서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은 심신을 안정시켜주고 있었다.
엘릭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주변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다시 봐도 실로 멋진 풍경이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지금까지 테르지치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
‘왠지 모르게 좀 불안한데.’
그가 아는 ‘메르빙거’라면.
꼭 이럴 때 무슨 사고가 터져도 아주 크게 터졌으니까.
그러다 보니 엘릭은 의심 어린 눈으로 테르지치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여차하면 바로 튈 생각으로.
그런 엘릭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테르지치가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끌끌… 눈꼴 사나운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내가 의심되나 보구나.”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조금 그렇습니다.”
지금껏 그가 경험한 사계 중, 멀쩡하다고 느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물론 엘릭이 아는 테르지치는 굉장히 느긋하고 귀찮은 일을 선호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었다.
그 또한 메르빙거였으니까.
‘절대 방심할 수 없다니까.’
엘릭은 언제나 확신을 갖고 있었다.
자신을 제외한 메르빙거는 죄다 비정상이라고.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걱정 말거라.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아르세우스 님도 비슷한 말을 하시긴 했습니다만.”
자신은 오토 한과 다르다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죽여야만 끝낼 수 있는 안배라니.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것만큼이나 악독한 안배는 없었을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이후엔 미르카에게 지독하게 시달리기도 하지 않았던가.
엘릭이 테르지치를 믿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끌끌끌,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녀석들이구나.”
테르지치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뭐, 잡답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이제 다 왔단다.”
그가 걸음을 멈춘 것은 그때였다.
두 사람의 앞엔 거대한 은행나무 하나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면 가주님께서 오실 거란다. 그럼.”
휘이이잉!
테르지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람이 불어왔고.
그가 서 있던 자리엔 단풍잎들만이 흩날릴 뿐이었다.
“진짜… 네?”
엘릭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심 얼떨떨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천천히 은행나무로 다가갔다.
지금 중요한 건 시조를 만나는 것이었으니까.
과연 그가 자신을 왜 점지했으며, 왜 이곳으로 이끌었는지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뭐지?”
엘릭은 은행나무로부터 묘한 기분을 느끼곤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이질감.
노란 단풍이 메르빙거의 금발과 닮아서일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은행나무를 볼 때마다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한 발자국 더 다가간 순간.
휘이이이!
거친 바람이 불며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바닥에 흩어져 있던 노란 단풍이 바닥에서 일어나 회오리쳤다.
단풍이 엘릭의 주변을 감싸며 그의 시야를 전부 가렸다.
“큭!”
일전에 느꼈던 바람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
휘이이이…!
그러다 이내 바람이 점차 가라앉을 때쯤.
엘릭은 슬며시 눈을 떴고.
허공에 흩날리는 단풍들 사이로 뒷짐을 진 채 돌아서 있는 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
그를 보자마자 엘릭의 몸이 굳었다.
미르카의 안배에서 이미 한번 느낀 적이 있던 기운.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시조였으니까.
하지만.
시조라고 생각했던 이가 이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크게 놀라고 말았다.
“…조부님?”
시조의 얼굴이 자신의 조부 우스던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엘릭은 자신이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볐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눈앞의 상대는 분명 우스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조부님이 시조가 되신…?’
하지만 엘릭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후우웅!
우스던이라고 생각했던 얼굴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
그러더니 이번엔 사무치게 그리운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오토 한.
미르카.
아르세우스 등.
메르빙거의 조상이었던 자들의 얼굴이 쉴 새 없이 나타났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황금사자의 얼굴을 했다가 다시 우스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엘릭은 곧바로 그것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당신은 메르빙거시군요.”
말 그대로 ‘메르빙거’ 그 자체.
시간이 흐르며 메르빙거의 혈족이 만들어내는 모든 역사가, 시조를 구성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엘릭이 아는 한에서 이런 것이 가능한 존재는 오직 하나였다.
-신(神).
“그래 맞다.”
우스던의 얼굴을 한 시조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한때 시조였으며, 한때 네 조부이기도 한 존재.”
그 웃음이 어쩐지 따스해 보였다.
“또한 너이기도 하단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