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41화
가을
그것도 상대는 서른도 채 넘기지 못한 어린 메르빙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적으로서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존재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때문일까.
전혀 예상치 못한 결말이었기에.
황금사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느꼈다.
너무나도 허탈하고 허망했다.
모든 게 부질없다고 느껴졌다.
천 년이란 세월을 살며 감정은 전부 마모되었다고 생각했건만.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이리도 생생한 감정을 느끼는 것을 보면.
“하아…! 하아…!”
꿰뚫린 심장에서 출혈이 심각해지면서 황금사자의 호흡도 덩달아 거칠어졌다.
금빛의 머리카락은 이미 하얗게 지샌 지 오래.
얼굴색은 그만큼이나 창백해져 있었다.
녹안도 원래의 색을 알아보기 힘들 만큼 죽어있어 당장이라도 숨을 거둘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엘릭 메르빙거.”
그는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짜 엘릭을 불렀다.
“결국 네가 옳았구나.”
모든 걸 배척한 자신.
모든 걸 포용한 엘릭.
지금껏 스스로가 걸어온 길이 절대 틀리지 않았다고 단언해왔지만.
이번 일로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은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왜 이걸 이제야 알았을까.
만일 그때 그렇게 가문을 버리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을 버린 사람들과 조금만 더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더라면.
자신을 붙잡았던 어머니와 외삼촌의 목소리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였다면.
세상을 미워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을 등지지 않았더라면.
아니, 최소한 엘릭과 비슷한 방향으로 나아갔다면.
지금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까?
원한과 분노로 가득한 삶이 아닌.
이해와 포용의 삶을 살 수만 있었더라면….
어쩌면.
내심 누구보다 바라왔던 대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다 지난 일이었다.
쿨럭…!
검은 피를 토한 순간, 황금사자는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같은 가문 사람에게.
자신의 후손이었을지도 모를 이 아이에게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황금사자는 잠시 엘릭을 바라보다 겨우겨우 입을 뗐다.
“시조와 마신을 모두 품는다고 했지?”
그의 말에 엘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그들을 뛰어넘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목적은 달랐지만, 황금사자 또한 그런 경지에 이르고자 했었기에.
조금이라도 자신이 아는 바를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더욱 분발해야 할 것이다. 네가 정말 메르빙거의 분열을 끝내고 싶다면, 이제부터 시작일 테니까.”
“…알겠습니다.”
엘릭이 그렇게 말한 순간.
콰르르르르!
두 사람을 둘러쌌던 세계가 쩍쩍 갈라지더니, 이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러면서 원래 그들이 있던 식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
좌중이 소란스러워진 건 바로 그때였다.
“허억…!”
“대, 대공 전하!”
“괜찮으십니까…!”
사람들이 체감한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사자공가의 기사들이 하나 같이 사색이 되어 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황금사자의 심장에… 창이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불꽃처럼 붉으면서도 얼음처럼 단단한 창.
황금사자는 당장에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반면에 엘릭은 상대적으로 멀쩡한 모습이었으니.
전신에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으나, 치명상을 입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 동안에 벌어진 두 사람의 승부가 누구의 승리로 끝이 났는지를.
“마, 말도 안 돼…!”
“메르빙거가 대공 전하를…?”
사자공가의 기사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대륙의 최강자인 황금사자가 패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기에.
아니, 그들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엘릭 측의 사람들도 모두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의문인 점은, 엘릭이 승리를 하고 나서도 씁쓸한 듯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는 점이었다.
“….”
황금사자의 입가에서 들려오는 아주 미약한 숨소리.
자신들의 주군이 아직 살아 있었다.
비록 심장이 관통당했으나 운이 좋다면 살 수 있을 터.
채채채챙!
그들은 그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기사들이 검을 빼 들고 기운을 터뜨렸다.
“엘릭 메르빙거! 당장 대공 전하에게서 떨어져라!”
“그렇지 않다면 당장이라도…!”
하지만 그때, 황금사자는 손을 가볍게 흔들어 그들을 만류했다.
“…!”
“…!”
그게 무슨 말이냐고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었지만.
황금사자의 명이었기에 그러지도 못하는 상황.
기사들이 서로 눈빛만 주고받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때였다.
“엘릭… 염치 없겠지만,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황금사자가 목소리를 쥐어짰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어딘지 모르게 거부할 수 없을 위엄이 가득했다.
엘릭은 한쪽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추곤 황금사자와 눈을 마주쳤다.
“말씀하십시오. 들어드리겠습니다.”
엘릭은 다시 존대로 돌아왔다.
최후를 앞둔 옛 선조에 대한 그만의 예우였다.
“….”
순간 황금사자의 입이 닫혔다.
그런 그의 눈에선 다양한 감정이 엿보였다.
놀람, 의문, 감사 등등.
그것도 잠시.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너도 내 과거를 봐서 알겠지.”
“….”
“네가 이끄는 메르빙거에는… 앞으로 최소한 나와 같은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약속드리겠습니다.”
엘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이끄는 가문에선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재능이 있든 없든 모두 끌어안고 가겠습니다. 그게 가문이고 가족이니까요.”
가족.
그 단어가 황금사자의 마음에 확 하고 내려앉았다.
가문.
그것이 주는 무게가 황금사자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래. 이것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것.
만약 자신이 살던 시절에 엘릭과 같은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자신이 엇나가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고맙구나.”
안심이 됐는지, 그렇게 대답하는 황금사자의 표정은 사뭇 편안해 보였다.
“그런 너의 메르빙거를 지켜보지 못하는 게….”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아… 쉬울… 따름이… 야….”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황금사자의 몸이 무언가 빠져나간 듯 힘이 빠지며 눈이 감겼다.
“…!”
“…!”
“…!”
그 순간, 내부에 무거운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기사들은 충격이 상당했는지 놀란 모습으로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대륙의 최강이라 불리며 영생을 산다고 알려진 황금사자.
그가 숨을 거두자 다른 이들 또한 적지 않게 놀란 듯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
그런 적막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이는 엘릭이었다.
스윽.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웃옷을 벗어 황금사자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옷에 새겨진 메르빙거 가의 문양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이어, 엘릭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애도를 표했다.
그렇다고 그를 용서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모든 이들을 멀리하게 된 사정이 있었다고는 하나.
지금까지 결코 용서 받지 못한 일을 해온 건 명백했으니까.
그럼에도 엘릭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그래도 같은 가문의 사람이며.
모든 것을 떠나 누군가 죽었을 때 이렇게 하는 것이 기본적인 도리였으니까.
그렇게 잠깐의 애도가 끝나고.
“….”
엘릭은 사자공가의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여유로운 엘릭 쪽 사람들과 달리.
그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잔뜩 긴장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황금사자가 죽은 이상.
엘릭과 붙게 되면 자신들에게 승산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두 진영 사이에 긴장감이 감도는 그때였다.
“무기를 넣어라.”
“…?”
“…?”
엘릭의 말에 기사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버려라가 아니고 넣으라고?
하지만 그 의문이 풀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이상의 전쟁은 무의미하다. 피차 안타까운 희생자만 늘어날 뿐이겠지. 하지만.”
엘릭은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만일 계속 싸우겠다면 우리도 물러나지 않겠다.”
그 순간, 엘릭을 중심으로 막강한 기파가 회오리쳤다.
쿠쿠쿠쿠-
그리고 시작되는 격진.
사자공가 기사들의 눈이 커졌다.
단순히 엘릭이 풍기는 힘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가 보이는 위세가 어딘지 모르게 자신들이 알고 있던 것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메르빙거가 사자투기(獅子鬪氣)를…!’
‘그것도 대공 전하에 맞먹는…!’
‘아무리 자사자가 되었다지만, 어떻게…!’
사자의 경지에 오르면 강해질수록 위력이 세진다는 사자투기.
엘릭의 위세가 황금사자에 못지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그에게서 풍기는 마력 또한 황금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차라리 엘릭에게 황금사자의 영혼이 빙의를 했다고 믿을 정도였다.
비록 황금사자를 해친 원수이지만, 그의 모든 것을 계승한 전승자라고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자존의 법칙이 제1 원칙인 사자공가의 특징상, 엘릭의 이와 같은 모습은 기사들에게 많은 혼란을 가져다줄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그들에게 새로운 주군이 나타났다고도 할 수 있으니.
더군다나 엘릭의 기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창가 너머.
어느새 십여 대의 비행선들이 함포를 드러낸 채 이쪽을 겨누고 있었다.
게다가.
이곳에는 마탑주 가이를 비롯해서 여러 명의 사자들까지 있었다.
‘이걸 어쩌지? 항복해야 하나?’
‘나라고 알겠는가?’
‘그렇다고 그냥 물러나기엔 대공 전하의 원한이…!’
기사들이 그렇게 눈짓을 주고받을 때였다.
“확실히 자네 말이 맞네.”
크롬헬이 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 이상의 전투는 너에게나 나에게나 의미 없는 짓일 뿐이다.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불리한 상황도 벗어나고 사자공가의 명성도 지키는 발언.
과연 황자다운 대답이었다.
“무기를 집어넣도록.”
“…알겠습니다.”
크롬헬의 말에 기사들이 무기를 거뒀다.
그와 동시에 엘릭이 기운을 거뒀다.
사방에서 작은 안도의 한숨이 들려왔다.
크롬헬이 낮은 음성으로 물은 것은 그때였다.
“엘릭. 장인은 우리 쪽에서 모셔도 되겠는가? 장인이 메르빙거 가의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황국의 기사였던 만큼 마지막은 우리 쪽에서 보내드리고 싶네.”
엘릭은 아무 말 없이 크롬헬을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허락한다는 뜻이었다.
“고맙네.”
뒤에서 들려오는 크롬헬의 목소리와 함께.
“이제 가죠.”
엘릭은 가이와 가신들을 데리고 대공저를 떠났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