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40화
가을
그 이후로.
레온의 생활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매일 같이 검을 쥐고 훈련하는 대신.
그의 손에서 술병이 떨어질 날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술을 들이키기 일쑤.
그러다 술이 떨어지면 새로운 술을 꺼내 쥐었다.
완전히 폐인이나 다름없는 생활.
메르빙거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금발은 탁해질 대로 탁해져 그 빛을 잃었고.
에메랄드 빛의 녹안은 총기를 잃고 완전히 죽은 눈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벌컥, 벌컥!
레온은 취기가 조금이라도 가신다 싶으면 곧장 입속에 술을 퍼부었다.
크으-
꽤 도수가 높은 술이라 그런가.
마시기 무섭게 취기가 확 올라왔다.
자연스레 눈이 감겼다.
그리고 다시 떴을 때.
“…뭐야?”
그는 익숙한 풍경에 인상을 찌푸렸다.
커다란 고목이 있는 장소.
과거 자신이 훈련하던 산자락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고목에 있던 검흔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고.
레온이 보법을 펼친 탓에 휑했던 바닥은 어느새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가 버리고 갔던 검은 그때 그 자리에 가만히 놓여 있었다.
작은 잡초와 흙더미에 살짝 파묻힌 채.
아무래도 술에 취한 채 무의식적으로 이곳에 온 모양.
“큭…!”
그때 숙취로 인한 두통이 몰려왔다.
레온은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려 했다.
하지만 이곳에 오며 전부 흘린 건지, 마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술병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취기도 가시고 익숙한 장소에 있어서일까.
괜히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채앵!
레온은 신경질적으로 술병을 던지곤 그대로 몸을 돌렸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려는 순간.
“….”
그의 눈에 꽃 한 송이가 들어왔다.
고목 앞에 홀로 고독하게 자리하고 있는 새하얀 꽃.
이름도 없고 산을 오르내리며 숱하게 봤던 이름 없는 잡초 중 하나였다.
일반적으로 수십 개가 무리 지어 자라는 꽃인데….
혼자 있는 모습에, 레온은 자신도 모르게 동질감을 느꼈다.
자신 또한 원래대로라면 메르빙거라는 가문에 속해 있어야 했으니까.
그래서일까?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유독 아름다워 보였다.
레온은 홀린 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 꽃이 다치지 않도록 주변에 돌을 쌓아 화단을 만들었다.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 * *
꽃은 레온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고작해야 몇 주면 죽을 줄 알았는데.
벌써 몇 달 동안 생생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레온은 칙칙한 돌을 꽃 주변에다 둘러 화단을 조금씩 꾸미기 시작했다.
그러다 좀 더 다양한 색의 돌들을 가져왔고, 때로는 산에서 내려가 여러 장식품을 사 오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화단은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졌다.
보고 있는 자신조차 뿌듯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이렇게 화단을 꾸미고 꽃을 보살피다 보니, 자연스레 술과도 멀어졌다.
‘술에 취하면 꽃을 돌볼 수 없으니까.’
하지만 뭐든지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정성스레 돌본 꽃이었지만, 추운 겨울이 되며 그만 시들고 말았다.
비단 꽃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무성했던 다른 풀들 또한 색이 갈색으로 변하며 시들어갔다.
화려하게 꾸민 화단이 이리도 볼품없을 수 없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그만큼 정을 많이 주어서일까.
아니면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모습이 자신과 같아서일까.
생각보다 감정이 격하게 올라왔다.
“술.”
술이 필요하다.
이 불쾌한 감정을 완전히 씻고 싶었다.
그렇게 레온은 다시 술독에 빠져 겨울을 보냈다.
그리고 봄이 지나 초여름에 들어설 무렵이었다.
문득 잊고 지내던 화단이 떠올랐다.
“…아마 꽃을 발견하고 화단을 꾸민 것도 작년 이맘쯤이었지.”
궁금했다.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레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화단이 있던 곳에 도착한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추운 겨울이 오며 전부 죽었다고 생각한 꽃과 풀들이, 이전보다 더 화려하게 피어난 탓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번엔 이곳에서 보지 못했던 꽃들마저 수두룩했다.
자신이 꾸민 화단이 아닌, 자연 그 자체만의 풍경은 이토록 아름다웠다.
“다시 피어난다고…?”
레온이 중얼거렸다.
이마저도 겨울이 오면 다시 시들겠지만.
봄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피어날 테지.
“….”
결국 레온은 한참 동안 화단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툭.
들고 있던 술병을 바닥에다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화단으로 걸어가 안쪽에 있던 바닥에서 검을 집어 들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탓에, 녹이 슬고 곳곳이 지저분해 보였지만.
그래도 그는 검이 어떻든 상관없었다.
녹이야 제거하면 되고, 더러운 진흙은 털어내면 그만이니까.
또한 오랜만에 검을 쥐는 만큼, 처음 검을 배웠을 때처럼 사뭇 어색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리 추운 겨울이 찾아와도 다시 피어나는 꽃처럼.
다시 시작하면 될 일이었다.
“나도 그렇고.”
마법을 못 쓰면 뭐 어떠한가?
검술에 재능이 없어도 뭐 어떠한가?
아무리 냉혹한 현실이 몸과 마음을 죽여도, 다시 일어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레온은 4년의 방황을 끝내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 * *
화아아악!
“…!”
주변을 감쌌던 빛이 사라지며.
황금사자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의 얼굴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슬픔, 그리움, 고독 등.
그리고 저릿한 통증에 시선을 내리자, 자신의 가슴을 꿰뚫고 있는 창 하나가 보였다.
황금사자가 과거의 상념에 빠진 직후, 엘릭의 창이 그대로 그의 몸을 관통한 것이었다.
쿨럭!
그 사실을 알기 무섭게 그의 입 밖으로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쿵!
황금사자의 한쪽 무릎이 바닥을 찍었다.
몸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인상 한 번 쓰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에 박혀 있는 창을 가만히 바라볼 뿐.
“…그렇게 된 것인가.”
너무나도 소중했던 먼 과거의 기억.
하지만 오랜 시간을 살며 자연스레 풍화되어 사라졌던 기억.
엘릭이 펼친 대자연의 힘이 그것을 다시 떠올리게 해준 것이었다.
“메르빙거….”
황금사자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엘릭을 불렀다.
“무슨 짓을 한 거냐?”
“….”
“대체 뭘 했기에… 내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었던 거지?”
“나도 몰라.”
엘릭이 아무런 감정 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건 아마 당신이 더 잘 알겠지. 당신의 기억이니까.”
“그런가.”
황금사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대충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자신의 속에 담긴 것.
염원.
그것이 심상 세계를 통해 빚어진 것은 아닐까?
“그럼… 이것은 무엇이냐?”
황금사자는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창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법도, 무술도 아닌 이것은 대체 뭐지?”
모든 것이 합쳐져 있었다.
사계의 마법도, 여러 무술도, 마족의 힘도.
수천 년을 살아온 황금사자조차 그런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일직선(一直線).
길쭉한 선이었다.
그래서일까.
직접 눈앞에서 봤음에도 엘릭의 기술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가 없었다.
이에 엘릭은 잠시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람.”
“…바람?”
그게 무슨 말이냐는 식으로 황금사자가 엘릭을 바라봤고.
엘릭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당신의 검초를 보고 얻은 나의 과실(果實, 열매).”
엘릭이 지금껏 봐왔던 황금사자의 검.
그 앞에 선 모든 이들은 추풍낙엽처럼 쓸려 갔고.
어떤 것도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압도적이며.
막힘이 없는 모습.
그것은 마치 폭풍과도 같았다.
나아가는 길에 거대한 바위가 있든, 산이 있든 전혀 개의치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폭풍.
그리고 과거 미르카의 안배에서 강자들의 전투를 지켜봤을 때.
엘릭은 비단 미르카와 숀, 그리고 율호왕에게서만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니었다.
그중엔 눈앞에 있는 황금사자도 함께였다.
세계제일인.
그런 그의 기예를 엿보지 않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내 검초를 보고 배웠다고?”
“그래.”
당연하다는 듯이 답하는 엘릭의 모습에, 황금사자는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결코 믿지 않을 말이었다.
자신이 평생에 걸쳐 익힌 기술을 단지 보는 것만으로 익히다니.
하지만 지금 그렇게 말한 당사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엘릭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겉으로 티 내지 않았지만.
엘릭과 붙으며 그의 엄청난 성장 속도에 감탄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실제로 미르카의 심상 세계에서도 단숨에 경지가 오르지 않았던가?
쯧-
황금사자가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씁쓸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둔재였던 자신과 너무 대비됐다.
누구는 천 년이란 시간 동안.
매일, 손바닥이 찢어지고 고름이 터지는 혹독한 훈련을 해야 마침내 지금의 경지에 다다랐는데.
누구는 단 몇 년 만에 그것을 넘어서다니.
참으로 야속하다 싶었다.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이리도 차이가 나는 건지.
쿨럭!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황금사자의 입에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힘없이 바닥에 물든 피를 바라봤다.
그러면서 두 동강이 난 자신의 검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껏 어떤 상대를 만나왔어도 단 한 번도 부러진 적이 없던 검.
황금사자는 그것이 마치 자신의 심경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의 끝.
지금까지 쌓아 올린 업적은 더 이상 늘어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시간은 이대로 영원히 멈출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것보다.
황금사자는 자신이 꿈에 그리던 목표에 닿지 못했다는 사실에 착잡한 감정을 느꼈다.
‘결국 신은 되지 못한 건가.’
이미 반신의 경지에 오른 상태였지만.
그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메르빙거의 멸문은 단지 모든 생존자를 죽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으니까.
그들의 유산과 정신까지 없애는 것.
즉, 메르빙거의 완전한 소멸.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메르빙거라는 가문을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게 황금사자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반드시 극복해야 할 존재들이 있었다.
바로 시조와 마신.
자신의 ‘극의 경지’를 깨우치며 두 존재를 자각한 것이었다.
소멸하지 않고 메르빙거의 피에 남아 끝내지 못한 전쟁을 이어 나가는 망령들.
그리고 황금사자로서는 그런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반드시 신의 경지에 들어설 필요가 있었다.
만일 그러지 못한다면 결코 그들을 상대할 수 없을 테니까.
신의 경지에 오른다.
남들이 들으면 충분히 비웃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해냈다.’
피나는 노력을 통해 끝끝내 영생을 깨우쳐 반신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황금사자는 자신할 수 있었다.
아무리 둔재라 하더라도, 영원한 시간이 존재하는 이상 이루지 못할 것은 없다고.
그게 신이 됐든 뭐가 됐든.
‘그런데 이렇게 끝나다니….’
하지만 그런 사실이 무색하게도,
황금사자는 패배하고 말았다.
바로 이곳에서.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