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39화
가을
황금사자가 공격을 멈춘 것은 그때였다.
“뭘 하려는 거냐?”
조금 전까지 자신에게 몰아치던 공격이 사라지자, 의문 가득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엘릭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 따위가 없었다.
아니, 그럴 생각조차 못 한다는 표현이 옳았다.
그는 이미 가을이 주는 여운에 잠겨 있었으니.
엘릭이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러자 심상 세계 전체에 퍼져 있던 불꽃이 회오리를 그리면서 엘릭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왔다.
엘릭이 일으킨 불길과 화산, 그리고 타오르는 밀림 전체까지.
그의 마력으로 가득했던 심상 세계가 어느새 어둠으로 잠겼다.
완전한 무(無).
하지만 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금 그가 수확한 건 오직 사계의 힘일 뿐.
아직 하나로 모아야 할 것들은 많았다.
메피스토와 휼의 마기.
지금껏 익혔던 모든 마법과 검술.
그리고 강체술과 신법, 보법 등등.
엘릭이 익혔던 모든 것들이 하나의 사념이 되어 창에 모여들었다.
화아아악!
그러자 불길이 어느새 하얗게 물들면서 순수한 빛으로 빛났다.
‘위험하다!’
황금사자는 엘릭이 ‘벽’을 뛰어넘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극의 경지에 올랐으면서 또 그 위를 오른다고?
이대로 두면 안 되었다.
파지지직!
어마어마한 뇌기가 황금사자의 전신을 뒤덮었다.
힘껏 아래로 내려치는 검격(劍擊).
어느새 그가 쥔 검도 눈동자와 마찬가지로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황금사자 비기
검뢰 승단(劍雷昇斷)
마치 맹수가 포효하는 듯한 울음소리와 함께 세상이 번쩍이며, 황금사자가 엘릭을 향해 뛰어올랐다.
바로 그 순간.
화아아아-
엘릭도 이에 밀리지 않으려는 듯이 손에 쥔 광채를 힘차게 휘둘렀다.
퍼어어엉!
주르륵-
황금사자가 뒤로 길쭉하게 밀려났다.
어마어마한 충격파.
카드드득!
황금사자는 있는 힘껏 검을 바닥에 꽂으며 속도를 줄였다.
전력을 다한 공격임에도 너무나 쉽게 밀려나 버리다니.
그가 잔뜩 굳어진 얼굴로 엘릭을 올려다본 순간이었다.
그저 어둡기만 했던 심상 세계가 이제는 다른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수많은 별자리와 행성, 위성 등 성운으로 가득해 아름답게 반짝이는 천체(天體).
마치 우주를 옮겨 담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특히 하늘엔 휘황찬란한 에메랄드빛의 오로라가 넓게 펼쳐졌으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경외감이 절로 드는 풍경이었다.
황금사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순간.
파아아아!
엘릭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어깨에 새로운 인장이 그려지는 중이었다.
벼 이삭이 그려진 추계의 인장.
그토록 고대한 사계를 완성하는 순간이었다.
***
“…사계를 완성한 것인가?”
황금사자는 놀란 얼굴이 되면서도, 곧 굳은 표정으로 엘릭을 바라봤다.
설마 자신을 상대하면서 사계를 완성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으니까.
‘아니. 나를 상대했으니까 완성한 것인가?’
그러다 황금사자는 전제 조건의 선후 관계가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엘릭은 분명히 비범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한들, 그것을 쫓을 만한 대상이 없다면 성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바.
그런 그의 앞에 황금사자라는 거대한 벽이 나타났다.
메르빙거를 거스르고도 살아남은.
천 년을 넘도록 살아온 절대적인 패자(霸者)가.
그러니 엘릭에게 그는 여러모로 좋은 자극제가 될 수밖에 없었고.
엘릭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영감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아 더 큰 무언가로 거듭나는데 성공했다.
그러니 현재의 엘릭을 완성시키는 데는 황금사자의 공적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다.
-포용.
엘릭이 말했던 극의 경지는 바로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메르빙거를 거부하려던 메르빙거마저 포용하는.
아니, 수용(受容)하는 경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더 큰 적을 만든 셈이로군.’
황금사자도 이제는 엘릭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메르빙거, 그 자체라는 것을.
아무리 거스르려고 해도, 계속 달라붙어 그의 운명을 좀 먹어가는 거대한 굴레.
그런 굴레가 이제는 황금사자마저 먹어치우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금사자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가 걷는 길은 저것이 아니었으므로.
지금 여기서 저기에 휩쓸렸다간 자신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완성한 극의 경지를 바꿀 수도 없었다.
그는 배제(排除)하는 자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엘릭을 본받아 수용으로 바꾼다?
스스로 지난 생애를 모두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쌓았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게 내버려둘 수 없잖은가.
그러니.
‘벤다.’
황금사자는 엘릭이 겹겹이 쌓고 있는 저 경지를.
사계를.
메르빙거를.
모두 한꺼번에 배제해버릴 생각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되었다.
단번에.
단칼에 베어야만 저 지긋지긋한 메르빙거를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실패한다면?
이제 마지막 남은 그의 ‘배제하고자 하는 마음’까지 저기에 먹히고 말리라.
“흡!”
황금사자는 숨을 크게 골랐다.
그리고.
번- 쩍!
검을 맹렬하게 휘둘렀다.
콰르르르릉-
황금색 검뢰의 폭풍이 온 우주를 뒤덮는 가운데.
화아아아!
엘릭 역시 형형색색의 빛무리를 뿜으면서 움직였다.
그는 황금사자의 모든 생각들이며 사념들까지 읽은 상태.
황금사자가 저 일격에 그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므로,
‘나 역시…!’
엘릭도 똑같이 모든 것을 걸 속셈이었다.
손에 쥔 하얀 빛무리가 창으로 변했다.
쐐애애액-
창날이 일직선으로 쏘아지면서 검날과 충돌했다.
그 순간.
화아아아!
엘릭이 만들어 낸 빛이 그대로 황금사자는 물론, 엘릭마저 모두 집어삼켰다.
그리고.
상반된 두 사람의 의식이 하나로 공유되었다.
***
한 호흡보다도 훨씬 짧은 찰나의 순간.
마지막 남은 잔상들이 엘릭의 눈가로 스쳐 지나갔다.
“허억, 허억!”
레온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허리를 푹 숙였다.
그의 얼굴에선 땀이 비처럼 쏟아지는 중이었다.
오러 체인을 깨달음과 동시에 가문을 떠난 이후.
레온은 산자락에서 홀로 단련을 계속했다.
그가 연무장 삼은 곳은 무수히 많은 산 중, 꼭대기에 넓은 평야와 커다란 고목이 있는 장소.
주변의 풍경은 레온이 그동안 얼마나 필사적으로 훈련을 해왔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고목엔 셀 수도 없이 많은 검흔이 가득했고.
온갖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던 바닥은 뿌연 흙먼지만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먹고 자는 것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레온이 이곳에서 검초를 펼친 탓이었다.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다시금 수련을 시작했다.
타닥, 탁!
촤촤촤촤!
보법을 밟아가며 검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다소 처절하기까지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능의 한계를 뛰어넘고 싶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고목엔 만족스러울 만한 검흔은 생기지 않았다.
그저 가벼운 잔 상처 같은 흔적만 늘어갈 뿐.
“후우… 오늘도 실패인가.”
레온이 참아왔던 숨을 토해내며 중얼거렸다.
오러 체인을 깨우친 이후,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충분히 강해질 법도 했지만, 여전히 눈앞에 있는 고목 하나 베어내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아무리 오러 체인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들.
둔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그의 첫 번째 목표는 고목을 일격에 베어내는 것이 되었다.
“내일 다시 하자.”
그나마 다행인 사실이 있다면, 이런 상황은 너무나 익숙하다는 것.
심지어 자신을 모욕하는 가족들조차 없었다.
혼자이긴 하나 어떻게 보면 그때보단 환경이 나은 셈이었다.
그렇게 레온은 자신이 손수 지은 오두막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그는 여느 때처럼 훈련을 시작했다.
마나를 끌어 올려 심장에 꼬아진 체인을 더 길게 만들고, 다음으론 지금껏 배웠던 검술을 단련했다.
그리고 반복이었다.
단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레온은 오직 훈련에만 집중했다.
몸에서 열불이 나고 근육이 찢어질 듯이 비명을 질러도.
그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언젠가 강해질 수 있다는 희망 하나만을 품고 계속해서 정진했다.
하지만 거기서 더 시간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계절이 지나며 산의 색이 몇 번이고 바뀌었을 때.
“….”
레온은 무덤덤한 얼굴로 눈앞의 고목을 쳐다봤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이전과 같은 모습.
그렇게 베려고 노력했음에도,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고목은 더욱 크고 우람하게 자라 있었다.
허탈한 감정이 몰려왔다.
순간 어렸을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진심으로 노력하면 언젠가 뜻을 이루는 법이란다.
제대로 된 마법 하나 쓰지 못하는 자신에게 누군가가 해줬던 말.
당시엔 새로운 희망이 생기는 기분이었지만.
지금은 또 다르게 다가왔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노력은 진심이 아니었던 건가?”
아니면.
친척들의 말대로 난 뭘 해도 안 될 놈이었던 건가?
툭.
레온이 들고 있던 검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사실 스스로도 재능이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을 뿐.
그래도 오러 체인을 익혔을 땐,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길 줄만 알았다.
어쩌면.
이 힘으로 모든 걸 뒤바꿀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 보니 알겠다.
그럼에도 나는 안 될 놈이라는 것을.
작았던 의심은 어느새 굳은 확신으로 변해 있었다.
“…그냥 하산해서 농사나 지을까.”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검술 대신, 적어도 농사라도 지으면 먹고사는 건 문제가 없을 테니까.
“아니면….”
레온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슬쩍 바라봤다.
이제 여기까지만 할까?
어차피 자신을 기다려줄 가문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죽는다고 슬퍼할 사람도 없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이내 검에서 시선을 거뒀다.
그토록 좋아하던 검술에서조차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보니, 목숨을 끊기 위해 검을 쥐는 것조차 혐오스러울 지경이었으니까.
‘일단… 술이나 마시자.’
적어도 취한 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혹시 아는가?
미친 듯이 마시다 보면 또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을지.
그러면 또 그거대로 좋을 터였다.
레온은 그렇게 생각하곤, 그대로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