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37화
금발과 녹안
황금사자는 숨기고 싶은 과거가 드러나니 여러모로 불쾌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엘릭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검술, 외가에서 배운 거로군.”
그는 탐탁지 않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면서 대답했다.
“그렇다면?”
원래대로라면 일절 말 한마디 하지 않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딱히 숨기는 것도 이상하다고 여긴 것 같았다.
‘그렇다면 황금사자의 외가가 숀의 가문과 관련이 있는 건가?’
숀은 미르카의 내면세계에서 황금사자를 보고 이렇게 말했었다.
자신의 검술과 그의 검술이 비슷하다고.
‘겨울 6장들은 숀의 가문이 메르빙거 못지않은 명문 가문이라고도 했었지.’
그렇다면 메르빙거와 숀 가문의 사람이 만나 혼인을 하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 시간에도 기억은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
황금사자는 이것을 훼방 놓는 게 의미가 없다고 여겼던지, 가만히 그 풍경을 함께 지켜보기만 했다.
‘아니.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엘릭이 눈을 가늘게 뜰 때쯤.
엘릭의 눈 앞에는 가문을 빠져나온 레온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더 빠르고, 강하게 휘둘러라!”
“예!”
레온의 어머니와 닮은 얼굴을 한 중년인이 레온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외숙부라도 되는 것 같았다.
레온은 엘릭이 보기에도 훈련에 열정적이었다.
손바닥에 있는 물집이 터지고 찢어져도.
강도 높은 훈련에 헛구역질하며 속을 게워내도.
레온은 계속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이를 더 악물고 훈련을 이어갔다.
하지만.
‘발전이 없어.’
이제 무술에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던 엘릭으로서는 레온이 열정에 비해 검술에 재능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 잘 보였다.
그래도.
그의 눈에는 독기와 끈기가 가득했으니.
어린 나이에도 투정 한번 뱉지 않고 훈련을 소화해 내는 모습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아마 그간 가문에서 받은 따돌림에 대한 분노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흘러 레온의 검은 눈에 띄게 발전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기준에서였다.
레온과 비슷한 시기에 검을 배운 이들은 더 높은 성취를 이룬 상태였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해….”
그럼에도 레온은 멈추지 않았다.
“마법만큼 강한 화력을 지닌 힘.”
“몇 서클의 마법사가 와도 절대 밀리지 않을 힘.”
“아니, 아예 마법사들은 올라오지도 못할 경지의 힘이어야 해.”
그는 더 강한 힘을 갈망했다.
자신의 가문, 메르빙거를 떠올리면서.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마나를 사용해야 한다.”
단순히 검술만으로 마법사들의 목을 베기엔 부족했다.
그들만큼 강해지기 위해선 그들이 사용하는 힘을 접목시킬 필요가 있었다.
레온이 아무리 마법에 둔재였다고는 하지만.
마나를 아예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는 예전의 기억을 되짚어가며 마력을 하나하나씩 되짚어 나갔다.
그리곤 그것을 자신의 심장에 오롯이 집중시켰다.
고리를 만들려 했지만 제대로 잇기도 전에 전부 흩어지고 말았다.
그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제대로 된 서클조차 만들지 못하는 메르빙거 가의 수치.
안 된다면 연구를 하고, 또다시 시도하면 그만이었다.
‘어떻게 하면 고리를 만들 수 있는 걸까?’
후우우웅!
그는 다시 집중하며 심장에 고리를 만들었지만.
후욱!
기운이 꺼지며 애써 만든 고리가 빠르게 소멸했다.
‘대체 어떻게 해….’
그러던 중, 자신이 입고 있는 사슬 갑옷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쇠사슬이 모여 옷의 형태를 한 모습.
단순히 사슬을 일(一)자로 잇는 것보다 내구성이 훨씬 뛰어난 것이었다.
“…!”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나 무언가 떠올랐다.
“그래… 굳이 일자로 이을 필요가 없어.”
서클은 마법사들의 것.
기사는 기사만의 것이 필요했다.
비록 시간은 더 오래 걸릴지라도, 더 강한 힘.
우우우웅!
레온은 단순히 마력을 이어서 고리를 만드는 대신, 새끼줄을 꼬듯 마나를 비틀어 고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또 다른 고리와 연결해 하나씩 이어갔다.
물론, 그만큼 시간과 마나가 많이 소모되긴 했지만, 분명 그만큼 장점도 존재했다.
이전처럼 고리가 바로 사라지는 대신.
서로 얽혀 있는 덕분에 조금 더 오래 유지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는 써클을 만들지 못했던 레온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고리가 사라지기 전에 다시 마나를 회복해 다시 고리를 만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이거다!’
사슬처럼 이어진 힘.
-오러 체인(Aura Chain).
레온은 확신했다.
이것이라면 자신 또한 마력의 고리를 만들어 힘을 증폭시킬 수 있노라고.
제대로 이어지지 않은 고리조차도 벌써 이전보다 자신에게 엄청난 힘을 주고 있었으니까.
아직은 너무나 작은 고리였지만.
그보다 훨씬 크게 키운다면 더 빠른 발전도 가능할 것이다.
장소가 필요했다.
오직 힘만을 키울 수 있는 곳.
결국 레온은 오러 체인을 깨우치기 무섭게 홀로 산속으로 들어가 단련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검술 훈련을 하고 체인을 잇기를 여러 차례.
거의 산에 고립되다시피 한 채로 수련을 이어가니, 자연스레 세상과의 인연이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계절이 산을 스치고 지나갔다.
처음 한두 해는 레온도 숫자를 헤아렸으나, 언제부턴가 그걸 포기하기 시작했다.
열 번?
스무 번?
더 이상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반복되는 계절. 그리고 겨울.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레온의 모습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그의 모습.
엘릭은 거기서 황금사자가 메르빙거의 피에 내재된 시조와 마신을 깨우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가 거기서 얻고자 한 것은 일반인들과 달랐다.
-계속된 성장.
혹은 영원한 발전.
‘…그래서 늙지 않았던 거로구나.’
계속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의 마음이 영생(永生)과 불멸(不滅)을 탄생시킨 거였다.
반신(半神).
신의 경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신은 되지 못했어.’
이쯤 되면 등선이니 열반이니 하는 경지를 터득할 법도 하건만.
재능이 없었기에 그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한 것이다.
어불성설이었다.
저만한 경지를 개척한 사람이 도리어 재능이 없어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형국이라니.
“오러 체인을 깨달은 이후로 나는 계속 강해질 수 있었다. 날 괴롭혔던 마법사 놈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메르빙거도 눈 아래로 여길 만큼.”
그런 엘릭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황금사자의 눈이 정확하게 엘릭의 눈과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메르빙거로서 닿을 수 있는 마지막 고비를 ‘극(極)의 경지’라 부른다.”
‘극의 경지… 라.’
엘릭은 그것이 어느 위치인지를 대략적으로 알 것 같았다.
-가을.
미르카가 말했던 시조와 마신을 선택하는 경지.
엘릭은 여전히 가부좌를 튼 채로 명상에 잠겨 있는 레온을 보면서 물었다.
“그럼 당신이 선택한 건 뭐지? 시조도, 마신도 아닌 것 같은데.”
“검.”
황금사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시조도, 마신도. 내가 추구하는 바와는 전혀 다를지니. 나는 내 길만을 걸을 뿐이다.”
엘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메르빙거를 원망하는 그로서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이, 그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엔 내가 묻겠다.”
황금사자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네가 깨우친 ‘극의 경지’는 대체 무엇이지?”
아무래도 이게 황금사자의 진짜 목적인 것 같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면서 보고자 했던.
엘릭이 자신과 비슷한 경지에 다다랐으니 궁금한 모양이었다.
시조인가? 아니면 마신인가?
아니면 자신과 같은 제3의 길인가.
“….”
엘릭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레온이 있는 곳과는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선 어린 시절 엘릭의 모습이 있었다.
가문을 부활시키겠다고 다짐하면서 책 속에 파묻혀 공부하는 모습.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어떻게 보면 레온과 비슷했지만.
그러면서도 분명 다른 점이 있었다.
“나는.”
많지는 않았지만 그의 주변엔 늘 사람이 함께였다는 것.
누이인 헤이즈와 친구인 션.
“당신과 달라.”
“다르다? 어떻게?”
“당신은 내쳤지, 모두를. 하지만 나는 모두 품었다.”
“…뭐?”
“시조나 마신, 둘 모두 받아들였다고. 그게 나와 당신의 차이다.”
***
“….”
“….”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던 걸까.
“…재밌군.”
그러다 한참 뒤에 황금사자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가 재미있다는 거지?”
“재밌지 않을 수가 있나. 결국 너와 나는 상반된 선택의 결과물들이니까.”
시조냐 마신이냐.
보통의 메르빙거라면 두 개의 길에서 하나만을 선택한다.
하지만, 황금사자는 두 개의 길에서, 두 가지 길을 모두 선택하지 않았고.
엘릭 역시 두 개의 길에서 두 가지 길을 모두 선택했다.
둘은 서로 반대되는 곳으로 발을 들였다.
엘릭은 포용을.
황금사자는 배제를.
“그게 마치 나와 너의 존재를 구분 짓는 것 같군. 어디 그뿐일까?”
-반역자와 가주.
-검사와 마법사.
“이렇듯 우리는 서로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지.”
“….”
엘릭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것은 마치….
그래.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던 시조와 마신과의 새로운 관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황금사자와 맞붙게 된 것은 메르빙거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금사자도 바로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거겠지.
“배제냐 포용이냐. 어느 쪽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 확인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할 것 같군.”
바로 생사를 건 결투.
황금사자는 굳이 그 뒷말을 잇지 않았고.
콰아아아!
기운을 끌어올리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황금사자의 전신에서 응축된 힘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심상이 흔들릴 정도의 위력이었지만, 엘릭의 감정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어차피 하려던 것을 마저 하려던 것일 뿐이다.
서로의 생각을 알기 위해 잠시 싸움이 중단된 것일 뿐.
하지만.
이제 서로에 대해서 완전하게 알았으니 마무리를 할 때였다.
오늘 바로 여기서.
‘황금사자를 죽인다.’
엘릭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손날을 휘둘렀다.
쩌저저적!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