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36화
금발과 녹안
엄청난 높이로 치솟은 먼지 구름.
하지만.
파지지지직!
일순간 그 위로 엄청난 광량(光量)의 뇌전이 치솟기 시작하더니 사방으로 그물을 퍼뜨렸다.
황금사자 비기
사자의 앞발
번- 쩍!
먼지 구름이 사방으로 흩어진 자리.
운석 하나가 황금사자를 짓누르지 못하고 허공에 멈춰 있었다.
그리고 표면을 따라 그려진 금빛의 실선들.
그 숫자가 삽시간에 불어나는가 싶더니.
콰콰콰콰-
얼마 안 가 운석은 그대로 와르르 부서졌다.
콰르르르릉!
운석을 가른 뇌전 기둥이 지면을 거칠게 할퀴면서 엘릭에게 치달았다.
아니, 오히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여름의 무덤이라… 참으로 건방지구나.”
이번에는 검을 횡대로 휘두르면서 검뢰를 십(十)자 형태로 만들어버린 탓이었다.
황금사자 비기
백수(百獸)의 왕
쿠쿠쿠쿠-
엘릭은 크런치 모드를 발동하며 겨울 6장의 힘을 모두 받아냈다.
콰아아아아!
그의 등 뒤로 얼음으로 이루어진 날개 한 쌍이 펼쳐졌다.
뒤이어 어마어마한 냉기가 엘릭의 주변에 소용돌이쳤다.
콱!
엘릭은 얼음창을 소환해 쥐었다.
손에 들린 무기에 겨울 6장의 힘이 모두 한껏 흘러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콰드드득!
얼음 창에 다미르와 체페슈의 힘을 덧씌우는 것도 모자라, 메피스토의 원죄 인장의 힘까지 끌어다 쓴 것이었다.
파직, 파지지직!
다미르의 신성력과 메피스토의 마기가 충돌하며, 불안정한 기운을 내 뿜었다.
‘나중에 한 소리 듣겠는데.’
아마 메피스토가 봤다면 미쳤냐고 한 소리 할 게 분명했다.
이미 겨울 6장의 힘을 받아낸 것도 충분히 무리하고 있는 것인데.
거기에 메피스토의 마기를 꾹꾹 눌러 담았으니까.
1년간의 수련에도 몸이 아직 원죄 인장의 힘을 버텨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증거로 엘릭의 몸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혈관이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자신 또한 충분히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엘릭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기운을 끌어올렸다.
육체 여기저기서 삐거덕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얼음창을 앞으로 깊숙하게 찔러넣었다.
십자 형태의 검뢰 정중앙에 얼음창이 깊숙하게 틀어박히면서.
퍼퍼퍼퍼펑!
굉음을 동반한 폭발이 삽시간에 심상 세계 전체로 퍼지면서 곳곳에다 균열을 만들어냈다.
팟-
파아앗!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걸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황금사자는 좌측으로.
엘릭은 우측으로.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다 서로 반시계 방향을 그리면서 달려와 충돌했다.
콰르르르-
검과 창의 충돌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콰아아앙!
쾅, 콰아앙!
두 사람이 격돌할 때마다 심상 세계가 거칠게 흔들렸다.
균열이 잔뜩 퍼진 하늘에서는 조각이 우수수 쏟아졌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걸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오직 눈앞의 적을 죽이겠다는 생각뿐.
콰아아아앙!
거대한 눈보라와 거친 뇌전이 서로를 찢어버릴 듯이 회오리쳤다.
그럴 때마다 지면과 허공이 마구잡이로 얼어붙었고.
곳곳에 낙뢰가 떨어지면서 사방을 불태웠다.
마치 세계에 종말이 찾아온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역시 강해.’
엘릭은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고통을 억지로 참으면서도, 심안으로 몇 번씩이나 황금사자의 이동을 쫓았다.
지난 2년 동안 그토록 절치부심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황금사자라는 벽은 높아도 너무 높은 것 같았다.
이대로 계속 싸움이 길어진다면 자신이 불리하다… 엘릭은 그렇게 판단했다.
자신이 이만한 힘을 뽑아내는 데는 제한 시간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 싶었는데-
그때였다.
‘뭐지?’
하늘에서부터 우수수 쏟아지는 심상의 파편들 중에 몇 가지가 유독 엘릭의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심상이 아니었다.
황금사자의 심상이 묻은 사념의 파편.
‘이게 왜 여기 있지?’
서로의 심상 영역이 뒤엉키면서 황금사자의 심상도 일부 떨어져나온 것일까.
문제는 그 심상 속에 담긴 기억들이 한순간 엘릭의 머릿속으로 들어온다는 점이었다.
“…!”
그 때문에 엘릭은 한순간 몸이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고.
황금사자의 공격에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균형을 바로 잡으려는데 시야가 반전되었다.
화아아악!
엘릭의 눈에 여러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하나 같이 금발에 녹안을 가진 모습.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지만, 자신과 같은 메르빙거 가의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중심엔, 똑같이 메르빙거로 보이는 한 아이가 냉대와 구박을 받는 중이었다.
엘릭은 아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어린 시절의 황금사자라는 사실을.
‘…황금사자의 어린 시절을 보고 있는 건가.’
* * *
어린 시절의 황금사자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래로 푹 숙이고 있는 얼굴.
구타를 당한 건지, 얼굴과 몸 곳곳엔 푸른 멍과 잔상처가 가득했고.
마법으로도 괴롭힘을 당했는지, 몸 곳곳엔 화상과 동상을 입은 흔적이 가득했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어린 황금사자를 향해 비아냥거리듯 말한 건 바로 그때였다.
“야, 레온.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런 하찮은 마법만 쓰고 있는 건데?”
“너는 정말 우리 가문의 수치다, 수치. 어쩜 그렇게 무능하냐.”
“뭐야? 우는 거야? 그래 어디 한번 우렁차게 울어봐. 너희 어머니께서 늠름한 사자처럼 자라라고 그런 이름을 지어 주셨다면서?”
엘릭은 그 풍경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황금사자가 ‘레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시절인 것 같은데… 그 광경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여기도 똑같네.’
절맥증을 앓던 시절. 자신이 주변으로부터 냉대받던 모습과 너무 똑같았으니.
다른 점이 있다면.
엘릭은 처음부터 독기를 가지고 그들과 맞서 싸웠던 것에 반해.
황금사자는 잔뜩 주눅이 들어있다는 점이었다.
오랜 차별과 멸시가 어린 시절의 그를 이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지금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다 레온은 무언가를 다짐했는지, 눈물을 꾹 참으면서 버럭 악다구니를 질렀다.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래! 그리고 그만해, 우린 가…!”
퍼억!
레온을 핍박하고 있는 자들 중에서, 유독 덩치가 큰 청년이 레온의 가슴을 걷어찼다.
“큭!”
레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넘어졌다.
청년이 분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뭐? 지금 가족이라 말하려 그랬냐?”
“하, 하지만 맞잖아!”
“맞긴 개뿔이. 너 같이 무능한 녀석이 무슨 가족이라고. 넌 수치야, 수치. 위대한 마도명문, 메르빙거의 수치라고.”
청년은 코웃음을 치며 주변을 둘러보라는 듯이 팔을 펼쳤다.
“봐라 레온. 우리 메르빙거는 전부 천재다. 화(火), 빙(氷), 뇌(雷)… 어느 속성을 가리지 않고 모든 마법에서 뛰어난 두각을 보이지. 하지만 너는 뭔데?”
“….”
“기껏해야 파이어 볼도 겨우 쓰는 녀석이 메르빙거? 하, 나 참. 어이가 없어서.”
“…!”
청년이 경멸하듯 내려다보며 말하자, 레온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하, 하트론.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우린 사촌이잖아.
레온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이들이야 자신과 꽤 거리가 먼 가족이라 해도, 하트론의 경우는 달랐다.
어렸을 적엔 제법 교류도 잦아 친하게 지냈던 관계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충격이 배가 되는 것 같았다.
“쳐다보기는. 재미없다. 돈이나 챙기고 가자.”
“자, 잠깐…!”
레온이 다급하게 말했지만, 주변에 있는 이들이 훨씬 빨랐다.
쩌저적!
순식간에 레온의 팔다리가 얼어붙었다.
그는 어떻게든 움직이기 위해 발악했지만, 노면에 달라붙은 팔다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어서 그들은 낄낄거리면서 레온의 주머니를 불로 태웠다.
그러자 돈주머니가 아래로 툭 하고 떨어졌다.
“어이쿠, 감사.”
하트론은 그것을 아주 익숙하게 받으면서 그대로 등을 돌려 일행과 함께 사라졌다.
레온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좌절과 절망.
슬픔이 교차했다.
“….”
엘릭은 그 순간까지 계속 레온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게 황금사자가 말했던 과거인가?’
엘릭은 휴크란에서 황금사자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네가 내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자신 역시 아카데미에서 매일 같이 조롱과 무시를 받았었기에 레온을 이해했다고 여겼지만.
아무래도 이 당시 레온이 받았던 충격은 그보다 훨씬 컸던 것 같았다.
‘멸시의 대상이 가족이라….’
누구보다 힘이 되고 도움을 줘야 할 가족으로부터 가문의 수치란 소리를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엘릭은 좀처럼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헤이즈까지 모든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를 아껴주었으니까.
가주직을 맡은 엘릭이 마법을 쓰지 못하는 와중에도 헤이즈는 끝까지 그를 믿어주었었다.
화악!
그 순간, 레온의 모습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대신에 또 다른 기억이 펼쳐졌다.
이번에도 메르빙거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하나 같이 나이가 지긋하다는 것.
가문의 장로들인 듯싶었다.
그들은 둥근 탁자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얘길 나누고 있었다.
“가문 역사상 이런 예가 있긴 있었소?”
“없었습니다. 애당초 신(神)도, 마(魔)도, 결국 세계의 모든 것이 파생되었던 곳이 바로 우리 메르빙거요. 그런 예가 있을 리가 없지!”
“허어… 이리도 재능이 없어서야.”
“…우리의 피를 이어받았는지조차 의심이 들 정도군.”
“나라고 해서 그런 의심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나….”
“확실히… 그 금발과 녹안은 어떻게 속일 수 있는 게 아니긴 하지요. 흠!”
누군지 콕 찍어서 얘기하고 있진 않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대상이 누군지는 그들 모두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레온 메르빙거.
“아무래도 이대로 가다간 가문의 명성에 누가 될 것 같은데….”
“가문에서 이름을 지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허! 그래도 애인데 못 하는 소리가 없군.”
“하지만 세간의 소문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가문의 일원에서 박탈될 위기까지 처하는 모습.
“허….”
엘릭은 믿을 수 없어 공기 빠진 소리를 냈다.
화악!
장로들의 모습이 흩어지듯 사라지고, 다시금 레온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의 앞엔 어머니로 보이는 이가 레온과 눈높이를 맞춘 채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레온 이걸 받아라.”
그녀는 은밀하게 반달 문양이 있는 목걸이를 건넸다.
레온은 그것을 받아들며 물었다.
“어머니 이건….”
“쉿. 묻지 말아라. 이걸 가지고 외숙부를 찾아가거라. 그럼 너를 받아주실 거야.”
“…알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레온은 고개를 숙이며 입에 든 말을 삼켰다.
그리곤 준비된 마차를 타고 가문을 훌쩍 떠났다.
엘릭이 멀어지는 마차를 가만히 보고 있을 때였다.
“건방진 녀석.”
뒤에서 황금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또한 사념 속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얼굴을 와락 구긴 채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감히 누구의 기억을 엿보는 것이냐.”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