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35화
금발과 녹안
쾅!
더욱 날카로워지는 황금사자의 기세.
이에 질세라, 엘릭도 잇달아 인장들을 발동시켰다.
파아아-
겨울, 봄, 여름.
순식간에 3계절의 기세가 주변을 감쌌다.
사방에 뜨거운 열풍이 불어 닥친다 싶더니, 하늘에서는 눈보라가 마구 휘몰아치면서 얼음 화살이 잇달아 맺혔다.
당장 황금사자에게 날아들 듯한 위세.
엘릭의 녹색 눈은 다른 어느 때보다 분노로 빛났다.
“메르빙거의 씨를 말려버리겠다?”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자신과 함께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이사벨.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 딸, 리아.
그리고 가문의 새로운 식솔이 되어준 별의 종군, 안드레, 산악 민족 등등.
성(姓)도 출신도 전부 다르지만, 엘릭에게 만큼은 누구보다 소중한 가족들이었다.
이제야 겨우 그토록 꿈에 그리던 가문의 모습을 갖추었는데.
“해봐. 어디 한 번.”
엘릭도 더 이상 존대를 하지 않았다.
여기서 이야기가 잘 풀린다면, 선조로서 대우를 해줄 용의도 있었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낸 이상에야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상대는 적(敵)이었다.
전쟁도 불사해야 할 적.
엘릭은 거리낌 없이 제 기운을 터뜨렸다.
콰르르릉-
순식간에 온갖 식기와 의자들이 부서진 채로 회오리를 그리며 사방에 부딪쳤고,
황금사자의 거친 기세마저 단번에 밀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있는 한 당신 뜻대로는 안 될 테니까.”
엘릭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 * *
“이런, 여기서…?”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크롬헬이었다.
그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심 장인어른과 엘릭의 대화가 좋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고는 예상했지만.
설마 이 자리에서 바로 맞붙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손을 써야 한다.
그런 생각에 그는 서둘러 허리에 있는 검에 손을 가져가려 했다.
하지만.
턱!
누군가의 손길에 팔이 막혀 그 자리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검집에서 절반만 나온 검이 반짝였다.
꿈쩍도 않는 손길.
크롬헬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그를 바라봤다.
가이였다.
“가만히 있게.”
“마탑주…!”
“우리는 여기서 방해꾼에 불과하니. 두 사람의 싸움은 두 사람이서 끝내야지 않겠나?”
“…!”
“그래도 억지로 나선다면 본인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만 말일세.”
가이의 협박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호위로서 들어왔던 각 진영의 병사와 마법사들 또한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대치하는 중이었다.
메르빙거의 가신들도 바쁘게 주변을 살피는 상황.
여차하면 곧바로 칼부림이 벌어질 듯한 일촉즉발의 상황.
크롬헬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여기서의 전투는 단순한 전투로 끝나지 않았다.
전쟁이었다.
그러는 사이.
엘릭과 황금사자의 두 눈이 부딪치면서, 두 사람은 두 사람만의 영역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엘릭 메르빙거 – 오리지널
자기영역
가이아(Gaia)
화아아악!
두 사람을 둘러싼 공간이 잔뜩 일그러지면서 외부 세계와는 전혀 다른 시간대가 발동되었다.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
엘릭은 자기 영역을 만들어내 황금사자를 초대한 것이었다.
그는 충분히 저항할 수 있음에도 초대에 응한 것이었고.
“재밌군.”
황금사자는 주변을 살피면서 가볍게 웃었다.
아무것도 없이 오직 넓은 초원만이 펼쳐진 장소.
시간은 한없이 느리게 흘러, 이곳은 사실상 영원의 세계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마법의 영역이 참으로 다채롭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런 식의 진행이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거든.”
황금사자는 엘릭의 자기 영역이 어떻게 구축되었는지를 단번에 알아챈 눈치였다.
사계의 안배를 모방한 자기 세계(自己世界).
단순히 의지만으로 엘릭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뜻일지니.
메르빙거 중에서도 경지에 이른 이들만이 가능한 기예였다.
어느덧 신의 경지에 조금씩 들고 있다는 뜻.
하지만 엘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
그의 말대로, 엘릭의 자기 영역은 사계를 보고 영감을 얻어 만들어낸 일종의 아공간이었다.
숙원대로 가문을 재건하고.
자신만의 영지를 개척하여.
그곳에서 가문, 즉 가족들과 함께 오랫동안 평화롭게 함께하고 싶은 마음.
그런 그의 비원이 현실화 된 것이 지난 2년 동안 노력 끝에 완성한 ‘가이아’였으니.
“그것 아나?”
“….”
“과거의 우스던도 너와 비슷했다는 사실을?”
뭐가 그리 즐거운지, 황금사자의 한쪽 입꼬리는 귓가에 닿아 있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너희 두 사람은 여러모로 아주 닮았지. 이상을 추구하는 성격하며 가문에 대한 애정, 세계를 바라보는 눈…. 그 모든 것이.”
엘릭에게 그것은 칭찬이었다.
언제든 쫓고자 했던 존재가 바로 조부님이었으니.
하지만.
황금사자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천 년을 넘는 노력 끝에 자신만의 경지를 구축하였으나, 끝끝내 넘지 못했던 벽.
어떻게든 뛰어넘고자 했으나 실패했던 메르빙거의 벽은 여기 또 하나 더 있었다.
그는 이제 그것을 완전히 부숴버릴 참이었다.
“확실히… 이곳이라면 지난 악연을 제대로 끊어버릴 수 있겠군.”
천 년이 넘는 악연을!
황금사자는 말을 마치는 즉시 자리를 박차고 엘릭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그를 중심으로 황금색 광채가 빛무리처럼 번져 나오면서 칼날처럼 날카롭게 번뜩였다.
살기로 가득한 모습.
그 모습이 마치 황금색 갈기를 흩날리면서 달리는 사자를 보는 것만 같았다.
엘릭은 마력을 손끝에 모으면서 몸을 빠르게 돌렸다. 3개의 인장이 이제 미친 듯이 떨리면서 마력을 하나로 합치고 있었다.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불길을 따라 푸른 초원이 삽시간에 극심한 가뭄으로 물들어 황무지가 되어버렸으니.
엘릭에게 모든 생기가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의 기세가 다른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황금사자가 휘두른 검과 엘릭의 손날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죽어라, 메르빙거!”
콰르르릉-
심상 세계가 거칠게 흔들렸다.
* * *
촤아아악!
금색 검기가 뇌전이 되어 허공을 찢었다.
검뢰(劍雷).
오늘날 황금사자를 탄생케 한 절기.
“【솟아나라】.”
거대한 얼음벽이 엘릭의 앞에 방패처럼 솟구쳐 올랐다.
콰르르르!
검기와 부딪힌 벽은 하얀 안개를 일으키며 무너져 내렸다.
엘릭은 안개 속에서 곧바로 열풍을 일으켜 앞으로 날렸다.
화르르륵!
어마어마한 열기에 안개가 단숨에 사라지고, 말라비틀어진 땅에 거대한 불길이 일었다.
그 탓에 평범했던 열풍은 어느새 해일처럼 일렁이는 모양새를 이루었다.
콰아아아!
화염이 거대한 입을 벌리며 황금사자를 압박했다.
겉으로 보기엔 거대한 포식자가 사냥감을 노리는 것만 같았지만.
타앗!
황금사자는 어렵지 않게 하늘로 도약하며 불길을 피해내고, 엄청난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황금사자 비기
뇌풍(雷風)
그럴 때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번개가 섞인 바람이 휘몰아치며 불길을 눌렀다.
아니, 찢어발겼다.
콰릉, 콰릉, 콰르릉-
쿠르르르-
엘릭의 화염은 이에 대항하듯 더욱 화려하게 타올랐다.
두 힘은 잠시 물러나는 듯싶더니.
이내 잡아먹을 기세로 다시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퍼어엉-
화아아악!
거대한 빛과 함께 폭발이 일어나면서 두 사람의 기세가 소멸했다.
위력이 엇비슷하다 보니 생긴 결과.
두 사람의 신형도 한참 뒤로 밀려날 정도였다.
“그새 강해졌군.”
황금사자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단 2년 사이에 달라진 엘릭의 실력이 참으로 경이로웠다.
분명히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그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했을 텐데.
두 번째 만남에서는 눈을 마주할 정도가 되었고.
이번 세 번째 만남에서는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으니.
“그래. 그것이야말로 너희 메르빙거의 존재들이지.”
황금사자는 그런 엘릭의 재능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가 겪은 모든 메르빙거가 그러했을지니.
더구나 지난 천 년의 업을 한몸에 물려받은 존재라면야, 저것이 아주 당연한 거였다.
하지만.
그러니 더욱더 부술 맛이 나지 않겠는가!
그는 황금사자.
메르빙거였으나, 이제는 메르빙거이기를 부정하는 자.
천 년의 모든 악연을 찢을 생각뿐이었다.
파아앗-
황금사자가 어느덧 엘릭의 눈앞까지 다다랐다.
“【쏟아져라】.”
하늘에서 무수히 많은 얼음 화살이 비처럼 떨어졌다.
단단한 내구도를 자랑하나, 그 끝에는 엄청난 화력이 내포된 화살.
그 자체만으로도 성벽 하나쯤은 쉽게 무너뜨릴 만한 공성포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재밌구나.”
하지만 황금사자는 아주 여유롭게 그것들에 대응했다.
따다다다당!
맹렬하게 검을 휘두를 때마다 화살들이 어렵지 않게 튕겨나고.
쐐애애액-
검날이 엘릭의 복부를 향해 작렬했다.
그 순간, 춘계의 인장이 극대화되면서 마력을 몇 배로 증폭시켰다.
부서진 얼음 조각들을 따라 거친 돌풍이 와류를 그리고, 그것은 순식간에 칼바람이 되어 황금사자를 둘러싼 감옥이 되었다.
칼날 감옥!
차차차차창!
거기다 땅밑에서부터 나무 넝쿨이 촉수처럼 튀어나오면서 사지를 결박하고자 하니.
황금사자는 바로 그 속에 갇힌 것으로만 보였다.
그러나.
“학습성이 없구나.”
황금사자 비기
사자후(獅子吼)
크헝헝헝헝!
사자의 거친 포효와 함께 사방에서 몰려들던 모든 마법들이 뒤로 밀려나거나, 모조리 박살났다.
파스스-
작은 얼음 가루들이 허공에 흩날리며 반짝였다.
“이딴 것들은 너무 뻔하…!”
“학습성이 없는 게 누군데?”
엘릭이 황금사자의 말을 끊곤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흠칫.
불길한 기색이 황금사자를 덮쳤다.
그가 엘릭을 돌아본 순간.
따악!
엘릭이 손가락을 튕겼다.
쾅쾅쾅쾅쾅!
황금사자의 주변에 있던 무수히 많은 얼음 조각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거친 불길이 단숨에 황금사자를 뒤덮고.
하계의 권능
유성우
하늘이 쩌걱 하고 갈라지면서 불길에 휩싸인 유성이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여름의 무덤에서처럼, 여기서 아예 묻어주지.”
콰르르릉-
황금사자가 그대로 파묻혀 사라졌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