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34화
금발과 녹안
신기하게도, 저들에게서는 적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당연하다는 투.
“저건 또 저것대로 열 받네.”
엘릭은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을 자사자로 부른다는 것은 ‘공작’으로서의 직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팔사자는 황금사자가 인정하는 가신의 개념.
저들은 황금사자보다 그를 아래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난 원한은 일절 보이지 않으니, 절도가 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례하다고 해야 할지.
아마 황금사자의 별다른 명령이 떨어지지 않으면 그에게 칼을 겨누지도 않을 것이다.
이전에 만난 기사단장과는 전혀 다른 부류들인 셈이었다.
‘물론, 마지막 모습까지 뜻대로 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적진에서 방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엘릭이 가신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일단 여기서 다들 대기하도록. 그리고 만약 일이 틀어질 경우엔.”
엘릭의 녹안이 스산하게 빛났다.
“포격을 개시해도 좋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엘릭은 일행과 함께 비행선과 성곽을 연결하고 있는 계단을 따라 아래로 향했다.
그 순간, 사자공가의 기사들이 썰물처럼 비키며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저기 있군』
메피스토가 호승심을 내비치면서 앞을 주시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사들이 만든 길 끝엔, 황금사자가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그의 금발과 녹안이 눈에 띄었다.
* * *
회담 장소는 대공성의 식당이었다.
식탁 한쪽엔 황금사자와 크롬헬 그리고 사자들로 보이는 몇몇 이들이 있었고.
맞은편엔 엘릭과 가이를 비롯해 이너니티, 헤르만, 안드레가 함께였다.
엘릭은 다른 사자들은 물론, 가이를 대신해 마탑을 대표하기로 입을 맞춘 상황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 황금사자를 잘 아는 사람은 엘릭이었으니까.
하지만.
달그락, 달그락-
식탁의 음식이 절반이나 사라진 뒤에도 그들 사이에는 별다른 대화가 오고 가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식당엔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만 울려 퍼질 뿐.
“….”
“….”
마치 어깨를 짓누르는 것만 같이 무거운 분위기.
대화를 나누기 위해 모였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였다.
대공성의 시종들은 그런 분위기에서도 분주히 음식을 나르고 그릇을 치웠다.
바삐 움직이면서도 흐트러짐 없이 각이 잡힌 모습.
엘릭은 그것만으로 사자공가의 분위기를 유추할 수 있었다.
‘지독하게도 차갑군.’
시종들은 마치 같은 곳에서 만들어낸 기계와도 같았다.
하는 행동이며 표정이며, 심지어 숨을 쉬는 속도마저 완벽하게 똑같았으니까.
‘그때 봤던 실험체들과 같은 존재들인가?’
그렇게 얼마나 침묵이 이어졌을까.
탁!
엘릭이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놨다.
그 소리에 황금사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엘릭은 황금사자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금발과 녹안.
메르빙거를 상징하는 모든 것들이 엘릭의 시야에 잡혔다.
하지만 그의 얼굴 표정은 엘릭과 달랐다.
아무런 생각도 읽을 수 없는 무표정.
밀랍 인형이 아닐까 싶었다.
“매번 느꼈던 거지만.”
“…?”
“정말 많이 닮았군요. 저희와.”
순간, 주변 사람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소리지?
영문을 몰라 엘릭과 황금사자를 번갈아 보는 시선들이 많아졌다.
사실 그들 대부분이 오래 전부터 느끼고는 있었다.
엘릭과 황금사자.
아니, 정확하게는 우스던과 황금사자.
두 사람이 어딘지 모르게 많이 닮았다는 것을.
그런데도 여기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마법을 대표하는 메르빙거와 검술을 대표하는 사자공가 간에 공통점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엘릭이 이것을 거론했다?
뭔가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비사(祕史)가.
아니나 다를까.
황금사자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고 있었다.
“듣자 하니 원래 메르빙거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언제 가문을 박차고 나가신 겁니까?”
“…!”
“…!”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모두가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감정이 없는 듯했던 시종들도 마찬가지.
심지어 크롬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딱 한 명.
당사자인 황금사자만큼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무덤덤하게 식기를 내려놓고,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옆에 있던 시종이 빠르게 다가와 접시를 치웠다.
“아마 대략 천 년 전이었을 거다.”
황금사자는 별것 아니라는 듯한 투였다.
하지만 그 말이 남긴 여파는 만만치 않았으니.
그 세월이 너무 터무니없이 길게 느껴진 탓이었다.
천 년.
평범한 이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겁의 시간.
그는 말로만 듣던 영생이라도 사는 걸까?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그래서 미르카가 알고 있던 거였군.’
덕분에 엘릭의 의문 하나가 풀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금사자는 계속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갔다.
“나는 원래 메르빙거의 서자 출신이었다. 더구나 마법에는 별다른 재능도 없었지.”
“….”
“그 때문에 가문에서 차별이 심했었고.”
그는 옆에 세워뒀던 검을 손으로 가볍게 두들기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검술에 흥미를 가졌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게는 그것마저 재능이 없었지.”
재능이 없었다고?
그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래도 굳이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어차피 어렸을 때부터 내가 모든 일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은 스스로가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니. 그래서 만사에 흥미를 가지지 못했지. 다만, 검은 달랐다.”
“….”
“그냥 좋았다. 내가 처음으로 좋아했던 것. 그렇게 말하면 좋을 듯하군.”
엘릭은 황금사자가 검을 들고 있을 때를 떠올렸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검을 자신의 몸에서 떼어놓질 않았다.
그때는 검사로서 당연한 자세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에게는 다른 의미였던 것 같았다.
“그래서 꾸준히 단련했다. 휘두르고, 또 휘두르고….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지. 내가 접할 수 있는 지식을 모두 흡수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지금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다.”
황금사자는 다시 검에서 손을 떼며 엘릭을 바라봤다.
“어떤가? 이만하면 충분한 답이 되었나?”
정리하자면 차별을 받아 가문을 나왔고, 그 과정에서 검을 익혔다는 것.
엘릭은 별다른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궁금한 것들은 많았다.
어떻게 영생을 살게 되었는지.
체인의 개념은 어떻게 만들어낸 거고, 그것이 메르빙거의 마법을 기반으로 한 것이 맞는지 등.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것들 모두가 결국 검을 ‘익히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일 뿐일 테니.
가장 중요한 건 황금사자라는 존재, 그 자체였다.
-단련에 단련을 끝없이 거듭하면서 탄생한 존재.
아마 숀의 검술도 그때쯤에 접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워. 역시나.’
엘릭은 황금사자의 덤덤한 말투 속에 담긴 짙은 한(恨)을 읽었다.
아마 검을 좋아하게 된 계기에는 마법에 대한 반발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마법이 너무나 싫어서 그와 반대되는 검을 쥐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재능이 없어도 계속 휘두른 거다.
빌어먹을 재능 따위는 어떻게든 극복해내고야 말겠다면서.
자신을 버린 가문에게 어떻게든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만으로.
그렇게 악에 받쳐 휘두르고 또 휘두르다가… 어떻게 그 한계를 벗어나고 만 것이다.
이를 테면.
황금사자는 자신과 정반대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엘릭은 메르빙거의 유일한 적자였고, 어렸을 때부터 가주가 되었던 몸이다.
재능도 무척이나 뛰어나 오히려 그것 때문에 마법을 쓰지 못했었고,
천형(天刑)을 극복하고 난 뒤에는 시조와 사계가 남긴 여러 안배를 통해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다.
가문의 모든 것이 집약된 집합체.
그것이 바로 엘릭이었다.
반면에 황금사자는?
정반대였다.
서자 출신에 가문에서도 버림 받은 몸.
지원 따윈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재능도 없었기에 오로지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길을 찾고, 벽에 부딪히고, 또 새로운 길을 찾고, 다른 벽에 부딪히기를 반복하다가… 이 경지에 오른 것이다.
천 년을 넘게 살아온 황금사자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불과 50여 년.
흔히 우스던 메르빙거와 동시대의 인물이라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오러 체인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타났다.
저토록 한이 많은 사람이 그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때부터였던 거야. 지금의 자리에 올라서게 된 것이. 가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천 년을 넘도록 단련만 거듭해서 경지를 개척한 사람이라니.
그 인고(忍苦)의 세월이 얼마나 지루하고 지독할지.
엘릭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가질 않아서 쉽게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황금사자는 묻고 있었다.
-내가 밟아온 세월을 네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
엘릭이 본격적으로 마법을 단련한 세월이라고 해봤자, 황금사자에 빗대면 너무나 사소하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품고 있는 건… 나만의 것이 아니야.’
엘릭이 품고 있는 것은 천 년을 넘도록 이어진 가문의 총아(寵兒).
그동안 가문이 쌓고 쌓은 것들을 모두 품고 있었다.
선조들의 한, 시조의 염원, 사계의 기다림… 그 모든 것들이 있는 한, 엘릭은 자신이 품고 있는 것이 절대 황금사자에 뒤진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렇기에.
엘릭은 크게 숨을 고르면서 물었다.
“전쟁.”
이 속에는 가문의 모든 것이 담겨 있으므로.
“계속하실 겁니까?”
“전쟁이라.”
황금사자의 입꼬리가 처음으로 길게 퍼졌다.
순간,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분노에 젖은 사자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내가 뭐라고 말할 것 같나?”
“글쎄요. 다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히 알 것 같습니다만. 이대로 간다면 결국 의미 없는 소모전만 계속되겠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메르빙거라는 가문 자체가 없어지는 결말을 맞을 수도 있지 않나?”
역시.
엘릭의 두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의 주변에 있던 헤르만 등도 재빨리 허리춤에 매달린 검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물었지? 전쟁을 할 것이냐고. 지금 바로 답변을 주마.”
쿠구구구-
식당이 거칠게 흔들렸다.
“할 것이다. 당연히. 내 숨이 붙어있는 이상, 반드시 이 대륙에 존재하는 네놈들의 씨를 완전히 말려버릴 것이니라.”
그 순간, 황금색으로 빛나는 사자가 일어섰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