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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93화 (392/405)

2부 133화

금발과 녹안

‘어,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어야…!’

강하게 나온다면 어느 정도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 판단했었건만.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아예 왔던 길을 돌아간다고 하니 기사단장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대로 회담이 취소된다면 자신들이 그 책임을 모두 져야만 했다.

아무리 충심에서 비롯되었다고는 하나.

허락되지 않은 부당한 요구를 한 것도 자신들이었으니까.

‘단장! 이걸 어쩝니까?’

‘지금이라도 붙잡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 원수에게 허리를 숙이자는 것이냐?’

‘그렇다고 이대로 보낼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기사단원들이 황급히 이야기를 나눴지만,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함대는 정말로 떠나려 하고 있었다.

우우우웅!

완전히 방향을 튼 비행선들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건가.

“잠…!”

기사단장이 뭐라고 외치려던 바로 그때였다.

촤아아악!

갑자기 보이지 않는 섬광이 눈앞에 번뜩인다 싶더니.

의식이 아래로 툭 꺼졌다.

마지막에 그가 본 것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수하들과.

차가운 얼굴로 서 있는 흑색 갑주의 사자였다.

* * *

“허…!”

엘릭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지된다 싶어서 고개를 돌렸더니, 그들의 목이 한꺼번에 허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털썩!

그들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인데 환대가 소홀해서 미안하군.”

엘릭이 미간을 찌푸렸다.

흑사자 크롬헬이 그곳에 서 있었다.

발끝에는 쓰러진 기사들이 흘린 피로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으나, 보아하니 이것들이 자네에게 무례를 저지른 것 같던데. 죽음으로써 갚았으니 이만 용서해주는 게 어떻겠나?”

그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가볍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크롬헬의 뒤로 노집사와 황궁 기사들이 차례대로 도착하는 게 보였다.

엘릭은 헛웃음을 흘렸다.

“옛 친구를 만났는데 표정이 썩 달가워 보이지 않는군?”

반면에 크롬헬은 친근하게 웃고 있었다.

“너 같으면 좋겠냐?”

엘릭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잠깐 고민했다.

조금 전의 일이 기사단장이 자의로 저지른 일이라는 것쯤이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 싸움을 벌였던 것이고.

그런데 여기서 크롬헬을 마주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만나더라도 회의실일 줄 알았건만.

‘후우…!’

엘릭은 가볍게 숨을 골랐다.

시로의 일은 오래 전의 일이고, 자신에게는 자신의 입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크롬헬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도 이제는 그만해도 될 것 같았다.

“너도 나보고 무장을 해제하라고 할 건가?”

“그럴 리가 있나.”

크롬헬은 검집에 검을 집어넣으며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비행선에 태워달라고 부탁할 생각은 있어도.”

『하! 적진에 제 발로 들어오겠다고? 저번부터 느꼈던 거지만.』

[…?]

『저놈도 너에 못지않은 또라이가 분명하다.』

엘릭은 메피스토에게 한 소리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냥 삼켰다.

크롬헬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쯤이야 예전부터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다행히 녀석의 다른 수행원들은 정상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저, 전하!”

“저곳은 메르빙거의 진영이 아닙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집사와 황궁 기사들이 질색하면서 크롬헬을 말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쉽게도 그렇다는데?”

엘릭으로서도 굳이 찝찝하게 크롬헬을 비행선에 태우고 싶지는 않아서 슬쩍 물러나려는데.

문제는 크롬헬이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하다는 점이었다.

“뭐 어떤가? 다른 곳도 아니고 친우의 본진인데. 설마 무슨 일이 생기려고?”

“하, 하지만… 전하!”

“어떤가, 엘릭? 설마 옛 친구라고 해도 문전박대를 할 정도는 아니겠지?”

쯧!

이쯤 되니 어쩔 수 없다 싶었던 것이다.

“하. 그래. 너 알아서 해라.”

엘릭이 몸을 반대로 돌렸다.

“타.”

“고맙군. 그렇지 않아도 소문으로만 듣던 비행선 내부가 너무 궁금했었는데 말이야.”

크롬헬은 장난기 가득한 모습이었다.

마치 처음 그를 봤을 때와 비슷한 얼굴.

엘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엘릭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 얼굴로, 비행선에 오르는 크롬헬을 바라봤다.

이전에 봤을 때와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좀 더 날카로워졌다고 해야 하나?

눈가에 생기도 조금 생긴 듯했다.

다만, 전체적으로 수척해진 느낌은 여전했다.

무언가를 다짐한 듯한 눈빛.

어떤 각오가 보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거의 2년 만인가?”

크롬헬은 반갑다면서 양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하지만 뒷짐을 쥔 엘릭의 팔은 전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크롬헬은 머쓱한 표정으로 팔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 건방진…!”

탕구트가 옆에서 발끈했지만.

“가만히 있게.”

크롬헬이 곧바로 그를 말렸다.

“친구와의 오랜만의 재회다. 누구도 방해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전하.”

크롬헬은 다시 엘릭을 응시했다.

“미안하군. 요즘 황실의 상황이 좋지 않아서 다들 예민한 상태라 말이야.”

“뭘.”

“그래서 근 1년간 어떻게 지냈나? 이런 비행선을 만들 정도면 꽤 바쁘게 지낸 것 같은데.”

크롬헬은 신기하다는 듯이 비행선 내부를 훑었다.

지금껏 별의별 신기한 것들을 보며 살아온 크롬헬이라 할지라도, 이런 풍경은 난생처음 봤기 때문이다.

“딱히.”

“그런가?”

그는 ‘어떻게 지냈냐’에 대한 답을 기다렸지만, 엘릭의 입술은 굳게 닫힌 상태였다.

“듣기론 아이가 태어났다면서? 축하하네.”

“고마워.”

크롬헬은 그 뒤로도 엘릭과 대화하기 위해 몇 개의 질문을 더 했다.

전보다 경지가 훨씬 더 높아진 것 같다.

동부가 많이 발전한 것 같더라.

군사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황실도 좀 본받아야겠다는 등의 얘기.

하지만 어떤 질문을 던져도 단답이었다.

결국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내려앉을 뿐이었다.

“….”

“….”

“어색하군.”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은 계속 길어졌다.

* * *

『너도 참 고집 하나는 징하구나. 어떻게 제대로 된 대답 한 번 없는 건지.』

메피스토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좋은 말이 나올 수가 있나요.]

하지만 엘릭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오히려 더 서먹해질 일만 있었지.]

그리고 엘릭이 굳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어차피 저 녀석이 저러는 것도 노림수가 있을 테구요.]

엘릭은 아마 크롬헬이 외부에 보이기 위한 정치용의 공작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대외적으로는 아직 엘릭과 크롬헬의 사이가 틀어졌다고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엘릭과 트러블이 생긴 건 어디까지나 사자공가나 감찰국에 국한될 뿐.

사람들은 여전히 두 사람은 친분이 있다고 생각했고, 크롬헬은 그동안 그것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엘릭도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 싫어 딱히 제지를 하지 않았으니.

아마 그걸 다시 이용하려던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수 있겠군. 다시 두 사람이 같이 외부 석상에 서는 건 아주 오랜만이니 말이다.』

메피스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정말 네놈과 다시 친해지려고 저러는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

[아뇨. 절대 그럴 일 없어요.]

엘릭은 확신했다.

[그럴 거였으면 진작 그랬을 테니까.]

감찰국이 선조의 무덤을 도굴하는 등 참혹한 짓을 저질렀어도, 엘릭은 잠자코 기다렸다.

지난 일들에 대해 황실에서 사과를 할 수 있었으니까.

만일 황실이 조금이라도 메르빙거 가를 존중하고, 크롬헬이 엘릭을 진심으로 친구라 생각했다면.

충분히 그러지 않았을까?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사과는 들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최근엔 삼공이란 작자가 사절로 와 무례를 저지르기까지 했다.

황실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불에 보듯 뻔했다.

그런 와중에 아무렇지 않게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대하려 한다?

당연히 엘릭으로서도 거부감이 들 수밖에.

[인간 생활에 정치가 필요하다지만, 저까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

크롬헬을 태워준 것도 어디까지나 황자에 대한 예우였을 뿐이었다.

『뭐, 그래. 너희들 일이니 알아서 하겠지. 쯧. 이렇게 복잡하게들 어떻게 사는 건지.』

메피스토는 더 이상 그들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다 크롬헬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우리 사이에 무슨 대화가 있을까. 결국 뭔가를 하더라도 서로를 의심하고 오해할 수밖에 없는 관계일 텐데.”

“….”

크롬헬의 눈동자는 지쳐 보였다.

하지만 그 속에 번뜩이는 무언가를 엘릭은 놓치지 않았다.

“너는 가문의 일로, 나는 시로의 일로. 결국 서로가 서로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밖에 없겠지. 굳이 그걸 부정할 이유도 없을 테고.”

엘릭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서로가 합을 맞춰야 할 일에 대해서나 이야기를 나눠야겠군.”

“좋아.”

“그럼 묻지.”

크롬헬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빛났다.

“너. 장인어른과 어떤 관계로 끝낼 거냐? 황실에서도 이번 회담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최근에야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렀다고는 하지만.

언제 다시 내전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라는 것은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알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소집회의 향방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 날 테지.

전쟁이냐. 평화냐.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대답해줬으면 좋겠는데.”

“지금 말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닌 것 같다만.”

“그래도 생각해둔 건 있을 것 아니냐.”

“아니. 없어.”

엘릭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정말이었다.

황금사자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엘릭은 자신의 생각을 얼마든지 바꿀 생각을 하고 있었다.

* * *

크롬헬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함대는 대공성 바로 앞에 도착했다.

“징그러운 놈들.”

엘릭은 갑판 위에 서 있다가, 그곳을 보고는 질린다는 목소리로 혀를 찼다.

미르카의 무덤에서 그렇게 많은 수의 기사와 검사들을 죽였음에도.

성곽엔 여전히 샐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기사가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막강한 전력을 자랑할 정도로 건재한 모습.

과연 4대 세력 중 하나인가 싶었다.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이쪽을 노려보는 기사들의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당장이라도 공격해올 것만 같았다.

스윽.

엘릭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들어 함대를 멈춰 세웠다.

그러자 기사들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사자 엘릭 메르빙거 님을 뵙습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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