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32화
금발과 녹안
“스승님께서 연락이 끊어지셨다고요?”
“그래. 몇 주 전부터 아예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네. 문제는.”
가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길리티 님도 같이 실종됐다는 거지.”
순간, 엘릭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
잘난 제자가 왔다며 누구보다 반겨줬을 오거스틴이 보이지 않아서 의아하다 싶었었는데.
물론, 자유분방한 오거스틴의 성격상 말없이 사라질 수는 있다.
하지만 엘릭이 아는 길리티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오거스틴을 줄곧 잘 따르면서도 네레스타의 규율에는 항상 충실했었으니까.
그런데 그까지 같이 사라졌다는 건 절대 쉽게 볼 일이 아니었다.
특히 요즘 같은 시기에는 더더욱.
“혹시 짐작 가시는 곳이라도 있습니까?”
“확실하진 않지만, 일단 자유혁명군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여기고 있다네.”
“자유혁명군….”
엘릭은 길리티가 과거에 자유혁명군의 간부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두 분이 사라지기 얼마 전부터 황도에 자유혁명군의 총수가 돌아다닌다는 괴소문이 돌았었다네. 그 때문에 황도며 정보 기관들까지 발칵 뒤집혔었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오거스틴이 총수와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으나.
길리티가 연관된 만큼, 그와 가까운 사이인 오거스틴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종종 말없이 출타하시는 경우가 제법 있었지만, 이렇게 연락이 되지 않은 적은 없다 보니 걱정되는군.”
자유혁명군의 총수에 대해서는 외부에 알려진 게 그리 많지 않다.
인외의 존재라느니,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초인이라느니, 사실은 다른 종족이라느니.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괴소문이 워낙에 파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인류 최악의 현상수배자.
30여 년 전 대마전쟁 이후로, 제국의 질서를 유일하게 위협하고 있는 곳이 바로 자유혁명군이었다.
그때였다.
누가 누굴 걱정한다는 말이냐.
휼이 낮은 음성으로 으르렁거렸다.
그놈은 다름 아닌 내가 인정한 놈이다. 그런 작자가 어디서 볼썽사납게 두들겨 맞고 다닐 것 같으냐?
“….”
장담하건대 어디 뒷골목에서 일진 놀이를 하면 했지, 결코 맞고 다니지는 않을 놈이다.
생각해보니 또 그러네.
엘릭은 휼을 실컷 두들겨 패던 오거스틴을 떠올리면서 피식 웃었다.
누가 두들겨 맞고 다녔다는 것이냐! 그때는 어디까지나 내가 아직 제대로 각성하기 전인…!
아, 눼이눼이.
그렇겠죠.
이 빌어먹을 놈이! 하여간 그 스승이나 제자 놈이나 하는 짓이 똑같아서는!
야, 그래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훨씬 낫거든?
엘릭은 휼의 짜증을 귓등으로 흘려버리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너무 크게 걱정하지는 말자.
지난 2년 동안 강해진 건 자신만이 아닐 것이다.
스승님도 그러할 테니 염려를 접어두자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스승님이시잖습니까. 워낙에 어디로 튈지 모르시는 분이니 너무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지 않을까요?”
“…하긴. 그도 그렇겠지? 하하.”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가이는 완전히 걱정을 내려놓지는 못하는 모습이었다.
* * *
엘릭의 함대는 계속해서 황도 위를 가르며 서북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거의 다 왔군.’
엘릭은 무표정한 얼굴로 갑판 위에서 지상을 내려다봤다.
그의 시야에 사자공가가 자리하고 있는 대공령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중심엔 사자공가의 상징 중 하나인 ‘대공성’이 위엄 넘치는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비행선들은 천천히 고도를 낮추며 대공령으로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함대가 그곳에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썩 멈추지 못할까!]
아래에서 사자후를 연상케 하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러가 가득 담긴 음성.
엘릭은 비행선 아래를 살펴보았다.
대공령 입구에 세워진 거대한 성벽.
그 위에서 사자공가의 기사단이 흉흉한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엘릭은 손짓으로 조금 더 고도를 낮추라 지시했다.
“주군, 제가 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오겠습니다.”
“아니. 내가 보고 올게. 아무래도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친데.”
엘릭은 자신을 만류하는 가신들을 놔두고 비행선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선두로 나서자, 순간 기사단과 눈이 마주쳤다.
기사단원들 대부분은 말로만 듣던 비행선을 보자 살짝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지?”
엘릭은 팔짱을 낀 채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러면서 자신의 기세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으니.
고오오-
순간, 몇몇 기사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꼴깍.
비행선도 비행선이지만, 엘릭의 위세가 만만치 않은 탓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마법사의 기세가 아니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전장과 사선을 넘나든 사자만이 가질 수 있는 기질.
그제야 떠오른 것이다.
엘릭이 얼마 전에 황금사자로부터 인정을 받은 자사자라는 사실을.
기사단장은 그런 수하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찡그리면서 앞으로 나섰다.
쾅!
가벼운 진각과 함께 엘릭의 기세가 흐트러졌다.
‘이것 봐라?’
순간, 엘릭의 눈이 묘하게 변했다.
사자공가를 수호하는 기사단장이니 실력이 제법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기질이 일반적인 사자와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외부에 내세운 사자들도 사자지만, 내부에도 그에 못지않은 고수들이 너무 많단 말이지.’
물론, 그중 상당수는 인체 실험을 통한 개발이었지만.
그래도 저만한 실력을 지닌다는 것부터가 대단한 거였다.
황금사자가 스승으로서의 능력도, 군주로서의 능력도 아주 대단하다는 증거였다.
그래도 그건 그것이고, 이건 이것이다.
저들은 공적으로 황금사자의 초대를 받은 자신을 막아선 꼴이 되었다.
자신들이 모시는 군주의 얼굴에다 먹칠을 하는 꼴.
하지만 기사단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곳은 평화를 위한 회담 장소요. 한데, 그런 곳에 이런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시오?”
“….”
엘릭은 가만히 기사단장이 하는 말을 지켜봤다.
“만일 이 이상 함대를 이끌고 대공령에 들어오겠다면 무단 침입으로 받아들이겠소.”
“그럼 어쩌라는 거지?”
엘릭의 살벌한 눈빛에도 기사단장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모든 인원은 함선에서 내려서 무장을 해제하도록 하시오.”
무척이나 단호한 말투.
그의 표정을 보니 절대로 물러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주군.”
어느새 헤르만이 다가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지금껏 사자 소집회가 이뤄지며, 이렇게 일방적으로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이건 분명히 위에서는 알지 못하는 저자의 일방적인 요구일 것입니다.”
“그렇단 말이죠.”
흐음.
엘릭은 제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기를 잠시.
그가 차갑게 웃더니 마력을 일으킨 손을 그대로 허공에 저었다.
그 순간.
키이이이잉!
쿠우우우우!
모든 비행선에서 함포가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더니, 그대로 포구를 돌려 기사단을 겨눴다.
수십 개의 포구가 일제히 대공성을 겨누는 모습.
단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포구 주변으로 마법진까지 그려지는 게, 당장이라도 화력을 보조할 인챈트 마법까지 발동되려 하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이쯤 되자 기사단장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키보다도 훨씬 큰 포구가 수십 개씩이나 이쪽을 겨누는 모습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금 전쟁이라도 치르자는 것이요!”
“필요하다면.”
“뭣이…?”
“필요하다면 당장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
기사단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숫제 협박이 아닌가.
문제는 그것이 단순한 공갈 협박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가 그동안 보아온 엘릭 메르빙거는 진짜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작자였다.
“그럼 다시 한번 더 묻지.”
엘릭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정말 무장을 해제하지 않으면 대공령으로의 출입이 불가능한가?”
“….”
기사단장은 이를 악물었다.
만약 여기서도 안 된다고 하면 전투가 개시될 것이다.
그런다면 평화 협정은 더 이상 운운하지 못하게 될 테지.
모든 게 파탄나는 것이다.
문제는 황금사자의 뜻이 거기에 있지 않다는 뜻이고.
그 책임은 모두 자신이 뒤집어써야 한다는 점이었다.
문제는 사자공가에도 자존심이 있다는 것.
여기까지 왔는데 한 번 내뱉은 말을 회수한다?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엘릭은 수많은 동료를 죽이기도 했던 원수.
머리를 숙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런 것을 모두 떠나서라도.
대공령의 치안을 지킬 의무가 있는 단장으로서는 저런 흉측한 무기를 대공령 안쪽으로 절대 들일 수가 없었다.
만약 제대로 된 평화 협상이 진행된다고 해도, 일이 잘못 틀어져 버리게 된다면?
그때 저 대공성 안쪽에 들어온 비행선들이 분란을 일으킨다면 큰일이었다.
시한 폭탄을 삼키는 꼴이 되는 것이다.
자칫 관계 없는 민간인들까지 피해를 볼 수 있는 일.
결국 기사단장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설사 나중에 황금사자에게 처벌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저런 걸 들일 수 없었다.
그는 숨을 크게 고르면서 독하게 눈을 떴다.
“그렇습니다. 무장을 해제하지 않으신다면, 설령 초대장이 있다고 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무슨?”
화포 세례를 각오했던 기사단장이 놀란 눈을 떴다.
이건 또 무슨 말이지?
엘릭이 대충 손을 흔들자, 그 많던 함포가 자취를 감추면서 함대의 머리가 반대 방향으로 틀기 시작했다.
“…!”
기사단장의 얼굴이 처음으로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설마… 신경전을 벌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대로 돌아간다고?
“사자공가에서 협상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어진 모양이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는데 또 그 먼 길을 가야하는 게 귀찮지만… 뭐, 어쩔 수 없지. 모두 동부로 돌아간다!”
엘릭은 투덜거리면서도 별반 미련이 남아있지 않다는 투였다.
우우우웅-
열 기나 되는 비행선들의 엔진이 일제히 가동되면서 다시 상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동부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차라리 전투가 벌어지면 동부가 무리한 요구를 해서 불상사가 벌어졌다고 우길 수나 있지, 이래서는 사자공가가 기껏 초대한 손님에게 면박을 준 꼴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 뒤에는 세상 모든 여론이 사자공가의 멍청함과 오만함을 비웃겠지.
그제야 엘릭의 노림수를 깨달은 기사단장의 얼굴이 창백하게 지새고 말았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