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31화
금발과 녹안
근 몇 년간 잠잠하기만 하던 마도명문 메르빙거의 등장.
당연히 언론이 들썩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행선의 등장! 메르빙거 가의 비상을 알리는 서막인가?>
제국 곳곳에서 메르빙거의 문양이 그려진 비행선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현대 마도공학 기술을 아득히 뛰어넘는 결정체로, 현재로선 마탑조차 제작이 힘들다는 답변이…(중략)….
…반면 이러한 비행선을 제작한 메르빙거의 기술력은 대체 어디까지인지에 대해 사람들의 의문이 끊이질 않고 있다.
과연, 현재의 메르빙거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이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집중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현재 사자공가와의 대립으로 더욱더 심화되어….
“볼 때마다 참 재미있는 친구야.”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항상 남들보다 앞서 나가고 있었으니.
크롬헬은 쓴웃음을 지으며 들고 있던 신문을 접었다.
‘난 이곳에 묶여 제대로 뛰지도 못하고 있건만.’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신문을 옆으로 대충 넘겼다.
곁에 있던 집사장, 탕구트는 슬쩍 신문을 뒤로 치웠다.
계속 크롬헬의 눈에 밟히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전하,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셔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이유는?”
“이는 황실에 대한 모독이며, 명백한 무력시위나 다름없습니다.”
“무력시위라….”
“현재 황실에서 메르빙거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잘 알면서도 저런 흉측한 것을 이끌고 제국을 횡단하고 있다니요.”
어느덧 탕구트의 눈빛엔 은은한 노기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마도명문이라 하여도 황국의 신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만.”
크롬헬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
그가 헛웃음을 흘리면서 탕구트를 올려다봤다.
“그렇다고 한들, 내가 뭘 할 수 있지?”
“….”
“말해봐라, 탕구트. 내가, 황태자도 못된 일개 황자인 내가 뭘 할 수 있냔 말이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선 다양한 감정이 엿보였다.
비관, 답답함, 분노, 우울 등.
하나 같이 부정적인 것들.
“…죄송합니다.”
탕구트는 그런 감정들을 읽어내곤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면서 크롬헬이 모르게 입안을 가볍게 씹었다.
“됐다. 나보단 음지로 숨어든 감찰국의 속이 적잖게 쓰라리겠군.”
계획대로만 일이 진행되었다면, 엘릭이 타고 다니는 비행선은 그들의 것이 됐을 수도 있었으니까.
후우-
먹먹한 감정을 비우고자, 크롬헬은 한숨을 내쉬곤 물었다.
“그래서 우리의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대체 최근엔 뭘 하고 계시지?”
그 말투는 잔뜩 배배 꼬여 있었다.
탕구트는 모른 척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크롬헬은 바로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골방에 틀어박혀서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아바마마?’
최근 몇 년 동안 황제는 대외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황실과 주변 여건은 점점 엉망이 되는데, 황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점점 상황이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황자로서 크롬헬이 뭐라도 해보려고 했지만, 황태자도 아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었다.
항상 다른 황자와 황녀들부터가 자신을 물어뜯기 바빴으니.
‘이대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 제국이 절단 나고 말 거야.’
시로의 죽음 이후, 탕구트 덕분에 정신을 차리긴 했다지만.
그래도 자신의 손으로 뭔가를 이뤄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이대로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앞으로 제국의 정치는 메르빙거의 움직임에 맞춰 변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크롬헬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역시 메르빙거가 무슨 생각인지 바로 옆에서 확인하는 것이 최선.’
크롬헬의 시선이 탕구트가 치운 신문 쪽으로 향했다.
메르빙거의 비상 어쩌고 하는 타이틀이 눈에 들어왔다.
“친구가… 저렇게 먼 길을 가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일단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해봐야지 않겠는가?
“탕구트.”
“예, 황자 전하.”
“엘릭을 맞이할 채비를 하도록 해라.”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탕구트는 허리를 숙이며 방을 나섰다.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 * *
네레스타 가문의 앞마당.
그곳엔 마탑주인 가이를 비롯해, 육망성과 워메이지 같은 마탑의 중진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회동을 가진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엘릭이 곧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
“설마… 그때 봤던 그 비행선 제작에 성공하다니. 과연!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 쪽에서 진행하던 건 아예 진척이 없다시피 했었는데 말입니다.”
그들 사이에선 단연 엘릭의 비행선에 관한 얘기가 한창이었다.
유령성에서의 전투 이후.
마탑은 그곳에 남겨진 비행선의 잔해를 수집했다.
감찰국이 가지고 있던 비행선의 위력이 상상을 초월했기에, 비슷한 걸 만들어 그에 대항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비행선은커녕 비슷한 것조차 만들지 못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마탑의 모든 지식을 활용해도, 비행선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개념이나 원리를 밝혀내는 데 대부분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머나먼 과거와 현재.
마법을 구성하는 방식도, 이론도, 개념도 많은 부분이 달랐다.
그러다 보니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밖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엘릭이 그런 비행선을 한 기도 아니고 열 기나 만들어냈다고 하니, 내심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메르빙거가 마탑과 별개의 조직으로 운영된다지만.
현재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으니, 기술과 지식의 공유가 어느 정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당대 마도사(魔道史)에 큰 변화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그들이 대화를 나누던 그때.
“저기 오는군요.”
가이가 감정을 죽인 얼굴로 저 멀리 허공을 바라봤다.
사람들의 시선이 똑같이 그곳을 향했다.
“어디 있…?”
누군가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창공 한가운데에 파문이 퍼진다 싶더니 곧 비행선이 한두 대씩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허…? 스텔스 모드까지?”
“저 거체에다 어떻게 투명화 마법까지 장착한 거지?”
“보통 투명화는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거리가 거리라서 그런지 잘 느껴지지 않는구려. 암습에도 아주 유용할 것 같은데.”
“야밤중에 몰래 나타나서 화력이라도 쏟아부었다간… 허!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겠소.”
하지만 그들의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비행선이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무렵, 다들 체내에서 발생한 이상 변화를 눈치챈 것이다.
흠칫!
“…전방위 디스펠까지?”
제대로 펼친 게 아니지만, 디스펠 결계 장치까지 감지되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메르빙거가 만든 비행선은 감찰국의 비행선보다 훨씬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그 뜻은 하나.
-메르빙거는 이미 마탑의 전력을 넘어섰다.
육망성으로서는 살 떨리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 ‘갑’의 위치에 있던 자신들이 ‘을’로 떨어진 셈이니.
한편으로는 학계에서 메르빙거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마탑의 위상이 떨어진 것 같아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문제는 앞으로 그 격차가 더 벌어지면 벌어졌지, 절대 줄어들지는 않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더 분발해야겠어.’
모두가 그런 생각을 가지는 가운데.
가이만큼은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동안 오랜 평화로 정체되다시피 하던 마탑에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것은 물론, 이들의 불안감이 결과적으로 네레스타에 대한 의지가 될 것이란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네레스타의 마탑 지배는 앞으로 더 견고해지면 견고해졌지, 약해지지는 않을 터였다.
‘처음에는 친구의 아들로만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볼 게 아니란 말이지.’
그때였다.
“여러분들, 오랜만입니다!”
비행선 위에서 엘릭이 이쪽으로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거친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탄 기체가 천천히 지상에 내려앉았고.
가이를 비롯한 마탑의 일원들은 비행선에 올라타면서 하나 같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부는 외부와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엘릭이 놀란 가이를 보며 뿌듯하다는 듯이 물었다.
“대단하군, 정말로. 그 말밖에 할 수가 없겠어.”
그러면서 한쪽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황도의 멍청이들은 냉수마찰이라도 한 기분이겠군.”
“사실 그러라고 그런 겁니다.”
“후후. 역시 자네의 그런 성격은 너무 마음에 든단 말이지.”
“저도 가이 님이 절 너무 잘 이해해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엘릭도 그와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으흐흐!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모사 꾸미는 악당들의 모습.
그걸 지켜보던 션의 눈빛이 짜게 식었다.
“왜 그런 얼굴이냐?”
“몰라서 묻냐? 하여간 너는…!”
션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곧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뭔 잔소리를 한다고 해서 네가 들을 놈도 아니고.”
션은 앞으로 엘릭이 이 말도 안 되는 무기를 휘두르면서 얼마나 더 많은 피해자(?)를 양산할 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한쪽 구석에서는 타샤가 오랜만에 만난 새끼 용들과 즐겁게 어울리고 있었다.
* * *
“얘기는 들었네. 휴크란에서 사자공가에게 한 방 크게 먹여줬다지?”
엘릭과 가이는 비행선 내부를 거닐면서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비행선은 다시 떠올라 황도 서북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고생 좀 했겠군.”
가이가 이해한다는 듯이 가볍게 웃었다.
유령성 전투 이후, 마탑 또한 사자공가와 감찰국과의 충돌이 샐 수도 없을 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지, 입가에 쓴웃음이 가득했다.
엘릭도 연락을 받아 그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위로하듯 말했다.
“저보단 마탑이 더 고생했죠. 그래도 최근엔 잠잠해져서 다행입니다.”
“그러니까 말이네. 덕분에 이쪽도 잠시 한숨 돌리고 있는 형편일세.”
언제부턴가 감찰국과 사자공가는 마탑과의 충돌을 피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이 이상의 전투는 필요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물론, 그것만 믿어서는 안 되기에 계속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이 님은 어쩌다 초대되신 겁니까?”
엘릭이 대공령으로 바로 가지 않고 네레스타 가문에 들른 이유는 간단했다.
가이로부터 자신이 사자공가의 초대장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
그래서 가는 길에 그들과 동행 하고자 온 것이었다.
“뭐, 일단 초대장에는 평화에 대해서 논의를 나눠보자는데… 일단은 지켜봐야지.”
엘릭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사자의 생각은 아직 모른다.
자세한 건 직접 만나봐야 알 것 같았다.
“그보다 자네에게는 따로 할 말이 있었어.”
“하실 말씀이라면?”
황금사자 말고 또 나눌 안건이 있었던가?
엘릭이 궁금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곧 인상을 굳히고 말았다.
“최근 작은 할아버님의 연락이 끊어졌다네.
“…!”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