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9화
동부
엘릭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들어본 적 있는 자로군.’
지난 2년 동안.
엘릭은 전쟁을 준비하면서 황실과 사자공가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사자공가의 사자들과 관련된 것들.
눈앞에 있는 이너니티에 대한 내용 또한 당연히 포함돼 있었다.
‘분명 실종됐다고 적혀있었는데 말이야.’
그 탓에 그의 정보는 다른 사자들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최근 몇 년간의 기록은 아예 없었고.
수도자로서 외부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은 탓에 과거의 기록 또한 얼마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황금사자가 직접 검을 지도해줬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
‘그런데도 기록이 없다는 건 그거대로 또 대단한 일이지.’
힘을 가졌다면 응당 뽐내는 것이 인간의 심리이기도 하니 말이다.
여하튼.
실종을 넘어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까지 했던 그가 모습을 드러냈으니.
헤르만과 안드레가 놀라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너니티는 그러한 반응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는 미동 하나 없이 엘릭을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동시에 엘릭은 깨달을 수 있었다.
“제 말이 절반만 맞은 이유. 이것이었군요.”
바로 사자공가.
교황의 이름으로 찾아오긴 했으나, 사자공가와도 연관이 있다는 뜻이었다.
‘청백 신의 사도이자 사자의 칭호도 갖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겠군.’
“맞습니다.”
이너니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릭은 그의 굳은 표정을 보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듯싶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교황님의 사절로서 온 이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엘릭은 그의 말을 경청했다.
신교 동맹은 그와 긴밀한 관계인 만큼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엘릭 님께서 사자공가에 고립된 저희 신도와 사제들을 구해주셨으면 합니다.”
“고립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엘릭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최근 들어 사자공가 내에서 모든 종교 활동이 정지됐습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이들이 모두 강제 억류된 상태입니다.”
그 탓에 모든 동료들과 연락이 끊어지게 되었고, 그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됐다는 것이 이너니티의 설명이었다.
“신교 동맹이 감찰국과 척을 졌기 때문이군요.”
“유감스럽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교 동맹이 목표하는 이상향은 마(魔)가 완전히 사라진 세상.
-척마멸사(斥魔滅邪).
마귀를 내쫓고 삿된 것을 없앤다는 것이 그들의 신조이자 이념이었다.
하지만 감찰국이 마족들과 결탁한 순간부터, 신교 동맹과의 대립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감찰국과 한 패인 사자공가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척마멸사’보다도 더 앞선 이념이 있었다.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라를 평안케 하고, 백성들을 돌본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일반 백성들이 정치 다툼에 휘말려 희생되는 것을 가장 꺼려했다.
신들의 가르침에 위배 되기도 했었고.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러다 보니 엘릭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자공가에 있는 신교 동맹의 신도만 해도 족히 수천수만 명은 될 것이다.
제국민 치고 마음 속에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
그런데 사자공가의 영지에 있는 영지민 수만 해도 수십만 명은 족히 넘을 테니.
엄청난 억압일 수밖에 없었다.
여론도 그만큼 좋지 않게 될 테지만.
‘황금사자가 그런 걸 신경 쓸 사람이 아니기도 하고.’
결국 신교 동맹에서는 그들을 어떻게든 구하는 게 목적이 될 것이다.
자칫 잘못했다간 이 일을 계기로 신교 동맹에서 메르빙거와의 관계에 살짝 거리를 둘 수도 있다.
어쩌면 중립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떻게든 이들의 요청을 들어주긴 해야 한다는 건데….
문제는.
사자공가에 들어가 그만한 인원을 한 번에 데리고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들이 사자공가 어디에 억류되어 있는지 알 방법도 없었고.
아무리 사자 출신인 헤르만과 안드레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애당초 사자공가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그런 탓에 갑자기 이런 일이 있다고 협상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들이라면 필시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 테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사자공가를 쳐들어갈 수도 없는 일.
전쟁으로 비화 될 게 분명했으니.
아무리 전쟁을 준비 중이라지만,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전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주는지는.
엘릭이 세상 그 누구보다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행히 그런 그의 걱정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다만,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엘릭 님. 사자공가와 접촉하실 만한 방법이 있으니까요.”
엘릭이 눈을 빛냈다.
확실히 신교 동맹에서도 이런 어려운 부탁을 하면서 아무 준비가 없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예. 제가 백사자로서 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너니티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조용히 편지 몇 개를 꺼냈다.
엘릭은 봉투에 찍힌 인장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 문양은 다름 아닌 사자공가의 것이었으니까.
“그게 뭡니까?”
“전국에 퍼진 사자들에게 건네는 초대장입니다. 며칠 전에 제게 하나가, 그리고 동맹 앞으로 여러 개가 도착하더군요.”
이너니티가 초대장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앞면엔 ‘사자 소집회’라는 글씨와 함께 초대하는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청사자 헤르만.
적사자 안드레.
이곳에 없는 회사자 세일러까지.
모두가 그것을 바라보고 인상을 굳혔다.
안드레는 아예 대놓고 혐오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황금사자에 대한 증오밖에 남지 않은 그로서는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일.
헤르만도 착잡한 표정이 그리 반기는 투는 아니었다.
그러다 두 사람은 이너니티가 들고 있는 초대장이 아직 한 장이 남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너니티는 마지막 남은 그것을 엘릭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왜 저한테 주십니까?”
“보시면 알 겁니다.”
이너니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여태껏 보이던 경건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
엘릭은 왜 그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곧 초대장에 적힌 문구를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자사자 엘릭에게.
“하!”
청문회 때 황금사자가 자신에게 속삭였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원한다면 자사자의 자리를 줄 의향이 있다.
엘릭이 자사자를 죽였으니 그에게 자사자의 자리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정말 그 말을 지킬 줄이야.
이쪽에서는 받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특히 서로의 관계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이런 초대장을 받으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올 테면 오고, 말 테면 말라는 건가?’
그만큼 엘릭을 대등한 관계가 아닌 아래로 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끝까지 오만이 장난이 아닌데.’
어쩌면 당연하다 싶기도 했다.
상대는 한때 우스던과 자웅을 겨룰 뿐 아니라, 천 년을 넘게 산 괴물이니.
옛 후손이나 다름없는 엘릭이 뭘 하더라도 적수로 인정하긴 어려울 테지.
엘릭으로서는 배알이 꼬일 일이지만.
엘릭은 초대장을 펼쳤다.
과연 이 안에는 어떤 헛소리를 지껄여놨을까 싶어서.
그곳엔 예상했던 대로 자사자의 자격을 인정한다는 내용과 함께.
‘…이건?’
과거사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진지하게 나눠보자고?’
『이것만 봐서는 애송이, 너를 적수로 인정하겠다는 의미인 것 같은데?』
엘릭은 황금사자가 마지막까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예측이 틀린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알아내려 애써도 절대 말하려 하지 않았던 메르빙거와의 관계를 말해주겠다니?
메르빙거의 가주로 인정한단 뜻이 아닌가.
『본왕이 그동안 옆에서 지켜봤던 황금사자는 절대 헛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긴 했지. 그냥 허투루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저도 동감합니다.]
『속을 알 수 없군. 이전까지는 절대 너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었는데 말이지.』
뜻밖이었던지 메피스토도 모처럼 진지하게 이번 일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엘릭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만나보면 알겠죠.]
『가려고?』
[그럼요. 이렇게 대놓고 부르는데 안 가면 그것도 우습잖아요?]
어쩌면 신교 동맹의 신도들을 억류시킨 것도, 자신을 부르기 위한 술수가 아닐까 싶었다.
“주군,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흰 주군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헤르만과 안드레의 질문에 엘릭이 뭐라고 대답하려는데.
이너니티가 말했다.
“교황께서 이는 어디까지나 ‘부탁’이라 하셨습니다.”
“부탁이요?”
“예. 지금 시기에 소집회라니. 함정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겠죠.”
“그러니…!”
“하지만 그래서 더 찾아가 볼 생각입니다.”
“주군!”
“왜 굳이 위험한 길을…?”
헤르만과 안드레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지만.
엘릭은 진지한 투로 앉을 것을 명령했다.
“명색이 ‘초대’를 받았는데 그걸 거절하는 것도 공작으로서 보일 만한 예절은 아니니까요. 게다가.”
엘릭은 피식 웃으면서 탁상에 던져둔 초대장을 내려다봤다.
“제가 무서워 할 이유도 없고 말이죠.”
“…!”
“…!”
그 말뜻을 눈치 챈 헤르만과 안드레가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드디어 경지를 구축하신 겁니까? 경하드립니다.”
“경하드립니다, 주군…!”
엘릭이 지난 2년 동안 절치부심 노력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황금사자조차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실력을 구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보일 수밖에 없는 반응.
엘릭은 묘하게 웃었다.
이너니티도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제2의 별의 마도사가 탄생했군요. 신의 축복이십니다. 축하드립니다.”
“아주 작은 발전일 뿐입니다. 그래도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너니티는 저 젊은 나이에 벌써 ‘대현자’의 급이 되어버린 엘릭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듣기로는 소드마스터와도 직접 검을 겨룰 정도로 뛰어난 무술가이기도 하다던데.
과연 무술에 있어서도 그만한 발전을 이뤘을까?
황금사자와 견줄만한 절대자의 탄생이라니.
어쩌면.
조만간에 세상이 새롭게 들썩일 만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