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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88화 (387/405)

2부 128화

동부

브라이언의 눈이 커졌다.

안테도 상당히 놀랐는지, 멍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르카가 참 많은 것을 줬어.’

성격은 괴팍하긴 했지만.

엘릭은 그녀의 안배 속에서 잠시 머물렀던 서재를 떠올렸다.

그곳에 있는 책의 내용 중에선 미르카와 관련된 것들이 제법 존재했다.

그녀의 역사는 물론, 그녀의 마도공학적 지식까지.

감찰국이 먼저 미르카의 무덤을 도굴한 탓에 영영 찾지 못할 줄만 알았던 내용이었다.

미르카 또한 그것을 인지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안배를 통해 엘릭에게 보여준 것을 보면.

엘릭은 그런 것들을 전부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다가, 그대로 새로운 책자에 옮겨 적은 것이었다.

“그래서 뒤에 보면 비행선의 설계도도 있을 거야.”

“비행선이라면… 설마 ‘그’ 비행선 말씀이십니까?”

브라이언은 줄곧 동부에 있던 탓에 직접 미르카의 비행선을 보진 못했지만.

그것에 대한 소문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을 수 있었다.

현재 마탑이 가진 기술로도 제작이 불가하며.

단 한 대만으로도 어지간한 세력 자체를 궤멸시킬 수 있을 정도의 화력.

마탑주인 가이 네레스타를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던가?

그렇다 보니 소문을 들었을 때만 해도 적잖게 놀랐었다.

기회가 된다면 실제로 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것에 아쉬워하기도 했었고.

그런데 그런 기체의 설계도란다.

당연히 놀랄 수밖에.

“저희에게 이걸 보여주신 이유는 혹시…?”

“맞아.”

엘릭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별의 종군에서 책자의 내용을 연구하고 비행선을 대거 제작해줬으면 좋겠어.”

헤르만이나 안드레에게 맡기기에는 그들이 마도지식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적었다.

이미 맡고 있는 일들이 너무 많기도 했고.

바투가 있는 산악 민족 역시 마찬가지.

그들은 유산에 대한 이해도가 아주 적었다.

그러니 남은 곳은 딱 한 군데.

별의 종군밖에 없었다.

충분히 신뢰할 수 있고, 유산의 가치를 알고 있으며, 엘릭의 지시를 훌륭하게 이행할 수 있는 이들.

무엇보다 그들 대부분이 마법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상당수가 메르빙거의 마도 지식에 이끌려 온 이들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아…!”

“제작에 성공만 한다면 앞으로 우리를 건드릴 수 있는 곳은 아무도 없을 거야.”

브라이언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십 대의 비행선이 하늘을 빼곡 물들인다면.

그것을 저항할 수 있는 세력이 몇이나 될까?

황실도 한 수 접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

“그런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이해되지 않는 개념들도 너무 많구요.”

한때 5급 행정관까지 했던 브라이언에게조차 어려운 지식.

별의 종군 내에서 가방끈이 긴 이들을 모은다 해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여러 학문 기관에 자문을 구해야 할지도 몰랐다.

“걱정하지 마. 마탑에서 도와주기로 한 데다가, 나도 같이 연구에 참여할 테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리고 걸림돌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뭐지?”

“아무래도 이만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

“예. 그렇습니다.”

아무리 상인 출신인 헤르만이 동부의 재정을 안정적으로 만들었다 해도.

규모가 큰 만큼 상당한 비용이 들 게 분명하다.

마탑에서조차 가장 큰 비용을 차지하는 게 바로 육망성과 그 휘하의 연구비였으니까.

원래 마법이라는 학문이 돈을 먹고 자라는 학문이었다.

“그것도 걱정 마. 이미 마련해 뒀으니까.”

엘릭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러자 활짝 열린 인터레시아.

가문의 유산이 잠든 마법 창고에는 메르빙거가 왜 명문가인지 보여주는 엄청난 양의 재산이 있었으니까.

“이, 이건…!”

“말도 안 돼….”

브라이언과 아테의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사기꾼.』

[또 가만히 있다가 왜 그러십니까?]

『그럼 사기꾼이지! 저 중 절반 이상은 보석의 숲에서 가져온 것이지 않으냐!』

[지천에 널려 있는 거 조금 가져온다고 해서 문제가 되나요. 흐흐.]

엘릭은 마법 창고에 있는 돈이 다 떨어진다면 또 다시 보석의 숲에 찾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인플레이션 등을 생각해서는 정도껏 해야겠지만.

그래도 마르지 않는 화수분(?)을 가지고 있다는 건 이렇게 큰 도움이 되었다.

브라이언은 아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돈을 본 적이 없었으니 놀랄 수밖에.

한편으로는 얼굴이 잔뜩 상기되기도 했다.

‘여기라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해낼 수 있을 거야!’

마도공학.

무한한 연구비.

마탑과 메르빙거의 지원까지.

이 모든 조건들을 완벽하게 갖춘 곳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한평생 돈에 쪼들리며 상사나 투자자들의 눈칫밥이나 먹고 살아야 했던 브라이언으로서는 감개가 무량한 일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과분할 정도입니다.”

브라이언은 어서 빨리 실험실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잔뜩 흥분한 채로 서둘러 책자를 챙겼다.

물론, 아테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저흰 바로 프로젝트에 착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접견실에 남은 가신은 아무도 없었다.

“….”

엘릭은 홀로 남아 커피향을 음미했다.

이 고요한 분위기가.

언젠가 찾아올 폭풍의 전야처럼 조용해서 최대한 즐기고 싶었다.

* * *

2년이란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그동안 동부는 더욱 안정되어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물론 겉보기에만 그럴 뿐.

겉과 다르게 뒤에선 열심히 방어 체재가 구축되고 있는 중이었다.

만에 하나 벌어질 수 있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바바바바.”

“메피 이거 보세요. 제 딸이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네 녀석 귀가 어떻게 된 것이냐? 이게 옹알이지 뭐가 말하는 것이냐?』

메피스토가 불편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리아를 내려다 봤다.

“에이. 방금 아빠라고 했잖습니까? 그리고 애 앞에서 얼굴 좀 핍시다, 네? 애가 못생긴 얼굴 따라할까 봐 무섭잖아요.”

『뭐라? 차라리 본왕을 닮는 게 낫지. 그게 무슨 망발이냐?』

“쉿! 조용히 해요. 또 말하려고 한다. 리아야 뭐라고? 아빠?”

“부부부부부.”

“아빠 해야지, 아빠.”

“아빠바바바.”

“오오! 그렇지!”

엘릭이 감탄하며 기뻐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빠바바부부부. 바바바부부부.”

“…?”

“아빠바바부부부.”

아무리 애가 모르고 하는 말이라지만 기분이 이상했던 탓이다.

그 모습에 메피스토가 폭소를 터뜨렸다.

『파하하하! 그래도 명색이 메르빙거라고 영특하긴 하군. 제 아버지의 정체도 알고 있고.』

“…조용히 좀 하시죠? 애가 옹알이하는 것 가지고 이상한 소리를 다 하시고.”

『흥. 옹알이를 가지고 천재니 뭐니 하는 건 말이나 되느냐?』

그러던 그때.

“아빠 바부.”

리아가 아주 선명한 발음으로 입술을 벙긋거렸다.

엘릭의 볼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리… 아야?”

“….”

하지만 리아는 입을 꾹 다물 뿐.

꺄아! 꺄아! 다른 소리를 낼 뿐이었다.

“리아야? 다시 말해보자. 자, 따라해 봐. 아빠. 천재. 아빠. 천재. 응? 어서 해봐야지?”

꺄르륵!

『흥. 이상한 걸 계속 시키니 애도 질려하는 게 안 보이느냐?』

엘릭은 메피스토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리아야, 응?”

그러다.

“으아아아앙!”

리아가 계속된 재촉에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엘릭이 어쩔 줄 몰라 전전긍긍하는데.

짜악!

“크흡…!”

갑자기 누군가 엘릭의 등짝을 후려쳤다.

“애랑 좀 놀고 있으라니까,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예요?”

잠시 볼일 때문에 나가 있던 이사벨이 리아의 울음소리를 듣고 돌아온 것이다.

“아니 이사벨, 그게 아니라….”

“됐어요!”

이사벨이 리아를 빼앗듯이 안으면서 등을 토닥거렸다.

곧 리아가 다시 해맑은 얼굴이 되었다.

꺄르르!

“어마, 어마!”

어떻게든 ‘엄마’라고 말하려는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이사벨의 얼굴이 웃음꽃이 잔뜩 폈다.

“…왜 나는.”

엘릭은 여전히 리아에게 애타는 시선을 보냈지만 원하는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흑흑. 딸자식 예뻐해봤자 아무 효과 없어….

엘릭이 그런 절망감에 빠져 우울함에 젖어있을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헤르만입니다, 가주.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평소 리아를 볼 때면 할아버지가 놀러 왔다면서 웃음소리를 낼 때와는 완전히 다른 말투.

급한 업무 때문에 왔다는 의미였다.

“예. 들어오세요.”

곧 문이 열리면서 헤르만이 들어왔다.

헤르만은 리아 쪽을 보면서 살짝 미소를 흘리다가, 곧 굳은 표정이 되어 말했다.

“사절이 왔습니다.”

“사절?”

엘릭의 미간이 좁혀졌다.

“설마 또 황실에서 온 겁니까?”

“아닙니다. 이번엔 신교 동맹 쪽의 손님입니다.”

교황의 사절이었다.

* * *

엘릭은 헤르만과 안드레만 대동한 채 접견실로 향했다.

둘과 함께 와달라는 사절의 부탁이 있어서였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절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순백의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

곳곳에 수놓아진 금색 무늬와 투구, 양옆에 자리한 날개 모양의 장식은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앉아 있는 자세조차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기품이 물씬 풍겼다.

과연 교황의 사절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오셨군요.”

기사는 엘릭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의 투구에 엘릭의 얼굴이 거울처럼 반사됐다.

“교황께서 무슨 일로 보내셨습니까? 혹시 감찰국 잔당들의 움직임이라도 그새 발견되었습니까?”

“절반은 맞으시고 절반은 틀리십니다.”

“그게 무슨…?”

“우선 답을 드리기 전에, 늦은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엘릭은 사절이 어쩐지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곧 그가 얼굴 전체를 푹 가릴 정도로 커다란 투구를 천천히 벗었다.

그리고.

“자, 자네는…!”

“살아있었나?”

순간, 헤르만과 안드레의 눈이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이 커졌다.

평소에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은 두 사람마저 놀랄 사람이라니.

“아는 사람입니까?”

“알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저 기사는….”

헤르만이 엘릭의 물음에 대한 답을 끝내기도 전에.

사절이 일어나 예를 표했다.

“저는 청백(淸白)의 신을 모시는 사도이자 사자공가에 속한 백사자, 이너니티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메르빙거 공작님.”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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